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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時評 게재 일자 : 2017년 10월 19일(木)
‘숙의’로 과대 포장된 脫원전 공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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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17년 10월 20일은 한국 원전의 역사에 운명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이 2박3일 합숙토론을 마치고 15일 오후 마지막 찬반 투표를 했다. 내일, 공론화위원회는 그 결과에 따른 최종 정부권고안을 발표한다.

‘숙의’ ‘경청’. 합숙소 강당 전면에 내걸린 대형 현수막을 바라보는 471명 시민참여단은 숙연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사명에 가슴 떨리는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들의 결정이 탈(脫)원전 논란을 잠재울 것인가? 하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분란이 가라앉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애초에 이같은 ‘공론적’ 의사결정 방식이 무리수였기 때문이다.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문제는 이 원전의 특성과 안전성, 우리의 원전 기술 수준과 국제시장 경쟁력, 중장기 전력 수급 전망, 다양한 전력 생산 방식의 장단점, 해외 주요국들의 사례, 우리와 환경공동체를 이루는 중국·일본 등 주변국의 원전 가동 현황,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등 수십 수백의 변수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초고난도 퍼즐이다. 찬반 양측이 제시하는 그 어떤 팩트, 자료, 연구 결과들도 편향성 내지 오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원전 가동 중단은 전기료 인상을 초래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똑같은 해외 사례에 대한 찬반 양측의 해석이 서로 다를 정도다. 급기야 시민참여단에 제공된 자료집 자체가 시비에 휘말렸다.

설상가상 숙의(熟議) 과정은 벼락치기로 진행됐다. 이 과정의 관리 주체인 공론화위원회는 7월 24일, 의사결정 주체인 시민참여단은 9월 16일 활동을 시작했다. 사안의 중요성이나 복잡성 차원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아파트 재건축 문제도 준비위 구성, 안전 진단, 정비구역 설정, 추진위 구성, 건축 심의, 인가 등 의사결정에 아무리 짧아도 4~5년이 소요된다. 10여 년을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민참여단에 주어진 한 달은 쟁점들에 대한 기초적인 팩트들을 확인하기에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기간이다.

총체적으로 안타까울 만큼 허술한 과정이었다. 2박3일의 빡빡한 일정을 마치고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시민대표들의 상태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들 중 다수가 여전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해가 아닌 인상론적 판단, 팩트가 아닌 정서적 호소에 흔들리며 표를 던졌을 것이다.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 2박3일 합숙토론을 통한 의사결정. 문재인 정부는 왜 이렇듯 어설프고 무리한 방식으로 탈원전 문제를 결정하려 한 것일까? 확증은 없지만 심증은 간다. 탈원전은 애초에 팩트가 아닌 정치적 가치의 문제였다. 지지율 고공행진 상황에서 손쉽게 그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미 29% 공정이 진전된 원전공사를 중단시키고 공론화위원회라는 들러리 기구를 급조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등 외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고, 공론화위원회가 기대와 달리 나름 중심을 잡았다. 최근까지 드러난 시민참여단의 분위기는 찬반 백중세(伯仲勢)다. 이는 정부·여당이 예상하지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원전 공사 재개 의견이 높게 나오는 낭패스러운 결과에 대비하듯, 청와대는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이 ‘탈원전’이 아닌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결정이라며 미리 선을 그었다.

문제는, 이처럼 명백한 정치적 의도가, 합리적 식견에 기초한 의사결정(informed decision)을 의미하는 ‘숙의’로 포장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네 차례의 진보·보수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법적 절차를 거치며 진행돼온 신고리 5·6호기 공사 관련 각종 심의·평가·의견수렴 절차는 무엇이었나? 10월 16일부터 일주일 간 경주에서 개최중인, 새 정부가 눈길조차 주지 않는 세계원전사업자협회(WANO) 총회는 또 무엇인가? 전문성도 대표성도 없는 일반시민들이 검증 안 된 자료들과 주장들을 토대로 초단기간에 초인적 학습능력과 지혜를 발휘해야하는 의사결정, 그것이 숙의인가?

1년 전 가을과 겨울, 광화문 일대를 가득 채운 촛불의 힘은 위대했다. 그렇게 타올랐던 촛불은 그 역할을 다하고 제도권 정치에 권한을 넘겼다. 하지만 그 정치는 ‘숙의’란 명분으로 자신의 목적에 시민을 호출했다. 그 결과가 부디 판도라의 상자가 되지 않길 간절히 희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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