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fty+ >야구로 하는 건 뭐든지… 재능기부도 ‘홈런 행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50대 중반 이후 세상과 더 보람찬 삶을 엮어가고 있는 이만수 전 프로야구 SK와이번스 감독이 지난 11일 특유의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라오스서 ‘인생 2막’ 이만수 前 감독

이만수(59) 전 프로야구 SK와이번스 감독은 현역 때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선수와 지도자 경력을 합해 47년을 현역으로 활약한 그는 국내 야구인 중 한 손에 꼽히는 화려한 성공신화를 썼고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도 50대 중반에 ‘감독 퇴임’이라는 인생의 변곡점을 만났다. 이 전 감독은 “현역 때 1년의 절반은 집에 못 들어갔는데, 퇴임 후 지난 3년간은 3분의 2를 못 들어갔다”고 할 정도로 ‘50+’의 삶을 열어가고 있다. ‘열어간다’는 건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 프로야구 1호 안타·타점·홈런·타격 3관왕 등 각종 ‘최초’ 기록을 보유한 그는 “야구인 출신이 재능기부로 어디까지 기록을 낼 수 있는지”의 1호 역사를 쓰고 있다.

지난 11일 문화일보에서 만난 이 전 감독은 현역시절 포수 미트를 끼었던 투박한 손에 묵직한 손가방을 들고 있었다. “저를 필요로 하고, 후원을 해줄 수 있는 분들께 언제, 어디든 달려간다”는 마음가짐이 그대로 묻어난다.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라오스야구협회 부회장, 라오 J브라더스 구단주, 세움국제야구학교(SIBS) 명예교장, 한국야구위원회(KBO) 육성부위원장 등 다양한 직함이 분주한 삶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현역 이후’의 삶에 대해 나름 준비해왔다고 했다. 과거 뼈아픈 계기가 있었다. “선수생활이 영원할 줄 알았어요. 내내 몸담았던 삼성 구단에서 은퇴하라고 했을 때 충격은 말도 못했어요. 세상이 끝난 것처럼 방황했어요.” 그런 경험을 한 뒤, 그는 미국 메이저리그 코치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또 국내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늘 ‘현역 이후의 삶’을 고민했다. 다시 방황은 싫었다. 그는 휴대전화에서 생각날 때마다 적어놓은 ‘이만수 버킷리스트’(사진)를 열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민간외교관, 포수학교, 라오스 봉사활동, 야구 해설, 재능기부, 야구 아카데미, 자서전 집필 등 ‘야구를 갖고 할 수 있는 29가지’가 빼곡히 적혀 있다. 그 수는 자꾸 늘어나고 있다.

그의 ‘인생 2막’은 라오스에서 시작됐다. 2014년 11월 SK와이번스 감독에서 물러난 뒤 같이 고생한 가족을 위해 동유럽 여행의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아내에게 계획을 밝혔는데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당신은 명색이 지도자인데, 팬들에게 감독이 끝나면 라오스에서 야구 재능기부를 한다고 했던 약속을 잊었느냐. 가족여행이야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약속을 먼저 지켜라”는 거였다. 그는 화들짝 놀랐다. 라오스에서 사업을 하는 지인이 현지 청소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데 용품을 지원해 달라고 해 수차례 보내주었지만, 바쁜 감독생활을 하면서 잊다시피 했다. 가족여행은 취소하고, 감독 퇴임 일주일 만에 라오스에 갔다. “가보니 우리나라 1960년대 생활 수준에, 놀랍게도 사회주의 국가였고, 더구나 ‘야구 불모지’였어요.”

처음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야구의 씨앗을 뿌려보자는 일념으로 선수를 모집해 체력 테스트를 통해 선발했다. 이런 와중에 만들어진 팀이 ‘라오 J브라더스’이다. 사실상 라오스의 대표팀이다. 제대로 못 먹는 선수들의 숙식부터 해결해야 했고, 당장 지도자 파견이 시급했다. “재능기부도 외부의 지원 없이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지원을 확보하는 게 제가 할 급선무였어요.”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평생 거절을 당해본 적이 없는데, 현역을 떠나 재능기부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게 ‘거절의 아픔’입니다. 저의 계획을 ‘일회성’이나 ‘언론플레이’ 정도로 보더군요.”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것 같던 팬들은 이제 없었다. 그때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찾아가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구든, 어디든 찾아가 재능기부를 했다. 한국과 라오스를 막론하고 정치인, 공무원, 기업인 등을 만났다. 이 전 감독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때 생긴 습관이다. 감독 퇴임 직후 아내가 승용차를 장만해줬는데, 2년 반 만에 10만㎞ 이상을 탔다. 아내는 “다녀라. 당신이 선구자가 돼 운동선수도 할 수 있다는 걸 세상 사람에게 알려라”라고 힘을 실어줬다.

6개월 정도 지나자 적은 물품이라도 지원해주거나 1만 원씩의 후원을 약속하는 ‘개미군단’이 나타나며 그의 진정성이 통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우리 외교부가 라오스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친선야구대회 개최와 용품을 지원했고, 대한야구협회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지도자 2명을 파견할 수 있게 됐다. 라오 J브라더스팀은 아시아 5개국 아마추어팀들이 참가하는 ‘한국-라오스 국제야구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지난 7월 라오스 야구협회가 창립돼 이 전 감독을 부회장으로 영입했다.

그는 라오스에서 야구의 선구자가 됐다. 돌아보면 한국 야구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1904년 YMCA에서 야구를 보급하며 시작됐다. 이 전 감독은 “질레트 선교사는 나중에 한국야구가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프로야구가 최고 인기를 누릴지 몰랐겠죠? 그분 덕에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라오스에서 벌써 선수층도 두꺼워지고 팀도 여럿 늘었고, 국립대에서 야구부 창설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오고 있어요. 20∼30년 후에 라오스 야구가 국민에게 큰 기쁨을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세상에 없을 수 있겠지만요.”

그런데 잠시 브레이크가 걸렸다. 지난해 10월 야구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라오스 총리 훈장을 받은 이 전 감독은 그 자리에서 라오스에 없는 야구장 건립을 부탁했다. 라오스 정부는 부지를 무상 제공하되 건축 비용은 한국 측에서 마련해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사실상 이 전 감독이 뛰어다녀야 했다. ‘스토리펀딩’을 통해 3000만 원의 귀한 돈을 모았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 봤지만 구장 4개 면을 지을 15억 원 모금은 쉽지 않았다. 결국 우리 정부의 해외 원조사업에 기대를 걸고 라오스 3개 부처 장관의 요청서를 받아 우리 정부 부처에 전달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외교부는 취지에 공감해 절차를 진행했으나, 마지막 기획재정부의 심의에서 밀리고 말았다. “아시아 야구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은 외무성과 자이카(JAICA) 등의 재정지원과 일본프로야구의 역대 ‘레전드’급 선수들을 앞세워 구장을 지어주고 지도자를 파견하며 동남아시아에 일본 야구를 심고 있습니다. 그들이 라오스 한 군데만 이만수 때문에 아직 손을 못 대고 있답니다. 국가 간 신뢰도 있는 만큼 꼭 정부지원이 성사됐으면 합니다.”

이 전 감독의 재능기부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4월 재능기부를 위해 헐크파운데이션 재단을 창립했다. 광고 출연료 2억 원 전액을 국내외 유소년 야구 지원을 위해 기부했고, 올해에는 역시 광고수입을 통해 매월 유소년 야구클럽이나 대안학교 등에 대당 1000만 원 상당의 피칭머신을 전달해오고 있다. 그는 “재능기부를 해보니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을 먼저, 전부 내놓는 일이더라”고 나름의 재능기부 철학을 말한다.

그는 전국의 초·중·고, 사회인 야구팀을 찾아가 훈련을 지도하는 재능기부를 연 40여 군데씩 이어오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민 자녀를 위한 재능기부도 했고, 호주와 일본에도 갈 예정이다. 지난달에는 소년원생들을 대상으로 야구 교실과 특강 등 재능기부를 펼친 공로로 전 롯데자이언츠 선수인 박정태와 함께 법무부 감사패를 받았다. 다음 달에는 그가 명예교장으로 있는 야구 대안 중학교 SIBS가 내년도 1학년 학생을 처음 모집한다.

야구인 이만수의 재능기부 행진이 어떤 인생 2막의 첫 역사를 써갈지 자못 기대된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