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북핵, 낭만적 사고 땐 破局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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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 前 외교부 차관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2일 ‘조건 없는 대화’를 북한 측에 제의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은 유사시 38선을 넘어 북한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 경우 다시 38선 이남으로 되돌아오겠다고 중국에 약속했다. 미국의 유일한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를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북 대화론은 이튿날 백악관이 ‘제동’을 걸면서 주춤한 상황이지만, 틸러슨 국무장관의 발언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북핵 해법을 위한 모종의 논의를 시작한 것이 확실해졌다.

이는 지난 8월 12일 자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칼럼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칼럼의 핵심 논지는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북한이 단기적이라도 핵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면 항구적인 위험이 고착화한다. 둘째,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미·북보다는 미·중 간의 협상이 해법이다. 셋째, 미국은 북한의 정치적 장래(political evolution)와 비핵화에 관해 중국과 공동의 입장을 도출해야 한다. 넷째, 미국과 중국이 협상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참여가 중요하다. 다섯째, (핵 동결 등으로 시간을 끌기보다는) 단기간에 비핵화(非核化)를 추진할 수 있는 전략이 바람직하다.

키신저를 깍듯하게 모시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그의 제안을 다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북핵 문제를 중국과의 전략적 협의 속에서 해결하라는 제안은 받아들인 것 같다.

미국과 북한 간의 대화도 시점(時點)이 문제이지 원천적으로 배제된 것은 아니다. 미·중 간에 전략적 협의와 북·중 관계의 재조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북 대화를 할 경우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더라도 비핵화를 위한 대화, 즉 ‘전략적 대화’를 해야지, 제재를 완화하고 핵무력의 궁극적 완성을 위한 시간벌기용 ‘전술적 대화’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행보는 일견 단호해 보이지만 중국과의 전략적 협의가 여의치 않을 경우 핵 문제 해결 ‘포기’ 가능성이 커진다. 핵 동결(freeze) 수준에서 미봉하고, (키신저 해법과 달리) 비핵화는 장기적 과제로 남겨둘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북한 문제를 미·중 전략적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동중국해나 남중국해 등지에서 미국이 전략적 양보를 하지 않는 한 북한 문제에 대해 선뜻 협조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령 이러한 지역 문제와 분리하더라도 중국은 한·미 동맹이나 한·미·일 안보 협력 등에서 미국이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는 한 북핵 문제 해결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키신저 말대로 한국과 일본의 참여가 중요하다. 특히, 한반도 문제의 핵심 당사국인 한국의 생각이 중요하다. 북한의 비핵화보다 한반도 전쟁을 더 걱정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도모하는 식의 ‘낭만적’ 사고를 한다면 북한과 대화를 하더라도 동결 이상은 나아가기 힘들다. 북한이 지금까지 개발한 핵 능력은 그대로 둔 채 남북관계 개선이 이뤄지고 중국의 대북 제재가 완화되면 결국 미국은 두 가지 극단적 선택 중 하나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북 군사 공격을 하든지, 아니면 북한 핵을 중동지역에 확산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실상 북핵을 용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국(破局)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우리 정부가 제시하지 못하면 한반도의 미래를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