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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Fifty+ 게재 일자 : 2017년 10월 13일(金)
쓴맛 신맛 내리다… 살맛 찾은 할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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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임(왼쪽) 할머니와 이정순 할머니가 지난달 29일 경남 통영시 욕지면 ‘욕지도 할매 바리스타’ 카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욕지도 할매 바리스타’ 카페 내부 모습.
통영 욕지도의 ‘실버 바리스타’

오래전에 한 노승이 시중을 드는 시자승과 함께 남해의 한 외딴섬에 솟은 산에 올랐다. 산 위에서 바다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던 시자승이 문득 도(道)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자 노승은 “욕지도관세존도(欲知島觀世尊島)”라고 답하며 건너편 섬을 가리켰다. 이는 “욕지도가 세존도를 바라본다”는 말이다. 조금 더 쉽게 풀면 “‘알고자 하는 의욕’(欲知)이 있으면 석가세존을 따르라”는 의미다. 통영 욕지도로 향하는 여객선에 붙어 있는 이 같은 섬 이름의 유래는 출처가 명확하진 않지만 흥미롭다. 경남 통영은 섬의 도시다. 통영이 거느린 섬은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쳐 570개다. 우리나라에서 전남 신안군(830개) 다음으로 많다. 통영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섬들이 모여 연화열도를 이루는데, 욕지도는 연화열도의 중심에 놓인 제법 큰 섬이다. ‘인디고 블루’(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파란색)에 가까운 바다의 깊은 빛깔, 그 위에 점점이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 통영항에서 욕지도로 향하는 뱃길은 32㎞로 약 한 시간에 걸쳐 이어진다. 욕지도는 뱃길에서부터 ‘알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비경으로 뭍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든다.

최근 들어 그 비경에 향기까지 더해져 ‘알고자 하는 의욕’을 품고 섬으로 건너오는 뭍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향기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섬마을에선 낯선 원두커피이고,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는 놀랍게도 할머니들이다. 남쪽의 먼 섬에 향기 좋은 원두커피를 내리며 인생의 이모작을 즐기는 ‘할매 바리스타’들이 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할매 바리스타’ 덕분에 욕지도는 통영을 찾는 뭍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여행 버킷리스트에 담는 명소가 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욕지도는 욕설과 관계없는 섬이다. 욕쟁이 할머니들이 미지근한 물에 믹스커피를 대충 타주는 섬이라고 지레짐작하면 곤란하다.

경남 통영시 욕지면 욕지도 여객선터미널에서 동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0분가량 걸어가면 욕지도의 명물 카페 ‘욕지도 할매 바리스타’를 만날 수 있다.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이뤄진 깔끔한 인테리어,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수많은 낙서. 과거 민박집으로 쓰인 2층 주택을 개조해 만든 이 카페의 내부 풍경은 소박하지만 세련미를 갖고 있다. 욕지도가 한적한 어촌이란 사실을 잊게 할 정도다. ‘욕지도 할매 바리스타’는 욕지도할매바리스타생활협동조합에 가입한 할머니 10명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카페다. 조합원의 평균연령은 70세, 그중 ‘왕언니’의 나이는 무려 82세다. 이들은 매일 2명씩 조를 이뤄 번갈아 카페로 출근해 손님을 맞는다.

조합장 이정순(67) 할머니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곱게 갈아 압축한 원두가루에 뜨거운 물을 고압으로 통과시켜 뽑아낸 커피)를 추출했다. 이 할머니는 “이 나이가 되면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소일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수많은 사람과 만나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주름진 얼굴에 연신 미소가 지어졌다.

할머니들의 화려한 변신은 지난 2013년 9월부터 6개월 동안 경상대 평생교육원 섬마을쉼터 창업과정 바리스타반을 수료하면서 시작됐다. 할머니들이 처음부터 카페를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커피를 배운 것은 아니었다. 경상대 평생교육원이 욕지도의 할머니들에게 교육 과정에 참여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할머니들은 반쯤 재미 삼아 이에 응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커피를 배우기 위해 배를 타고 섬과 뭍을 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농사일 때문에 제때 교육에 참여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할머니도 많았다. 이 같은 어려움을 파악하고 강사가 직접 욕지도로 찾아와 할머니들을 교육했다. 평생교육원은 교육과정 종료 후 할머니들에게 창업을 적극적으로 독려하며 컨설팅에 나섰다. 평생 섬에서 살며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할머니들이 카페를 개업하기까지 지역 사회의 많은 도움과 노력이 있었다. 욕지면사무소는 창업을 위한 각종 인허가 대행을 비롯해 가게 리모델링 등을 도왔다. 할머니들은 50만 원씩 출자금을 모아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드디어 2014년 2월 카페를 개업했다.

카페를 찾는 손님은 하루에 70∼80명, 성수기에는 100명 이상이 몰리는 날도 있다. 고작 인구 2000명밖에 되지 않는 섬의 작은 카페란 사실을 고려하면 대단한 숫자다. 욕지도 토박이인 할머니들은 손님에게 다양한 여행 경로도 추천해주며 홍보대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또 할머니들은 카페 수익금의 일부를 욕지도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과 독거노인을 위한 사랑의 도시락 배달사업 등에 주기적으로 전달하며 욕지도의 복지에도 힘쓰고 있다. 이정순 할머니는 “커피잔을 사는 일조차 막막했던 우리가 카페를 운영하고 남들을 도울 수 있게 된 데에는 많은 이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지금도 교육원의 컨설팅과 면사무소의 도움이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어 든든하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왕언니’ 박순임(82) 할머니의 자랑도 대단하다. 박 할머니는 “평생을 섬에서 어부의 아내로 살다가 늘그막에 처음으로 직업을 가지게 됐다”며 “이 나이에 일하며 돈을 벌 수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아메리카노 2500원, 더치커피 3000원. 카페의 메뉴는 도시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와 비교해 매우 저렴한 편이다. 교육원은 할머니들이 가장 효율적으로 맛이 좋은 커피를 만들 수 있도록 블렌딩한 원두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섬이란 지역적 특성상 생크림 등 다양한 재료를 제때 준비할 수 없어 메뉴는 단출한 편이다. 할머니들은 아이디어로 메뉴의 단출함을 극복했다. 특히 욕지도의 특산물인 고구마를 이용한 메뉴가 손님들을 사로잡고 있다. 고구마를 말려 죽을 끓여 내는 욕지도의 향토음식인 ‘빼때기죽’과 ‘고구마라떼’는 할머니들이 가장 자랑하는 메뉴다.

대구에서 욕지도를 찾았다는 바리스타 송상훈(56) 씨는 “지금까지 많은 섬을 여행해봤지만 이런 외딴 섬에서 원두커피를 마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쓴맛에 신맛이 살짝 가미된 커피인데 보디감이 상당히 훌륭해 놀랐다”고 커피를 호평했다.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이 할머니는 “똑같은 손으로 만든 커피여도 정성이 들어가면 맛이 확실히 달라진다”며 송 바리스타와 잠시 커피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잘나가는 할머니들의 요즘 가장 큰 걱정은 건강이다. 최근 할머니 두 분의 건강이 나빠져 ‘할매 바리스타’는 8명으로 줄었다. 박 할머니는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날이 올 때까지 카페에서 자리를 지키며 커피를 내리고 싶다”며 “그저 지금 건강이 조금 더 오래갈 수 있길 바랄 뿐”이라고 전했다. 또 할머니들은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커피만큼 욕지도를 아껴주길 바라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욕지도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급증해 마구잡이로 버려지는 쓰레기가 늘어 주민들이 처리에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쓰레기통이 아닌 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을 넘어 자동차에 폐가전제품 등 대형 쓰레기를 싣고 와 버리고 가는 관광객들까지 있을 정도”라며 “주민들의 노력만으로 욕지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관광객들이 욕지도를 아껴주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통영 = 글·사진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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