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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이현종 논설위원 게재 일자 : 2017년 10월 25일(水)
‘숙의’는 대의민주주의 대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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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공론화위원회가 또 하나의 민주주의를 보여줬다”(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과정이 더 훌륭했다”(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성숙한 모델”(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3개월간의 공론 과정을 거쳐 ‘공사 재개’를 결정하자 청와대와 여당의 핵심 관계자들이 찬사를 쏟아냈다. 대선 공약(公約)을 시민참여단이 거부한 것인 만큼 상식적으로는 유감이나 사과를 하는 것이 이치인데 되레 칭찬하고 나서니 어색하다. 공사 중단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만약 중단할 경우 2조 원 이상의 천문학적인 배상금 등으로 내심 공사 재개를 바랐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공론화위의 성격이나 구성을 둘러싼 비판은 있지만, 이번 과정과 결정은 사실상 ‘무능한 국회와 무책임한 정부’에 대한 경고다. 국가 100년 대계(大計)인 에너지 정책을 좌우할 중요한 정책 결정을 자신들이 내리지 않고 아무런 책임이 없는 시민 참여단에 떠넘겨 버린 행태이기 때문이다. 만약 국회가 정상적으로 제 기능을 하고 있다면 이런 공론화위 자체가 필요 없다. 그래서 공론화위에 대한 찬사는 자신들의 잘못은 모르는,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마찬가지다. 야당도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국가적 대사를 놓고 89일 동안 진지하게 토론에 임했던 모습을 허투루 봐서는 안 된다. 서로 삿대질하고 막말이나 할 줄 알았지 언제 국회가 국정 현안을 놓고 이렇게 진지한 토론과 결정을 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이런 ‘숙의(熟議)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못 하는 대의(代議)민주주의의 밥그릇을 빼앗고 있는데도 국회는 아무 관심이 없다.

이번 공론조사는 국가의 현안 사업에 대해 시민참여단이 결정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출발이었다. 영국이 1995년 유럽연합(EU) 가입을 앞두고 공론조사를 했고, 호주는 1999년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전환하는 국민투표를 앞두고 공론조사를 해 결정에 참고한 것에 비춰봐도 이번 사안과는 경중이 크게 다르다. 특히, 대부분의 공론조사는 정책 결정을 위한 참고 사항으로 이용될 뿐인데도 공론조사 자체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런 구조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론화위의 과정을 놓고 보면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공론화위가 시작할 때만 해도 1차 여론조사 결과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는 36.6%, 중단 27.6%, 유보 35.8%였다. 그러나 토론과 학습 과정을 거치면서 시민참여단의 최종 4차 조사 결과 건설 재개는 59.5%, 중단은 40.5%로 결론 났다. 특히, 20대의 경우 건설 재개 의견이 1차 조사 때 17.9%에 불과했지만 4차 조사에선 53.1%로 상승한 것이 눈에 띈다. 시민의 영역에선 정확한 정보만 주어진다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선택 권한은 행사하되 책임은 지지 않기 때문이다. 포퓰리즘과 ‘정서’에 휘둘릴 위험성도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정치적·법적 책임을 가진 국회가 이런 ‘숙의’를 할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지난 8월 국회가 갤럽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78.7%)이 ‘국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로 ‘상대방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39.7%)’가 가장 높았다. 이런 주제가 국회에서 논의된다면 합의에 이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당만 해도 문재인 대통령이 탈원전 정책을 지속하겠다고 고집하는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야당은 집안싸움에다 합당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다.

국회가 스스로 공론을 형성하지 못하고 숙의가 없다면 정권의 ‘국회 패싱’은 더 노골화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번 공론화위에 재미를 본 문 대통령은 앞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문제를 공론화 방식으로 돌파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내년 6월 실시하기로 한 헌법 개정 국민투표 문제도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이유로 공론화 방식으로 여론을 주도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대의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하지만 직접·숙의 민주주의가 이를 대체할 순 없다. 여권 일각에서 촛불 집회를 예로 들어 ‘직접민주주의 실현’ 운운하지만 현실적이지도 않고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대의제를 더 잘되도록 하는 보완제일 뿐이다. 관건은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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