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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17년 11월 03일(金)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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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화가, 서울대 교수

최고의 문화예술후원자상 받은
가나아트 서울옥션 이호재 회장
작가들 지원하면서도 간섭은 안 해

스물아홉 살에 처음 화랑 열 때부터
이익 돌려주고 후원하겠다 결심
소리 소문 없이 약속 지켜낸 사람


지난 9월에 정중한 문구의 초대장 하나를 받았다. 제26회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賞)의 수상식에 꼭 참여해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상이 있었나 하고 보니 그 상을 가나아트 서울옥션의 이호재 회장이 받게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몽블랑이라면 유서 깊은 만년필 회사의 이름이라는 것 정도밖에 모르고 있던 나는 그 이름을 단 상이 문화예술가를 후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초대장과 함께 동봉해 온 책자를 보니, 첫 장에 페기 구겐하임의 이름이 나왔다. 그녀는 칸딘스키나 잭슨 폴락, 에른스트 등 20세기 미술의 거장들을 후원했대서 미술사에 그 이름이 나오는 저명한 컬렉터이자 전시자였다. 이제는 신화가 된 세계적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이름도 보였다. 바로 이렇게 30년 가까운 세월을 이 상은 예술가를 길러낸 후원자를 찾아내어 그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렸던 것이다.

예술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다. 그 외롭고 힘든 길을 이해할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 후원하며 응원해 주는 동행자를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예술가에게는 축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미 백여 년 전부터 필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던 ‘몽블랑’이라는 회사는, 바로 그 빛나는 예술 세계를 이룬 주인공들의 뒤에서 빛도 이름도 없이 헌신해온 후원자를 찾아내어 상을 주어 왔던 것이다.

그런 상의 올해 수상자가 가나아트 서울옥션의 이호재 회장이라는 알림 글을 보면서 드는 첫 생각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구나’였다. 더불어 그와 함께 알게 모르게 쌓아왔던 내 개인의 이런저런 인연들이 떠올랐다. 나는 늘 그에게 빚을 졌다는 느낌을 갖곤 했는데, 내 마음의 빚을 몽블랑 상이 대신 일부나마 갚아 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상식장에 도착하니 그간의 후원자로서의 그의 이력이 영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어떤 화가는 미대를 졸업하고 참으로 막막하던 시절에 그의 권유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유학 내내 생활비며 학비를 지원받아 작가 생활을 할 수 있었노라고 고백했고, 한 민중계열 미술가는 그가 수십 년간을 지원해주면서 단 한 번도 간섭한 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주로 화가들은 그의 일관되고 줄기찬 후원 행보들에 얽힌 개인적 에피소드들을 언급했다.

벌써 24, 25년 전 이야기다. 하루는 그가 내게 파리에서 큰 전시를 한번 해보자며 도면을 건네주었다. 눈대중만으로도 거의 운동장만 하게 느껴질 만큼의 전시장이어서, 돌아와 500호, 1000호가 넘는 대작들로 작품을 골랐고 원목으로 액자까지 주문했다. 작품을 먼저 보내고 아내와 비행기를 탔는데, 그가 보내준 티켓을 찾아 앉고 보니 비즈니스석이었다. 생전 처음 앉아본 좌석에서 아내는 화가를 따라 살며 처음 누려본 호사라며 좋아했다. 개관을 성황리에 마치고 숙소를 찾아가니 역시 정상급의 고급 호텔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내는 문득 불안한 얼굴로 이래도 되는 거냐고 했고, 나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워낙 대작들이어서 작품은 판매되지 못한 채 현지 신문들의 호평으로 만족한 채 돌아왔는데, 얼마 후 화랑에서 담당 직원을 만났더니 선생님 작품이 대단했다는 것이었다. 칭찬인가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게가 엄청나서 운송 비용이 대단했다는 것이었다.

역시 30년이 다 된 옛날 이야기이다. 작업실을 마련하는 데 돈이 부족했다. 전후좌우를 둘러보아도 마련할 곳이 아득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를 만나러 화랑으로 갔다. 당시에는 부장 직함을 달고 있던, 현재의 갤러리 아트사이드 사장인 이동재 씨에게 사정 얘기를 했다. 천만 원쯤의 돈을 좀 융통할 수 없겠는가 하고. 그랬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사장실로 들어가더니 한참 만에 나와서 말했다.

“형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보나 마나 이어질 다음 말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요새 화랑 경기가 어려운 데다, 지난번 선생님 파리 개인전에 너무 경비가 많이 지출돼…” 같은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꺼낸 것이 발등을 찧고 싶게 후회스러웠다. 그런데 귀를 의심할 말이 들려왔다.

“형님께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그런 부탁 자주 하는 분도 아니고, 이천만 원을 해드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써는 큰돈이었다. 그 시절 이 회장은 몇몇 작가를 부부 초청으로 여름이면 제주신라호텔로 불러 2박 3일씩 투숙시키곤 했다. 처음 가던 해 우리 부부는 숙소만 제공하고 밥은 개인이 사 먹는 것인 줄 알고 싼 메뉴를 고르곤 했는데, 떠나는 날 로비에서 만난 이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묵은 방이 경비가 제일 조금 나왔다며, 어떻게 며칠 동안 맥주 한 캔도 안 마셨냐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식비며 주류까지 화랑에서 대납했던 것이다.

얼마 전 서재를 정리하는데,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이 회장이 원로 화가인 김병기 선생과 우리 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사진이었다. 신세를 지고 너무 미안하다며 아내가 손수 저녁상을 마련하여 이 회장을 초청한 자리에 김 선생께서도 동석하셨던 것이다. 올 초 작가인 아내가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문득 파리 가는 비행기며 제주의 고급 호텔에서 “화가를 따라 살며 누려보는 호사”라며 그렇게도 좋아하던 아내의 기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상식장에서 이 회장은 스물아홉 나이로 처음 화랑을 열 때부터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고 했다. 미술품으로 얻은 이익을 작가들에게 되돌려주고 아울러 젊은 작가들을 후원하겠다는 결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소리 소문 없이 그 약속을 지켜낸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몽블랑이라는 이름의 문화예술후원자상은 그 이름에 걸맞은 주인공을 찾아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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