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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7년 09월 19일(火)
‘失樂園의 슬픔’ 절제된 균형美… 바로크적 古典 정점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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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 푸생(N.Poussin)의 ‘나도 한때 아르카디아에 있었네’(Et in Arcadia Ego·1638). 낙원은 현재 실현되는 대상이 아니라 기억과 사고의 사안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광훈의 미학 에세이… ⑦ 낙원의 꿈 - 푸생의 아르카디아(1)

누구에게나 한두 가지 말 못할 그리움이나 숨은 열망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게도 다르지 않다. 나에게 그 열망은 이런 물음으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시가 그리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지상적 낙원은 과연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글은 왜 쓰고, 예술은 무엇을 표현하며, 사상은 무엇을 구축할 수 있는가?

설령 낙원이 없다고 해도 낙원을 좇는 인간의 꿈은 낙원적이지 않은가? 이런 갈망을 담은 이 글이 기억을 환기하는 한, 그 자체로 고귀하지 않은가?

좋은 글에는 낙원이 비유처럼 마치 물그림자처럼 어려 있다. 그렇듯이 예술은 낙원을 상상적으로 소환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낙원을 향한 이러한 갈망, 이 갈망의 에너지를 잃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에너지는 ‘좀 더 나아지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선의지’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헤겔(F.Hegel)은 선을 ‘실현된 자유(Realisieren Freiheit)’라고 썼지만, 우리는 선의지 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떠올리고 쳐다보곤 하는 그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니콜라 푸생(N.Poussin)의 ‘나도 한때 아르카디아에 있었네’(Et in Arcadia Ego·1638)다. 나는 이 풍경화와 관련하여 15년 여 전에 ‘꿈-죄-글-길’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구체적 보편성의 모험-김우창 읽기’·삼인·2001). 이 그림은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의 어떤 궁극적 지향점인 것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마음의 한구석에 늘 자리해 왔다. 이번에 이 그림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그러나 조금 다르게 써보려 한다.



# ‘나도 한때 아르카디아에 있었네’

그림 중앙에는 누런 황토색의 커다란 석관(石棺)이 하나 놓여 있다. 이 석관 주위로 네 명의 사람이 모여 있다. 석관의 중심에는 무슨 글자-아마도 ‘에트 인 아르카디아 에고(Et in Arcadia Ego)’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듯하다.

이 글자를 턱수염 난 사람이 중앙에서, 왼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힌 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들여다보고 있다. 그 오른편에 선 목자는 돌 위에 왼발을 올려놓고 허리를 구부린 채 이 석관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오른쪽 여인을 향해 있다. 이 여인은 화려한 황금빛 옷차림으로 보아 양치기는 아닌 듯하다. 어쩌면 그녀는 여신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른손은 오른편 목자의 어깨 위에 놓고 왼손은 자기 허리에 놓은 채, 아무런 요동 없이, 지극한 절도(節度)와 평정심 속에서 이 해독작업을 바라본다. 그녀는 아마도 역사의 신 클리오(Clio)이거나, 낙원 같은 이 지역을 인격화한 ‘아르카디아’일 것이다. 이 여신과 대조적으로 그림 왼쪽에는 또 한 명의 목자가 왼팔을 길게 뻗어 석관 위에 얹고 오른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선 채, 동료 양치기의 해독하는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다.

이 석관과 세 명의 양치기들, 그리고 한 명의 여신 둘레로 서너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저 멀리 들녘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는 산이 보인다. 하늘은 푸르고 하얀 구름도 여기저기 떠다닌다. 아르카디아는 원래 그리스 중부의 척박한 초원지대이지만, 버질(Vergil)이 풍요와 축복의 땅으로 묘사한 이래 서구 예술사에서 오랫동안 낙원과도 같은 이상향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그림의 제목이자 석관에 적힌 글자인 ‘Et in Arcadia Ego’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글자 그대로 그것은 ‘나도 아르카디아에 있다’는 뜻이지만, 그리고 이때의 ‘나’란 무덤 속의 죽은 자를 말하겠지만, 양치기의 입장에서 보면, 아르카디아에 있었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일 것이고, 따라서 의미론적으로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 있었네’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상향의 체험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일이 되고, 우리의 사건이 아닌 ‘그들’의 사건이 된다. 보다 나은 세상은 지금 여기 우리가 누릴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나은 세상은 실현되고 체험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기억과 회고의 사안일 뿐이고, 낙원의 내용은 성공한 사실이라기보다는 실패의 토로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남겨진 것은 낙원 그 자체가 아니라 낙원에 대한 단편적 기억과 회고-낙원 실패의 확인 이외에는 없는 것인가? 이것은 같은 제목으로 이 그림보다 10여 년 앞서 제작된 푸생의 그림(1627∼1628)이나, 이 두 그림의 원천으로 알려진 구에르치노(Guercino)의, 같은 제목을 가진 그림을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  푸생의 동명의 작품의 원천으로 알려진 구에르치노의 ‘나도 한때 아르카디아에 있었네’. 사라진 낙원과 죽음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 낙원-죽음-슬픔-사색

구에르치노의 그림 ‘나도 한때 아르카디아에 있었네’(1618∼1622)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왼편에는 시커먼 바위 너머로 두 양치기가 반쯤 앉은 채로 있고, 오른편에는 무슨 주춧돌인 듯한 받침대 위에 해골 하나가 놓여 있다. 두 목자는 지팡이를 짚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해골을 골똘히 바라본다. 왼편 목자는 하얀 얼굴로 좀 어려 보이는 반면, 모자 쓴 오른편 목자는 좀 더 나이 들어 보인다. 하얗게 바랜 해골 위에는 날벌레가 한 마리 붙어 있고, 이 빠진 턱뼈 옆으로는 쥐 한 마리가 기웃거리고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두개골의 양분을 빨아먹는지도 모른다. 한 생애를 기억하는 것은 삭아 허물어진 뼈의 잔해 주변을 기웃거리는 쥐나 파리나 바람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 받침대 벽돌에는 바로 그 글자-‘Et in Arcadia Ego’가 한 줄로 적혀 있다.

푸생의 첫 번째 아르카디아 그림 역시 구에르치노 그림에 나타난 몇 가지 모티브, 이를테면 목자들의 서로 다른 나이나 해골 장면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푸생의 그림에서 해골은 구에르치노의 그림에서처럼 받침대가 아니라 큼직한 석관 위에 더 작게, 그리고 비스듬히 놓여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두 양치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좌우로 두 인물이 더 있다. 왼편으로는 흰옷 차림의 여자 양치기가 한 명 서 있고, 오른편으로는 좀 더 나이 든 남자가, 하얀 등을 다 드러낸 채 지친 듯이 앉아 있다. 그는 아르카디아 지방을 지나가는 알포이스(Alpheus)강을 상징한다고 말해진다. 그가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것은 이 강이 대부분 지하로 흐르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고 왼팔을 늘어뜨린 채 땅바닥을 쳐다보는 그의 모습은 그림 전체의 애수에 찬 분위기-사라져버린 낙원과 이 낙원에서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이 회한은 결국 삶의 근본적 유한성에서 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애수 어린 분위기는 10여 년 뒤에 그려진 두 번째 그림에서 훨씬 정제된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아르카디아 그림에서 석관은 비스듬히 놓여 있고, 세 양치기도 선 채로 두 팔을 벌리거나 올리면서, 혹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채로, 글자를 읽고 있다. 그러니만큼 그것은 바로크 특유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앉아 있는 목동 역시 체념에 차 있긴 하지만, 왼편으로 뻗어있는 왼팔과 오른쪽 팔꿈치에서 왼쪽 다리로 이어지는 몸의 굴곡은 어떤 운동성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두 번째 아르카디아 그림에서는 더 이상 해골이 보이지 않는다. 석관도 화면에서 비딱하게 불안정한 위치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좌우와 상하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면서 정중앙에 똑바로 놓여 있다. 이러한 균형에 양치기들의 몸짓 역시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각자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구부리는 서로 다른 형태이긴 하나, 예외 없이 차분한 태도로 글자를 바라본다. 이들의 옷매무새도 더 단정하게 가다듬어져 있다. 말하자면 1638∼1639년의 ‘나도 한때 아르카디아에 있었네’에서 모든 것은, 인물의 표정이든 자세든, 구성이든 암시든 놀랍도록 완벽한 고전적 양식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푸생의 이 그림은 바로크적 고전의 정점을 이룬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절제된 화면구성과 차분한 색채 속에서도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 있었네’(1638∼1639)는 어떤 비애-낙원 상실의 깊은 슬픔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슬픔은 고전적 양식이 구현하는 절제와 신중 덕분에 일정한 균형을 얻고 있다. 어쩌면 그 수준은 ‘최고’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균형은 고전적 완전성의 균형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식적 완전성과 건축적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런 형식적 엄격성 덕분에 감정이 흘러 넘쳐 격앙되거나 아니면 턱없이 모자라서 삭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훌륭한 작품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낙원 상실의 회한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 회한은 너무도 뿌리 깊이 박힌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실낙원의 모티브는 호머(Homer)와 버질에서부터 괴테(Goethe)와 실러(Schiller)를 지나 도스토옙스키(Dostoevskii)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예술문화사에서 연면히 이어졌고, 폼페이 유적지의 벽화로부터 조르조네(Giorgione)와 티치안(Tizian), 카라치(Carracci) 그리고 로렝(C. Lorrain)을 지나 코로(C. Corot)와 모네(C. Monet)에 이르기까지, 또 바토(A. Watteau)를 지나 피카소(P. Picasso)에 이르기까지 정신사와 이념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이루었다. 이것은 푸생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수많은 시인과 화가 그리고 철학자는 실낙원의 비애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낙원 상실감은 아마도 ‘인류사적 상수’일 것이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갈망, 혹은 그런 세상을 이루지 못한 데 따른 회한은 인간의 역사를 동반한다.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는 것은 오직 슬픔-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회한뿐일지도 모른다. (문화일보 8월 29일자 19면 6 회 참조)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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