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기사 상세 찾기 | 2017.11.23 목요일
전광판
Hot Click
문화일반
[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7년 11월 10일(金)
아아, 투명한 님의 노래… 고적한 암자를 휩싸고 돕니다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의 부속 암자인 오세암의 동자전. 오세암은 ‘님의 침묵’의 집필 장소로 알려져 있다. 오세암 동자전 뒤편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관음봉과 동자봉이다.

(99) 한용운 ‘님의 침묵’ 산실 백담사 오세암

1905년 출가한 곳… 마음의 고향
‘조선불교유신론’등 명저 집필

‘님의 침묵’은 88편의 연작시
‘님’주제로 완벽한 전체 이뤄
슬픔·고통에 시달리는 현대인
영혼의 등불 밝혀주는 작품

올곧게 쭉쭉 뻗은 전나무 길
이 산길 오가며 독립 꿈꾸고
詩心 가다듬었을 만해 그려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1925년 이른 봄 돌연 바랑을 꾸려 백담사(百潭寺)로 향한다. 백담사와의 인연은 깊다. 1897년 열아홉 살의 한용운이 의병의 실패로 고향인 충남 홍성을 떠나 처음 몸을 피했던 곳이고,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1905년 1월 26일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그리고 ‘님의 침묵(沈默)’ 등과 같은 명저들의 산실이니, 백담사와 오세암(五歲庵)은 만해 정신의 고향과 다름없다.

백담사는 647년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慈藏) 율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한계사(寒溪寺)라고 불렸다. 그 후 여러 차례 큰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고, 조선 정조 때 지금 위치에 사찰을 중건하면서, 화마(火魔)를 막고자 ‘백 개의 못 혹은 물 항아리’를 일컫는 그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이곳까지 물웅덩이가 100여 개가 있어 그리 불렀다는 전설도 있다.

백담사는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쳐지는 백담계곡 위쪽 작은 분지에 자리 잡은 탓에 예전에는 승려 이외의 사람들이 좀처럼 찾아가기 힘든 외진 선원(禪院)이었다. 그 이름값에 비해 누구나 쉽게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한 ‘전직 대통령’이 두 해 남짓 여기서 은둔 생활을 한 덕분에 이 고찰(古刹)의 이름이 비로소 속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만해(萬海)가 머물렀던 천년 사찰에 어찌 감히 일해(日海) 따위가 올 수 있느냐”는 불교계 안팎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눈을 피해 잠적하기에, 또 ‘제 발로 유배를 청하며’ 도피하기에 외진 이곳이 아주 적당했다. 대웅전 앞마당, 가운데 세워진 삼층석탑 양옆으로 작은 요사(寮舍) 두 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중에 화엄실의 편액(扁額) 아래, 이제는 그 이름조차 언급하기 부끄럽다는 듯, 그저 ‘제12대 대통령’이 머물렀던 장소임을 알리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나마 크기가 매번 작아지니 다행이다.

백담사에는 사찰의 기존 건물 외에 한용운의 불교 사상과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여러 건물이 있다.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있는 만해의 흉상과 ‘나룻배와 행인(幸人)’ 시비를 바로 만날 수 있다. 그 너머에는 만해당이 있고 ‘만해기념관’은 바로 뒤에 있다. 유물들과 전시물은 소박하지만, 이곳이 사찰이니 당연히 승려로서의 만해 행장(行狀)에 관한 정보를 상세하게 고증하고 있다.

‘님의 침묵’의 집필 장소가 어느 곳이냐 하는 문제는 오세암이 종사(宗寺)인 백담사의 여러 부속 암자 중 하나이니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조선불교유신론’의 경우는 ‘백담사’라고 집필 장소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님의 침묵’은 그저 ‘산사’임을 암시할 뿐이다. 다만, 같은 해 6월 7일에 ‘십현담주해’를 오세암에서(‘於五歲庵’) 탈고했으니, 그 시기에 있어 두어 달 남짓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는 ‘님의 침묵’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추정할 수 있고, 무엇보다 관련 자료가 많이 필요한 불교 저작이 아닌 시집의 경우라면 ‘고적한 암자’가 보다 더 적합했으리라. “구름과 물이 있으니 이웃이 넉넉하고…/ 저자 멀어 약 대신 솔잎차를 달이고/ 산이 깊어 고기와 새, 사람 보기 드물다/ 아무 일 없음이 고요함이 아니요/ 첫 마음 고치지 않음이 바로 새로움이다.”(‘오세암’)

백담사에서 영시암(永矢庵)을 거쳐 오세암까지는 대략 십오 리 거리이다. 영시암까지는 수렴동 계곡을 따라가니 비교적 수월한 편이지만, 그 이후에는 산세가 제법 가파르고 경사가 심하다. 좁은 산길이지만 다니기 좋게 잘 정비한 덕분에 천천히 걸어도 한나절이면 족하다. 한창 절정인 단풍철을 맞아 붐비는 등산객들과 불쑥불쑥 나타나 두려움 없이 되려 사람 구경을 하는 다람쥐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자주 걸음을 멈추고 온갖 해찰을 부리게 된다. 웬일인지 곱게 물든 단풍보다는 올곧은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풍도 한 해를 오롯이 기다려야 만나는 것이겠지만, 조만간 저 화려하게 물든 잎들이 죄다 떨어져도 홀로 푸르를 전나무가 기개(氣槪) 높던 시인의 큰 뜻을 기리며 그 흔적을 찾아가는 길에는 더 어울릴 성싶다. 만해도 이 산길을 오가며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고, ‘님’을 그리며 시심(詩心)을 가다듬었으리라.

오세암은 ‘관세음보살이 늘 머무는 암자’라는 의미로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렸으나, 1643년(인조 21년) 설정(雪淨) 대사가 중건한 이후, 저 유명한 ‘다섯 살배기 동자승’의 전설에 따라 그 이름을 새로 얻었다. 동자전(童子殿)이란 별도의 전각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범종각에서 올려다보면, 짙푸른 가을 하늘 아래 웅장한 공룡능선의 기암괴석들을 등지고 천진관음보전(天眞觀音寶殿)과 동자전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를 둘러싼 작은 요사채도 여럿이다. 한편에서는 이곳을 찾아 머물고자 하는 불자들을 위한 새로운 객사의 공사가 한창이다. 오세암은 깊은 산중 도량이지만 마등령 고개 아래에 있어 예로부터 사람들의 왕래도 잦고 외설악의 여러 지역과 멀리 금강산으로 넘어갈 때 잠시 머무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남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깨쳐야 한다는 진리에 따라 오세암에서 용맹정진하던 한용운은 1917년 12월 3일 오후 10시쯤 좌선 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무슨 물건인가를 떨구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는 마음이 씻은 듯 풀렸고’ 문득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때의 심정을 읊은 것이 바로 이 ‘오도송(悟道頌)’이다. “남아(男兒)가 간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그 몇이나 객수(客愁) 속에 오래 있었나/ 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三千世界) 깨뜨리니/ 눈(雪) 속에 복사꽃이 조각조각 붉었구나.” 이 심오한 깨우침을 ‘감히’ 조금이나마 풀어보자면, 오랜 나그네의 시름 속에 갇혀 있다가 이를 문득 벗어남으로써 가는 곳마다 모두 고향임을 깨달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진리는 덧없는 피안의 세계가 아닌 눈보라 몰아치는 모진 현실 속에서 붉은 꽃과도 같은 굳은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는 뜻이리라.

한용운은 이후 사문 대중이 모인 법회에 나아가 “속박은 누가 얽매었으며 해탈(解脫)을 스스로 털어버릴 도리를 아느냐! 모르느냐! 삼천대천세계가 쾌활쾌활(快活)이다”라고 일갈하였고, 이를 듣고 있던 만화(萬化) 법사가 벌떡 일어나 “한 입으로 온 바닷물을 다 마셔 버렸구나(一口汲盡萬海水)”라고 화답하며, 그 깨달음을 인증하고 가사와 발우를 전했다고 한다. 만해(萬海)라는 아호가 전해진 유래이다.

시집 ‘님의 침묵’은 서문 격인 ‘군말’과 후기에 해당하는 ‘독자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님의 침묵’에서부터 마지막 ‘사랑의 끝판’까지 88편의 시가 ‘님과 나의 이별과 만남’이라는 일관된 주제와 내용으로 긴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전체를 하나의 연작시라고 볼 수 있다. 서시에 해당하는 ‘님의 침묵’은 특히 ‘이별에서 만남으로 이어지는’ 시집 전체의 구조를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라는 구절에는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재회를 위한 새로운 희망의 원천으로 삼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듯이 헤어지면 다시 만나리라는 역설적 표현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님의 침묵’은 “젊은이에게는 사랑의 노래로, 종교인에게는 구원의 언어로,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해방의 염원을 주고받는 암호로 읽힐 수 있다”는 정의는 아주 적절하다. 그런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님’이라는 주제로 그 모든 것을 포괄하여 하나의 완벽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가치가 크다. 이 시집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은 만해의 시대와는 다른 현실에서, 그가 겪었던 것과는 그 결이야 사뭇 다르겠지만, ‘님’을 잃고 또 다른 슬픔과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의지를 갖게 해준다. 오늘날 우리가 ‘님의 침묵’을 다시 읽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만해가 예서 ‘님의 침묵’을 탈고한 날짜가 ‘을축(乙丑) 팔월 이십구일 밤 끝’이고, 이를 음력으로 본다면 양력 ‘1925년 10월 16일’이니, 대략 이즈음에 해당한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독자에게’). 산속 암자에서의 호젓한 밤과 산 그림자 엷어가는 ‘밤 끝’의 어스름을 끝내 ‘티끌’만큼도 맛보지 못한 채, 또다시 ‘헛된’ 일정에 쫓겨 산에서 내려오며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는 어리석은 집착에 스스로 부끄럽다. ‘님에게 다가가는 길’에서 멀리 떨어진 채, 어쩌면 ‘님’마저 오랫동안 잊은 채, ‘그저’ 살아간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산은 쓸쓸하고 해도 또한 저무는데/ 아득하여라, 누구와 함께하리.”(‘홀로 읊다’) 산에서 내려갈 때는 오를 때보다 힘이야 덜 들겠지만,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다음 이맘때를 다시금 기약하지만, 마음 깊이 숨긴 아쉬움은 좀처럼 쉬이 가시지 않을 성싶다.

글·사진 = 박광수

불문학자·문화평론가
[ 관련기사 ]
▶ 만해 한용운은… 詩로 독립 외친 민족시인, 불교 통한 청년운동…
[ 많이 본 기사 ]
▶ 10년 사귀다 헤어진 중년 남녀 모두 숨진 채 발견
▶ 사드 레이더 중국방향 ‘차단벽’ 설치하라는 中
▶ 이국종 “몸부림쳐 수술해도…난 10억 적자 원흉이었다”
▶ 한화 내야수, 일본 마무리 캠프 중 성추행 혐의로 체포
▶ “아파트 문이 안열려요” 수험생이 119에 ‘SOS’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 : m.munhwa.com ]
[AD]
topnew_title
topnews_photo 아주대 교수회지에 심평원 수술비 삭감에 대한 비참한 심경 토로“일을 할수록 손해 불러오는 조직원…무고했으나 죄인이었다” “환자마다..
mark한화 내야수, 일본 마무리 캠프 중 성추행 혐의로 체포..
mark“아파트 문이 안열려요” 수험생이 119에 ‘SOS’
“휴∼ 다행이다”…수능날 큰 지진 없었다
[속보]檢, ‘국정원 1억 뇌물 의혹’ 최경환 28일..
사드 레이더 중국방향 ‘차단벽’ 설치하라는 中
line
special news ‘소녀시대’ 서현 10년 몸담은 둥지 떠나 홀로..
“홀로서기 배경? 양손 쥔 것 모두 놓았을 때의 내가 궁금했죠” 10년 몸담은 둥지를 떠나 홀로..

line
해수부 “세월호 유골 은폐, 수습본부장·부본부..
10년 사귀다 헤어진 중년 남녀 모두 숨진 채 발..
한국당, 내년 초 ‘保守대통합회의’ 발족… 洪대..
photo_news
입실 촉박한데 태워다준 아버지께 큰절 올린 수험생
photo_news
‘딸바보’ 오바마 어쩌나…말리아 남자친구 생겼다
line
[연재소설 徐遊記]
mark(1253) 61장 서유기 - 6
illust
[인터넷 유머]
mark인공지능 로봇
mark음주에 관한 법률
topnew_title
number 길가던 여성에 손도끼 던져…혈중알코올농..
“北, 귀순사건 후 JSA 경비병력 모두 교체…..
잇단 과로사·자살… 회사가 칼퇴근 ‘강요’
‘合法 존엄사’ 한 달만에 3~4건… ‘선택’ 더 ..
원전 불안감에… 2000억 들인 담수화시설 ‘3..
hot_photo
김도연·여름·다영, 수능 고사장으..
hot_photo
방탄소년단 ‘호르몬전쟁’ 뮤비도..
hot_photo
민서 “‘좋아’ 1위 실감안나…이별..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사업안내 | 이용안내 | 구독안내 | 독자참여 | 회원서비스 | 고충처리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최중홍) | Site Map
제호 : 문화일보 | 주소 : 서울시 중구 새문안로 22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01697 | 등록일자 : 2011년 7월 15일 | 발행·편집인 : 이병규 | 발행연월일 : 1997년 1월 1일
Copyright ⓒ 문화일보. All Rights Reserved. ☎ 02) 3701-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