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私益 탐한적 없기에… 가인은 至公無私”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가인 김병로는 파란만장한 한국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법의 거인’이었다. 사진은 대법원장 재임 시 전국사법감독관회의에 참석한 모습(1957, 왼쪽)과 군부정권에 반발해 창당한 민정당 대표최고의원 시절(1963)의 가인. 자료사진

‘가인 김병로’ 펴낸 한인섭 교수

참고문헌 목록만 30쪽 달해
법률가 행적에 초점 뒀다지만
생애 총체적 정리라해도 무방

“街人과 동행하듯 10년 임해
세월 이겨내고 존재감 부각
선생은 이미 위인 반열 올라
민주·헌법수호자 호칭 적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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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은 공직자로서 사적 이익을 탐한 적이 전혀 없기에, 선공후사보다 지공무사(至公無私)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근현대사에 ‘인물’들이 적지 않지만, 가인(街人) 김병로(1888∼1964)만큼 치열하게 살았으되 혼탁해지지 않고 지조를 굽히지 않은 공적 인물은 손에 꼽기 쉽지 않다. 청년기에 의병활동에 관여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변호사·신간회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사법부의 초석을 놓았고, 이승만의 정권연장에 헌법의 이념으로, 군부정권 초기에 야권통합으로 민주헌정을 지키고자 매진했던 사람이 가인이다. 공적인 업적은 물론 ‘극단의 청렴도’라 할 만큼 한 점 사사로움이 없었던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기릴 만한데, 김병로에 관한 연구가 아주 적은 현실은 의아할 정도다.

10년 동안 준비해온 ‘가인 김병로’(박영사)를 최근 펴낸 한인섭(사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2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세월의 망각을 이겨내고 시간이 갈수록 지금 여기에서 존재가 부각된다는 점에서, 가인은 ‘위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그는 “가인과 동행하며 대화하는 마음으로 10년을 임했다”며 “그를 언급할 때 떠오르는 ‘청렴강직의 대법원장’은 오늘날 어떤 울림을 가질까, 그의 공적 자세와 개인적 덕성은 오늘날 어떤 의미일까, 하는 질문들이 집필 내내 따라다녔다”고 돌아봤다.

지난 8월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사법개혁의 일선에 서 있는 그로서는 책을 통해 무언가 말하고 싶었을 법하다. 그는 “관계는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가인의 법률가로서의 면모를 본받자고 하기에는 너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법률가라면 평생에 한 번은 가인의 삶을 읽게 될 텐데, 그때 이 책이 그 법률가의 삶을 비추어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성공이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가인은 송죽 같은 절개뿐 아니라 실력과 열정을 겸비한 법률가였다. 그가 아파 입원하면 입법작업이 중단될 정도였다”며 “지병으로 왼쪽 다리를 절단한 상황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은 그의 열정에서 후세들은 불식지공(不息之工)을 배운다”고 덧붙였다.

920쪽에 달하는 책은 참고문헌 목록만 30쪽에 자세한 연보와 인명색인이 더해져, 저자는 “법률가로서 행적에 초점을 두었다”지만, 가인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처음 정리했다고 봐도 된다. 가인에 관한 기존의 본격 저술은 1959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수상단편’을 당시 기자였던 김진배 전 국회의원이 정리한 ‘가인 김병로’(1983)와 정치학자 김학준의 ‘가인 김병로 평전’(2013) 등이 있었다. 한 교수는 “두 책 모두 김병로의 법률가적 측면에 대한 내재적 분석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며 “가인의 공적인 삶의 80∼90%는 법률적 삶이었으므로, 그걸 복원하면 치밀한 법률적 논리의 바탕 위에서 민족지사와 민주주의자로서의 가인의 실체가 온전히 복원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에도 기억되고 빛나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책은 개화기 가인의 소년시절과 일본 유학, 경성전수학교 교수와 항일변호사, 신간회, 대형 사상사건의 연대변론투쟁, 해방 후 정부수립과 대한민국의 기본법률을 기초한 시기, 이승만 정권에 맞선 사법권 수호, 4·19와 5·16 전후의 독재 및 군정종식, 문민정권 수립을 위한 활동 등을 총 24개 장에 걸쳐 정리했다. 처음 소개된 김병로의 글이 많으며, 기존 서술 중 오류도 적지 않게 바로잡고 있다.

항일변호사로서 가인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민족주의를 가리지 않고 그 운동가들과 인간적 유대를 가졌으며, 좌우를 포용하는 민족통합전선의 중심에 섰다. 일제 말기 노골적인 친일압박에 지조를 굳건히 지켰다. 남북통합의 기조를 지녔던 가인을 이승만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가인의 성취와 유대는 이승만조차 그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한 교수는 “가인과 같은 분이 초창기 사법의 중심에 있었다는 건 민주헌정을 그나마 유지하는 데 우리 민족으로선 큰 다행이었다. 거인(巨人)의 크기는 이전과 이후를 보면 대비된다”고 말한다. 가인이 대법원장에서 물러나자 이승만은 조봉암에 대한 사형판결 등 정당 탄압, 경향신문 폐간, 법관연임법 등으로 대법원흔들기 등 정당·언론·사법권을 훼손했고,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됐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