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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17년 11월 10일(金)
숨은 일꾼 ‘뒷광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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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조명받는 연출·배우는 ‘앞광대’
궂은일 맡은 프로듀서는 ‘뒷광대’

그들은 티 안 나게 일하는 엄마처럼
오로지 작품의 성공만을 위해 최선

숨은 일꾼이 많아야 살맛 나는 세상
이들을 귀하게 대접하는 사회 돼야


며칠 전 내 귀빠진 날이었다. 국립창극단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맛있는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했고, 나는 내가 담근 갖가지 술을 싸 들고 가서 파티를 열었다. 자식이나 손주뻘 되는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생일잔치는 어떤 잔치보다도 나를 들뜨게 했다. 밖에서 가지고 온 술은 마실 수 없다는 종업원에게 합법적인 방법으로 허락을 받고 예쁜 잔까지 얻어냈다. 오미자주, 복분자주, 매실주, 모과주를 앞에 두고 마치 와인을 평가하는 소믈리에처럼 조금씩 따라서 맛있게 음미하고 다시 물로 입을 씻은 후 종류별로 맛을 보며 평가를 늘어놓는 젊은이들이 참 예뻤다.

술맛을 잘 안다며 전문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그 이면에는 술을 담근 주인에 대한 배려의 추임새가 녹아 있기에 “코냑보다 낫다” “음∼ 최고네”라며 칭찬을 쏟아내는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얼굴이 발개지고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커질 무렵, 작고 예쁜 보라색 케이크를 내놓더니 “감독님, 초는 하나만 꽂을게요∼^^” 한다. 초를 꽂을 자리도 없을 만큼 많은 내 나이를 잊게 만드는 또 다른 배려 속에 내 마음은 뭉클하게 젖어들었다.

이 예쁜 사람들은 국립 창극단의 프로듀서들이다. 창극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우리나라에서 100년의 역사를 가진 창극을 만들기 위해 청춘을 바치는 ‘뒷광대’들이다. 앞으로 드러나는 작가, 연출, 배우 등 ‘앞광대’들은 그나마 관객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뒷광대’들은 그저 좋은 작품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객석에 관객이 꽉 차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숨은 일꾼들이다.

내 삶에서 숨어 있는 일꾼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창극단 예술감독을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평생 무대에서 박수받으며 화려한 조명만 받던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에 모든 작품이 잉태되고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희생적인 헌신으로 배우들이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체험했다.

창극은 판소리에서 파생된 음악극이다. 새로운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판소리와 극의 결합이다. 주로 판소리 다섯 바탕(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귀명창들의 사랑을 받으며 면면히 이어져 왔다.

나는 창극단 예술감독직을 맡게 되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창극이 몇몇 마니아층에 의존하는 형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젊은 소리꾼들을 충원했고 레퍼토리의 다양화를 시도하며 전통의 현대화를 통해 새로운 관객들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첫 작품 ‘장화홍련’부터 관객이 몰리며 돌풍을 일으켰고, 계속해서 올리는 작품마다 주목을 받으며 공연예술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던 관객들뿐만 아니라 오페라 관객까지도 창극을 보러 오는 믿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창극 최초로 프랑스 파리에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가 제값 받고 진출했고, ‘트로이의 여인들’은 싱가포르 세계축제에 이어 내년에는 영국의 브라이턴과 런던 공연이 결정되었으며, 몇 개의 유럽 공연이 예정되어 바야흐로 창극이 세계 무대에 진출하게 됐다. 이런 성과들의 중심에 우리 피디들의 열정과 노고가 녹아 있다.

먼저, 제작비 규모에 맞는 예산 짜기를 시작으로 제작 스태프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히 메모하고, 효율적인 무대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제작회의를 한다. 홍보계획을 짜고, 홍보영상을 찍고, 홍보물을 제작하고, 보도자료를 쓰고, 공연 정보를 올린다. 마케팅 작업이 시작되면 관객을 확보하기 위한 광고를 제작하고, 작품에 따른 관객층을 분석해서 시장이든 상가든 홍보 전단을 들고 직접 배포하기도 한다. 연습 진행을 관장하며 연습 중에 수시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작품 방향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관객 입장에서 작품을 품평한다.

공연이 임박하면 프로그램을 만들고 프레스 콜을 통해 작품을 언론에 소개한다. 작품이 끝난 후에는 예산 결산에 이어 작품 평가에 따른 분석, 그리고 공연의 모든 것을 상세히 모은 공연백서를 출간하고 곧바로 다음 작품 준비에 들어간다. 마치 집에서 티가 안 나게 모든 일을 해내는 엄마처럼 쉼 없이 일을 한다. 때로는 밤 12시가 넘도록 퇴근도 못 하고 일을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힘들 때는 남몰래 울기도 한다. 이렇게 한 작품 올릴 때마다 기진맥진해 있다가도 막이 올라 관객이 객석을 꽉 채우고 작품 좋다는 평을 들으면 마치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 날뛴다. 내가 6년간 지켜본 피디들의 모습이다.

내가 하는 작업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한마음으로 나를 도왔던 젊은이들, 창극이라는 낯선 장르를 이해하고 찬사나 보상 없이도 자기 일을 즐기는 사람들, 그저 예술가들의 뒷바라지를 통해 좋은 작품 만드는 일이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직접 박수를 못 받아도, 좋은 작품을 통해 성취감을 얻고 행복해하는 착하고 귀한 사람들, 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문화예술의 진정한 주역이라고 생각한다.

‘앞광대’들에게 박수를 받게 하는 것이 ‘뒷광대’들의 숙명이지만,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이런 숨은 일꾼이 많아야 살맛 나는 세상이 되고 이런 사람들을 귀하게 생각하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소중하고 든든한 숨은 일꾼 모두를 위해 그동안 ‘앞광대’로서 받아온 박수와 사랑을 뜨겁게 되돌려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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