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TV세상>北병사는 상상할 수 없는 한국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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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귀순한 북한 병사가 병원에서 한국 예능프로그램을 즐겨 본다고 알려졌다. 그 병사는 이국종 센터장에게 “예능프로그램이 재미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병사의 심리적 안정을 고려해 TV 채널을 오락, 영화로만 제한한 탓에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었겠지만, 어쨌든 북한 병사에게 한국 예능은 각별한 의미일 것으로 보인다.

예능은 북한의 전체주의적 통제사회와는 다른 한국 민주적 자유사회의 특징이 극명히 나타나는 분야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 병사에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재미와 남한으로 넘어왔다는 안도감을 전해줄 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 얘기가 아니다. 우리도 만약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시절에 살던 사람이 시간 이동을 해온다면 현대의 한국 예능을 보고 충격을 받으며 다른 세상으로 넘어왔다는 점을 실감할 것이다.

현대 한국 예능의 변화를 상징하는 프로그램은 MBC ‘무한도전’(사진)이다. 이 프로그램은 사전 대본 없이 어떤 상황만 주어진다. 대본이 없기에 야심찬 기획이 출연자의 예기치 않은 행동으로 조기 중단되기도 한다. 과거 ‘좀비 특집’이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출연자들이 각자 알아서 대응하면 아주 많은 카메라가 동시에 촬영하고, 그 영상을 모두 모아 편집실에서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든다. 과거의 아날로그식 편집 시스템으론 불가능한 제작방식이다.

여러 대의 카메라를 투입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수많은 촬영 영상을 동시에 맞물려 놓고 작업할 수 있는 디지털 편집 시스템이 있어야만 가능한 포맷이다. 거기에 다양한 자막효과 등을 자유자재로 입힐 수 있는 컴퓨터 특수효과 장비도 필요하다. 북한 실정에선 어려워 보인다.

이런 물리적 한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체제의 한계다. ‘무한도전’과 같은 예능을 ‘리얼버라이어티’라고 한다. ‘리얼’, 즉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날것을 내보낸다는 뜻이다. 전체주의, 권위주의적 체제에선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전체주의는 ‘꾸밈없는 날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도 과거 권위주의 시절엔 정제된 영상만 방송할 수 있었고, 따라서 당시엔 예능이 지금보다 정적인 느낌이었다. ‘무한도전’ 이후 한국 예능엔 북한에선 상상할 수 없는 생동감이 생겼다.

또 리얼버라이어티엔 중심이 없다. 과거 예능은 철저히 사회자가 통제하는 구조였지만, ‘무한도전’ 이후 그 원칙이 깨졌다. 저마다 소리치고 수시로 중심이 전복된다. 이런 역동적인 풍경 역시 전체주의 체제에선 구현되기 어렵다. 북한 오락프로그램이 한국 예능을 절대로 따라올 수 없는 이유다.

리얼버라이어티는 최근 리얼리티 예능으로까지 진전됐다. 이것은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자체를 내보내는 포맷이다. 최근 한국 예능에서 강화되는 ‘자유분방한 가벼움’도 엄숙주의 사회에선 불가능하다. 북한의 강박적인 체제미화 선전물만 접했던 사람이라면 이런 것을 보면서 ‘자유의 공기’를 실감할 것이다.

물론 우리도 아직 갈 길이 멀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유 방송을 불편하게 여기는 정권에 의한 블랙리스트가 있었고, 지금도 권력에 대한 표현은 방송인들이 자가 검열한다. 우리 방송이 보다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우리 체제의 북한에 대한 우위가 더 공고해지는 길일 것이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