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내가 사랑한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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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 서울대 명예교수

이상하게 끌어당기는 뉴욕
샌프란시스코의 낭만·사랑

베를린은 ‘장벽’ 무너뜨렸고
말라가는 기독교·이슬람 공존

흑백논리 갇힌 회색도시 서울
언제 서울과 사랑에 빠지려나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도시가 있다. 만일 어느 도시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곳을 떠나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떠날 때는 거기에 마음을 두고 오게 된다.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 주인공 벤 샌더슨은 라스베이거스를 떠나지 못한다. 그가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뿐이다.

나는 젊은 시절을 미국 뉴욕에서 보냈다. 뉴욕은 이상한 매력이 있는 도시다. 비록 돈이 없으면 살기 어려운 곳이지만, 뉴욕은 특유의 마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한번 뉴욕에 자리 잡게 되면, 좀처럼 떠나기 어렵다. 이른 아침, 던킨도너츠와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바쁘게 걸어가는 뉴요커들을 보면, 마치 “아이 러브 뉴욕!”이라고 외치는 것 같다.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에 체류할 때, 나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샌프란시스코와 사랑에 빠졌다. 1849년 골드러시 때,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던 곳, 1955년 앨런 긴즈버그가 장시(長詩) ‘울부짖음’을 낭송해 비트 문학의 시작을 알린 곳, 비트 작가들이 모여서 문학을 논하던 시티라이츠 서점과 카페 트리에스테가 있는 곳, 그리고 팝송 가사처럼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꽂는’ 낭만적인 도시, 그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였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때는, 재즈 가수 토니 베넷의 노래처럼 누구나 ‘샌프란시스코에 마음을 남겨놓고’ 오게 된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며, 나는 서울을 생각했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뒤덮인 뿌연 하늘, 비인간적이고 비낭만적인 콘크리트 빌딩 숲, 문화 유적 하나 없이 아파트만 늘어서 있는 매력 없는 한강 변을. 그러나 그런 것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견디기 어려운 것은, 지금도 끝없이 계속되는 흑백논리와 당파싸움, 한풀이 정치 보복과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자들의 독선과 횡포, 그리고 세상의 변화와 세계정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위기 불감증이다. 그렇다고 서울 말고 다른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몸은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꿈과 낭만과 다양성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왔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갔을 때, 나는 거기에서 한국의 슬픈 근대사를 보았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끼여 비운의 20세기를 살아온 폴란드처럼 한국도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 비극적인 20세기를 보냈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설 ‘소피의 선택’에서처럼 한국인들도 매번 선택을 강요당했지만, 그 선택은 결국 또 다른 딜레마일 뿐이었다. 나치 수용소에 잡혀간 폴란드 여인 소피는 아들과 딸 중 누구를 살릴 것인지 선택을 강요당한다. 그녀에게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고문이었고, 그녀는 그 후 내내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것 아니면 저것’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선택을 강요하고, 또 강요당한다.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 친북이냐 친일이냐, 또는 중국이냐 미국이냐…. 8·15 해방 이후 그리고 6·25전쟁 이래 우리 사회에서 강요되어 온 이분법적 선택은 끝이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소피의 선택’을 계속해야만 하는가? 폴란드는 이제 지난날의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섰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가? 폴란드를 떠나며 나는 내 마음을 바르샤바에 두고 왔다.

부서진 베를린 장벽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조국의 땅과 민족의 분단을 생각했다. 한국은 장벽이 아니라, 철책이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다. 벽은 부수면 되지만, 철조망은 철거도 쉽지 않고, 뒤엉켜 있는 가시 때문에 손을 다치기도 쉽다. 그것은 그만큼 한국의 분단 상황이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머물던 호텔 바로 옆이 예전에 동서독 검문소인 체크포인트 찰리였다. 거기 부서진 베를린 장벽 앞에 서서 나는 그 벽을 넘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했다. 문득 냉전 시대의 베를린 장벽을 다룬 존 르 카레의 소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생각났다. 독일은 동서로 가른 이념의 장벽을 깨뜨렸는데, 우리는 아직도 가시철조망에 얽혀 있다. 독일을 떠나며, 나는 내 마음을 부서진 베를린 장벽에 놓고 왔다.

영화 ‘엘시드’와 소설 ‘돈키호테’로 인해 좋아하게 된 나라 스페인의 남부 항구도시 말라가에 갔을 때 지중해의 아름다운 바다와 푸른 하늘도 좋았지만,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조화와 공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알람브라 궁전도 그랬지만, 그곳에는 두 문명 양식의 건축물이 나란히 서 있거나, 조화를 이루며 혼합되어 있었다. 내가 스페인의 영웅 ‘엘시드’를 좋아하는 것도, 그가 아프리카에서 침공해온 호전적인 무슬림을 스페인의 기독교도와 회교도를 화해시켜 만든 연합군으로 격퇴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그런 감동적인 상생을 보면서, 나는 같은 민족인데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서로를 적대시하고 싸우고 있는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돌이켜보았다. 내부에서 분열되면 그 체제는 결국 외부의 충격으로 붕괴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런 역사적 교훈도 잊은 채 아직도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 스페인을 떠나며, 나는 내 마음을 조화와 상생의 도시 말라가에 놓고 왔다.

그래서 지금 나는 ‘마음’이 없는 채 텅 빈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서울과도 사랑에 빠져, 세계 여러 도시에 두고 온 내 마음을 다시 찾아오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