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강대국과 권력의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 거기에서 벗어나 세상을 독립적 시각으로 읽는 일도 번역이다. 자료사진
번역전쟁 / 이희재 지음 / 궁리
포퓰리즘엔 부정적 의미 없어
역사성 담은 ‘서민주의’ 적절
美 특유 직업 경험 문화 ‘인턴’
기업 인건비 절약 수단 변질
번역어 현실과 괴리 비일비재
포퓰리즘(Populism)이란 용어는 대중추수주의나 인기영합주의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있어 보수든 진보든 상대의 정책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주홍글씨처럼 돼 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이 용어가 처음 생겨날 때 부정적 의미는 없었다. 당시 무분별한 철도 개발의 거품이 꺼지면서 피해를 본 농민들이 자신들을 대변해줄 ‘People’s Party’라는 정당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에서 포퓰리즘이란 말이 유래했다. 미국이 남미의 살바도르 아옌데나 우고 차베스 같은 반미 지도자를 공격할 때 사용하면서 이 용어는 ‘망국 이념’처럼 돼 버렸다. 용어(말)가 물리적 힘을 갖고 상대에게 타격을 주고, 그 잘못 붙여진 이름은 현실을 왜곡한다. 아옌데나 차베스는 사후에도 남미에서 추앙받을 뿐만 아니라 뒤늦게 서구에서도 그들의 정책이 여러 지표면에서 옳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남미에서 영향력 위축을 우려한 미국의 ‘공작’이 두 지도자를 궁지로 몬 건 근래 공개되는 여러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창조적 번역 이론서라는 평가를 받은 역작 ‘번역의 탄생’(2009)을 썼고, 근 30년간 다수의 책을 번역했으며 현재 런던대 아시아아프리카대학(SOAS)에서 영한 번역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의 이번 책은 영어 번역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번역을 단순히 영어를 우리글로 옮기는 차원을 넘어 현실을 번역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도 처음에는 번역가로서 말이 제대로 옮겨지는지에만 관심을 두었지만, 차차 이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번역·해석되고 가공되며 심지어 날조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심코 용어와 말을 쓰지만, 거기에는 강대국·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숨어있고, 따라서 말을 바꾸면 현실이 달라 보이게 된다.세상은 현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싸움을 벌인다. 이 책의 제목이 ‘번역전쟁’인 이유다.
예컨대 저자는 ‘Populism’을 굳이 ‘서민주의’로 번역한다. 서구의 경우 학술서에서 중립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부정 일변도로 사용되며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의 ‘인민주의’로 번역하자면 정작 미국의 농민들이 반감을 품었던 공산주의를 연상한다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고, 우리말로 그 역사성과 의미를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서민주의’라는 조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정착된 용어가 현실과 배치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진보’라는 용어와 관련해 저자는 국내 시장의 10배가 넘는 공산품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제조업체의 노조가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이 진보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들고 일어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비판한다. 보호무역이 성행하면 한국인 대다수는 지금의 생활수준을 누릴 수 없는 마당에, 자신의 존재조건을 성찰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나온 위선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인턴’이란 용어는 현실을 교묘하게 감춘다. 인턴은 원래 연줄 없는 젊은이들에게 전문직 경험의 기회를 주는 기성세대의 포용력과 아량에서 나온 선진문화로 여겨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특유의 취업문화였지만 유럽과 한국에서도 일반화되고 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보수당의 후원금 모금행사에서 일류회사의 인턴십 자리를 돈을 내고 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턴은 이제 기업이 인건비를 줄이면서 양질의 노동력을 조달하는 수단으로 자리잡았고, 미국 기업은 그 덕분에 연간 수십억 달러의 인건비를 절약한다.
‘민영화’로 번역되는 ‘privatisation’에 대해 저자는 이의를 제기한다. 이 말은 독일어 ‘reprivatisierung’에서 유래했는데, 나치정권이 집권을 도운 대기업에 대한 보상과 자금조달을 위해 국유재산을 민간에 매각하면서 용어가 정착됐다. 정부가 사기업을 통제할 수 있었던 과거에는 ‘민영화’라고 볼 수 있었지만, 자본과 공장의 국경선이 사라진 지금은 그 통제가 불가능해지면서 그 의미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민영화보다 ‘사유화’가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제안한다.
저자는 “말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보편질서를 믿는다는 뜻”이라며 “말과 앎 사이에는 무한한 가짜 회로가 있다. 이 책에서 말과 말이 아니라 말과 앎을 잘 이으려 했다”고 말한다. 520쪽, 2만5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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