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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18 신춘문예 게재 일자 : 2018년 01월 02일(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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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당선작 - 이경란

옥상에서 내려다본 바닥은 어둡고 깊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낮에도 해가 들지 않았다. 틈이 두 걸음 남짓밖에 되지 않아 바닥이 더 깊어 보이는지도 몰랐다. 이 동네의 건물들은 꼭 이만한 깊이와 넓이의 틈을 사이에 두고 늘어서 있다. 수이는 어두운 바닥을 향해 침을 뱉었다. 침은 아무렇게나 쌓인 폐자재와 쓰레기 사이로 사라졌다. 운이 좋을 때는 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수이는 그 소리를 좋아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소리를 들은 날은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수이는 바닥을 잠시 내려다보다 옆 건물의 옥상으로 건너갔다. 사뿐한 걸음이 길고양이 같았다.

“할배, 할배 뭐해?”

수이가 제 방과 똑같이 생긴 옥탑방의 문을 빼꼼 열었다. 퀴퀴한 냄새와 텔레비전 소리가 문틈으로 쏟아져 나왔다. 침대에 누운 노인이 문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텔레비전이 놓인 작은 서랍장과 침대뿐 다른 세간이 없는 방은 휑했다. 수이의 방은 침대가 없었지만 이렇게 휑한 느낌은 아니었다. 거울 때문인지도 몰랐다. 수이의 전신거울은 방 안의 물건을 모두 두 개로 만들었다. 수이는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침대 옆에 놓인 작은 밥상에 건드리다 만 음식이 있었다.

“좀 먹었어?”

수이가 상으로 다가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할배 며느리 너무한 거 아냐? 반찬이 이게 뭐래?”

노인이 수이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수이는 말라가는 밥풀을 걷어냈다.

“이러다간 금방 죽어, 죽는다고.”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뭐? 안 죽는다고? 그럼 밥을 먹어야 할 거 아냐. 자.”

수이가 밥을 한술 떠서 들이밀었다. 노인은 싫지 않은 듯 입을 벌리고 받아먹었다. 밥알을 씹는 동안 기다렸다가 국을 떠먹였다. 입가로 국물이 주르륵 흘러 베개에 떨어졌다. 베개는 얼룩이 잔뜩 져 있었다. 수이는 휴지를 뜯어 노인의 입과 베개를 닦은 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음악전문 채널에서 무사가 춤을 추고 있었다.

“할배, 내가 오늘 저 새끼랑 일하고 왔거든. 존나 재수 없어.”

수이가 손으로 김을 한 장 집으며 말했다. 김은 눅눅했다. 무사가 한 번 환하게 웃자 방청석 소녀들이 자지러졌다. 그들은 피켓이나 핸드폰을 들고 흔들었다. 핸드폰 액정에 하트가 떠 있었다.

“저 새낀 전생에 나라를 몇 개나 구했나.”

노인이 수이의 눈길을 더듬어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잘하긴 잘하네. 안 그래?”

노인은 웃으며 끄덕였다. 수이의 시선이 노인의 얼굴을 지나 벽에 걸린 액자에 가 닿았다. 플라스틱 틀 안에 흑백사진들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수이가 일어나서 사진을 보며 말했다.

“좀 닮았다, 할배. 저 새끼랑.”

노인이 웃음을 터뜨리다 기침을 했다. 밥알이 튀었다. 수이는 기침이 멎기를 기다려 또 밥을 떴다.

▲  일러스트 = 김연아 기자 yuna@


타고난 보컬 실력과 훤칠한 키, 자그마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짙은 눈썹. 무사는 아이돌에게 어울리는 모든 조건을 갖고 있었다. 까다로운 성격까지도.

“아, 이런 걸 입고 찍으라고….”

수이가 손목에 찬 바늘꽂이에서 막 새 핀을 뽑아 든 참이었다. 스태프들은 못 본 척하면서 은근히 무사에게 집중했다. 광택 소재 셔츠는 무늬가 현란해서 수이의 눈에도 촌스러워 보였다. 수이는 입을 꾹 다물고 핀을 두 줄로 촘촘하게 꽂아 셔츠의 품을 조절했다. 등 쪽에서 본 무늬는 정확하게 좌우대칭이었다.

“와우, 역시 무사네요. 프레타포르테에서 극찬을 받은 옷일수록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데 말이야.”

내내 의자에 앉아 있던 실장이 다가오며 재빨리 분위기를 띄웠다. 실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에게나 어울리기 어려운 셔츠였지만 무사가 입으니 아주 그럴듯했다. 프레타포르테라는 말에 무사는 좀 누그러졌다. 자신의 노래가 스튜디오를 꽝꽝 울리자 무사는 음악에 맞춰 건들거렸다. 수이는 며칠 전 무사의 팬클럽 ‘무사F’에 가입했다. ‘무사’는 아폴론의 시중을 드는 학예의 신 이름, ‘F’는 포에버의 첫 글자라고 했다. 회원들에게 무사는 신보다 더 고귀한 존재였다.

일을 시작한 지 몇 개월 지났지만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이의 눈에 허접해 보이는 옷이 실장의 안목으로는 최고 스타일일 때가 많았다. 시골에서 옷 좀 입는다는 칭찬을 받았던 게 패션 감각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었다. 서울엔 옷 못 입는 사람이 없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스태프들은 다시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포토는 카메라와 조명을 점검했고 에디터는 포토에게 바짝 붙어 풀 샷을 세 개나 찍었으니 이젠 사 분의 삼 컷이나 클로즈업을 잡아 달라, 분위기가 너무 단조로운 것 같지 않으냐, 배경지를 한 번 바꾸는 게 어떻겠냐 하며 포토의 기색을 살폈다. 메이크업은 분첩으로 무사의 이마와 콧등을 몇 번 찍어냈고 헤어는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가다듬었다.

수이는 무사가 벗어놓은 옷을 정리한 후 다음 컷에서 입을 옷을 다림질했다. 수이의 다림질은 기계적이었다.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구김을 펼 줄 알았다. 수이는 치칙, 스팀 소리를 들으면서 이번엔 어떤 옷을 고를까에 골몰했다. 너무 튀지 않으면서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옷이어야 했다. 촬영 의상을 반납하고 새 옷을 사서 화장품을 슬쩍 묻혀 놓으면 열성 팬들은 쉽게 속았다. 무사는 초특급 아이돌이니 원래 가격의 몇 배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무사의 까탈이 밉지만은 않았다.

무사가 카메라 앞에 섰다. 수이는 카메라 뒤쪽에서 아무도 모르게 셀카를 찍었다. 수이의 얼굴 너머로 포토의 뒷모습과 무사의 전신이 잡혔다.

“할배, 돈 좀 없어?”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수이가 불쑥 물었다. 노인이 수이를 올려다보았다.

“하긴 할배가 무슨 돈이 있겠어. 물어본 내가 바보지.”

수이는 밥상을 밀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노인이 수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좋겠다, 할배는. 방세 걱정할 일도 없고.”

무사가 사라진 화면에서 여자 모델이 커피를 마시며 웃었다. 누가 봐도 예쁜 얼굴의 명문대 출신 여배우였다. 출발선이 다른 레이스는 애초에 공정하지 않다는 걸 수이는 잘 알았다.

“할배, 나 간다. 내일 또 올게. 많이 좀 먹어.”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틈을 건너자마자 누가 올라왔다. 수이가 열 걸음 남짓한 제 방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쟁반을 챙겨 들고 나온 여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옥탑방으로 이사하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수이는 옆집 옥탑방으로 인상 사나운 여자가 음식 쟁반을 들고 오르내리는 걸 봤다. 여자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올라왔다가 구시렁거리며 내려갔다. 아무도 밖으로 나온 걸 보지 못해 빈방인가 여겼던 수이는 방 안에 누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누군지 궁금했다. 여자가 내려가는 걸 확인하고 옆집 옥상으로 건너갔다. 옥상에는 식물 줄기가 말라붙은 화분과 큼지막한 장독이 두어 개 놓여 있었다. 화분은 화분이라 하기에 뭣한 고무통이었다. 다리가 하나 부러진 의자가 구석에 넘어져 있었고 삭은 빨랫줄이 끝에서 끝까지 옥상을 가로질러 매여 있었다. 스케치북만 한 창문에는 먼지가 뽀?다. 수이는 손끝으로 동전만큼 먼지를 닦아냈다. 깡마른 노인이 밥상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수이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노인의 시선이 창문을 향했다. 노인이 손짓을 했다. 문을 열자 오래 묵은 퀴퀴한 공기가 훅 밀려 나왔다. 화면 속에서는 엉덩이에 스티로폼 방석을 매단 여자들이 딸기를 수확하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수이는 문간에 슬그머니 앉았다. 노인이 두유를 내밀었다. 침대 옆에 두유가 상자째 놓여 있었다. 머뭇거리자 노인이 팔을 뻗어 재촉했다. 수이는 두유에 붙은 빨대를 뜯어 구멍에 꽂았다. 노인이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국에 밥 한술을 말았다. 수이는 두유를 한 모금 삼켰다. 노인이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밥을 한술 떠먹었다. 하우스에서 작업하던 여자가 허리를 펴고 한 손으로 등을 두들겼다.

“근데, 딴 거 봐도 돼요?”

노인이 선뜻 리모컨을 건넸다. 비닐하우스만 아니면 어떤 프로여도 괜찮았다. 음악 채널에 고정하자 노인이 수이를 향해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수이는 어느 순간 화면에 빠져들었다.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노인은 어느새 졸고 있었다. 턱이 가슴에 닿을 듯했다. 국에 만 밥은 불어 있었고 숟가락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수이는 조용히 일어나 숟가락을 상 위에 얹고 방을 나왔다.

수이는 그날 이후 간혹 노인의 방에 들렀다. 수이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두유를 마시는 동안 노인은 느리게 밥을 먹었다. 수이는 두유 한 팩을 오래 마셨다. 노인은 말이 거의 없었지만 수이에게 자주 웃어주었고 그 방에서는 시간이 한결 부드럽게 흘렀다.



강남역에 내려 약속장소로 가는 동안 무사에게 입혔던 셔츠와 비슷한 옷을 몇 번이나 발견했다. 싸구려 옷들이 널린 길가 점포와 리어카에서 요란한 무늬의 셔츠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무늬는 중앙에서 어긋나 좌우의 높이가 맞지 않았다. 엉성한 모조품이었지만 가격표 위쪽에 한결같이 ‘오리지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도 무사喜’는 예상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전날 밤 무사F에서 신중하게 골라 접촉한 상대였다. 오오오, 닉네임 쩔어여. 오늘도 무사는 님에게 기쁨을 ㅋㅋ, 이라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진짜라는 걸 어떻게 믿죠?”

‘오늘도 무사喜’는 커피숍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서른다섯? 마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그녀가 다리를 바꿔 꼬면서 물었다.

“믿고 말고는 그쪽 마음이죠. 내키지 않으면 관두든가요.”

수이는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쪼록 빨면서 뒤로 기대앉았다. 그녀도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수이는 셔츠 한 장에 자신의 월세보다 큰돈을 지불할 수 있는 ‘오늘도 무사喜’가 잠깐 부러웠다. 그녀가 입술을 새초롬하게 내밀고 수이의 표정을 살폈다. 수이는 그녀의 눈길을 무시하고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옆 테이블에서 친구 사이로 보이는 여자 둘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티라미수와 치즈케이크를 각자의 앞에 둔 여자들은 피부가 뽀?다. 코끝이 날렵하고 눈은 커다랬다. 티라미수가 코를 만지며 다시 할까 물었고 치즈케이크가 자신의 코를 들이밀며 비싸도 좋은 데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이는 손끝으로 자신의 코를 만져보았다. 콧방울은 뭉툭하고 콧대는 밋밋했다. 셔츠를 몇 개나 팔아야 코를 할 수 있는지 잠깐 계산해보던 수이는 무심코 ‘오늘도 무사喜’의 코를 봤다. 콧날이 매끈하고 코끝이 적당히 도톰했다. 갑자기 그녀의 눈이 궁금해졌다.

“보기만 하세요.”

수이가 스마트폰을 열어 스튜디오에서 찍은 셀카를 보여줬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리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쌍꺼풀이 선명한 눈매에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이 사진, 나 줄래요?”

수이는 빨대를 빨며 고개를 저었다. 꾸르르륵, 빈 빨대에서 소리가 났다. 샐쭉해진 ‘오늘도 무사喜’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리자 수이가 쇼핑백을 건넸다. 그녀는 쇼핑백을 열어 셔츠를 만져 보았다.

“또 있으면 연락해요. 뭐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안유지만 해주면요.”

보안유지 이야기는 진심이었지만 그녀에게 다시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정해둔 규칙이었다. 무사와 다시 촬영을 하게 된다고 해도 한 사람에게 두 번은 위험했다.

옆 테이블의 수다가 계속됐다. 수이가 최근에 알게 된 몇몇 속옷 브랜드를 언급한 치즈케이크가 브래지어 아래쪽을 조금 당겼다 놓으면서 웃었다. 마른 몸매에 흔치 않은 볼륨이었다. 수이는 자신의 옆구리를 더듬었다. 브래지어 끈이 조이는 부분 아래로 두툼하게 살이 잡혔다. 탄력 없는 살이 물컹거렸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군살이 자꾸 늘었다. 빨대를 한 번 더 빨았다. 얼음만 잔뜩 남아 꾸르르륵 소리가 났다.

여자들이 자리를 떴다. 치즈케이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수이는 얼른 접시를 옮겨 왔다. 구석 자리에 혼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수이는 피하지 않았다. 손으로 케이크를 집어 들고 베어 물었다. 수이가 노려보자 남자는 더러운 것을 피하듯 스마트폰 화면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날 밤 희연이 자신을 다그칠 때의 눈빛도 그랬다.

희연은 자주 옷을 사들였고 새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셀카로 찍으며 행복해했다. 비싸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세련되고 감각적인 옷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쁘고 날씬한 희연이 입으면 어떤 옷이나 근사해 보였다. 수이는 희연의 옷을 몰래 입고 나가기도 하고 감춰두기도 했다. 희연은 워낙 옷이 많은 데다 싫증을 잘 냈다. 몇 번 입고 난 옷은 다시 찾지 않았다.

“이상하네. 그게 어디 갔지?”

희연이 옷장을 발칵 뒤집었다. 한 시간째였다.

“잘 찾아봐. 어디 있겠지.”

수이는 심드렁하게 말하고 잡지를 펼쳤다. 수이는 희연이 뭘 찾는지 알았다. 블라우스는 얼마 전 남자친구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밖에서 보내고 온 희연이 블라우스를 자랑했을 때 수이는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해주었다. 희연은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외출했다. 희연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수이는 냉동실에서 검정 비닐에 싸인 물건을 꺼내 변기 탱크에 넣었다.

“너지? 니가 가져갔지?”

그날 밤 취해서 돌아온 희연이 수이를 몰아세웠다.

“뭘?”

수이는 천연덕스럽게 희연과 눈을 맞췄다.

“도둑년!”

“야! 말조심해!”

“도둑년보고 도둑년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불러? 씨발년? 그래, 좋네, 씨발년. 야, 이 씨발년아!”

수이가 벌떡 일어나며 베개를 집어 던졌다. 취한 희연이 휘청하면서 주저앉았다. 수이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걸레 같은 년이 누구한테 쌍욕이야. 얼굴 좀 생겼다고 눈에 뵈는 게 없냐? 이 남자 저 남자 갈아치우면서 나 없을 때 방으로 끌어들이는 거 모르는 줄 알아? 더러운 년!”

희연이 수이의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이가 희연을 걷어찼다. 옆구리에 제대로 맞았다 싶은 순간 희연이 고꾸라졌다.

“아무한테나 벗는 년이 어따 흘리고선 지랄이야!”

수이가 희연의 머리를 툭툭 찼다.

희연이 큰 소리로 울었다.

“시끄러! 나가서 울어, 이년아!”

희연이 소리를 죽이며 흐느꼈다. 수이는 이어폰을 찾아 귀에 꽂았다.



싸운 다음 날부터 며칠간 둘은 말없이 지냈다. 그저 서먹해진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고 수이는 편한 대로 생각했다.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옷을 감추고 발길질을 한 일이 미안했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블라우스는 여전히 변기 탱크에 들어 있었다.

희연이 보증금을 빼서 달아난 건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음악을 꽝꽝 울리며 외제차를 몰고 들이닥친 사내가 문을 두들겼다. 자다 일어난 수이가 문을 열자 사내는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화를 냈다. 잠시 후 부동산에서 사람이 왔다.

“옷장과 텔레비전, 가스레인지, 냉장고까지 전부 퉁쳐서 삼십만 원 따로 받아갔어요.”

부동산업자가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사내는 알 만하다는 듯 실실 웃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팔목에 문신이 조금 보였다. 희연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수이는 달랑 가방 두 개에 짐을 쓸어 담고 쫓겨 나왔다.



이사를 왔을 때는 봄이었다. 가끔 비가 내렸다. 비는 견딜 만했지만 빗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외로운 건 참을 만했지만 무서운 건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옥상 위까지 뻗은 나무가 바람에 우우 울기라도 하면 수이는 무섭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희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긴 너무 무서워. 하지만 난 니가 더 무섭다. 내 돈 언제 줄 거야. 그게 어떤 돈인지 너도 알잖아.

희연은 답하지 않았다. 수이가 보낸 메시지는 화면에 차곡차곡 쌓였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나고 무서워서 보냈지만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보냈다.

생각해보니 니가 신장이나 안구를 잃는 게 나을 뻔했어. 보증금 가로채서 사채를 갚으면 뭐해. 어차피 또 쓸 거면서. 내가 편의점에서 밤새워 일하는 동안 네가 미친년처럼 놀아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개 같은 년. 더러운 년.

없는 번호라는 회신이 왔다. 개의치 않았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수이에게는 그런 이야기들을 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대신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들을 메시지 창에 찍어 넣기 시작했다.

정말 코디네이터가 될 수 있을까? 예쁘지도 잘나지도 않은 내가? 니가 해준 계란찜 정말 맛있었는데. 보증금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더 이상 니 옷을 몰래 입지 않을 거야. 이젠 맞지도 않을 텐데 뭐.

누군가를 속이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 너도 그랬겠지. 사람들은 의외로 잘 속나 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겠지. 내가 널 다정한 친구로 여겼던 것처럼. 사기꾼! 거짓말쟁이! 지옥에나 가버려! 설마 벌써 죽은 건 아니겠지. 니가 죽은 걸 내가 모르고 있다면 그건 너무 억울해. 그러니 죽지는 마.



수이는 호흡을 멈추고 옆구리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시폰 소재의 블랙 원피스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배에 힘을 주고 거울 앞에 섰다. 올록볼록한 살들이 옷 바깥으로 삐져나올 것처럼 보였다. 입을 만한 옷이 이것 말고는 없었다. 다음날 오전 중으로 반납해야 할 옷이었다.

거울로 뒷모습을 봤다. 종아리가 튼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수이는 플라스틱 서랍장을 열었다. 삼 단짜리 서랍장은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주워 온 것이었다. 위 칸은 속옷과 수건, 가운데는 티셔츠, 아래 칸은 양말과 스타킹이 들어 있었다. 수이는 딱 하나 남은 스타킹을 조심스럽게 신었다. 양쪽 엄지발가락에 구멍이 나 있었다. 스타킹을 벗었다. 살이 튼 흔적이 아까보다 더 선명해 보였다. 스타킹을 옆구리에 끼고 서서 구멍 난 부분을 꿰맸다. 원피스가 조여 방바닥에 앉을 수 없었다.

“코디네이터라면서요?”

남자가 수이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수이는 남자가 한 질문의 뜻을 대충 이해했다.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코디네이터 어시스턴트, 라고 고쳐주려다 말았다.

“입히는 사람이죠. 입는 사람이 아니라.”

수이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원피스 때문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가슴에서 배, 허리까지 훑는 동안 수이는 숨을 멈췄다. 반쯤 벗고 있던 힐에 발을 꿰었다. 힐은 벗었다 다시 신을 때가 제일 괴로웠다. 스타킹의 꿰맨 부분이 맺혀서 아팠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봤지만 꽉 조이는 힐 때문에 쉽지 않았다.

“연예인들 많이 만나겠네요?”

“네. 좀.”

“난 메이 좋아하는데.”

“그래서요?”

“뭐, 그렇다고요.”

“한 번 촬영한 적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수이는 언제부터인가 퍽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월급이 없어도 괜찮겠냐고 실장이 물었을 때 집에서 그 정도는 지원해준다고 거짓말했고, 월급은 제대로 주느냐고 집에서 물었을 때 혼자 쓰기엔 넉넉하다고 거짓말했다.

남자가 어깨를 앞으로 기울이며 눈을 반짝거렸다.

“정말요? 어때요?”

“그렇죠, 뭐.”

남자는 수이에 대해서 별로 묻지 않았다. 수이는 메이에 대해서만 말했다. 메이에 대해서는 남자가 더 많이 알았지만 수이는 실감 나게 꾸며댈 수 있었다. 남자는 고스란히 믿는 눈치였다. 남자는 수이가 메이라도 되는 양 밥을 사고 술을 사고 클럽에 데려갔다.

“이 손으로 메이에게 옷을 입혔다고?”

수이의 손을 끌어당기며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수이는 입 모양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다니까!”

수이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남자는 춤추는 내내 수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수이는 그다지 싫지 않았다. 그만그만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소개받은 대로 남자는 평범했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클럽에 데려갔고 다음 코스로 모텔을 원하는 것까지 그랬다. 그는 모텔 앞에서 주저 없이 수이를 잡아끌었다. 잠깐 망설였다. 남자가 자신을 원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메이 코스프레를 할 마음은 없었다.

“여기까지.”

수이는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야!”

돌아보지 않았다. 남자는 야, 라고 두 번 더 크게 불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수이를 쳐다봤다. 수이는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면서 일정한 속도로 골목을 벗어났다. 물집 잡힌 발이 쓰라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목이 탔다. 아침 햇살에 방이 달아올랐다. 발치에 팽개친 원피스를 옷걸이에 걸다가 수이는 낮게 신음했다. 솔기마다 눈에 띄게 미어져 있었다. 수돗물을 받아 마신 수이는 배를 문지르면서 옆 옥상으로 건너갔다. 지난밤 노인에게 들르지 못해 수이는 마음이 급했다. 이럴 땐 자신이 꼭 노인의 손녀라도 된 것 같았다. 노인의 손녀 따위 짜증 난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노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술이 덜 깬 탓인지 휘청하는 바람에 슬리퍼 한 짝이 건물 사이로 떨어졌다. 장독 위에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가 빤히 쳐다봤다. 고양이를 향해 남은 한 짝을 힘껏 던졌다. 고양이는 도망가고 장독 뚜껑이 깨졌다.

“할배! 할배, 뭐해?”

문을 열자 역겨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건지 까무룩 기절을 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할배! 죽었어?”

그새 죽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노인의 어깨를 흔드는 수이의 손이 떨렸다. 상 위에 놓인 쟁반은 건드린 흔적이 없었다. 지난봄 노인을 처음 본 후로 노인은 점점 쇠약해졌다. 먹는 양이 줄어들어 수이가 먹여주는 일이 잦았다. 노인이 종일 누워 있긴 해도 화장실 정도는 혼자 다녔던 걸로 알았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수이는 방문과 창문을 활짝 열고 다시 노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이를 한 번 올려다보곤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다.

“아, 씨발, 이 집 며느리 너무한 거 아냐? 여기 처박아뒀으면 좀 들여다봐야 할 거 아냐. 돼지야? 아침저녁 밥만 올려주면 끝이냐고!”

노인이 힘겹게 손짓을 했다.

“뭐? 어쩌라고. 나가라고?”

노인이 다시 손을 까딱거렸다.

“좀 있어 봐. 식구들 불러줄게.”

수이는 계단참으로 가다가 멈칫했다. 물집 잡힌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장독 옆에 던져진 슬리퍼 한 짝을 주워 꿰 신고 건물 틈을 내려다보았다. 슬리퍼는 보이지 않았다. 폐자재와 쓰레기 사이로 빠진 듯했다. 수이는 신었던 한 짝을 벗어 바닥을 향해 던졌다. 슬리퍼는 이층 창문에 맞고 떨어졌다. 수이는 그 자리에 몸을 뉘었다. 구름이 느린 속도로 흘렀다. 눈을 감고 까칠한 옥상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길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다가 점점 아득해졌다.

수이는 옷 꾸러미에 파묻혀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대형 쇼핑백들을 양어깨에 걸고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감싸 안았다. 엉긴 옷걸이 끝이 목과 어깨를 찔렀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긴 바지 몇 개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왔다. 햇살이 이마에 뜨겁게 내리쬈지만 땀을 닦을 손이 없었다. 물집 잡힌 발이 점점 더 쓰라렸다. 수이는 몸에 착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땀에 젖은 원피스는 움직일 때마다 어딘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언덕 위에 다다르자 멀리 개울이 보였다. 개울을 건너면 짐을 내려놓으려 했는데 걸을수록 개울은 멀어졌다. 개울 저편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일 것만 같았다. 걸음을 재촉할수록 아버지일 거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그러나 걷고 또 걸어도 개울에 닿지 않았다. 수이는 어느새 옷들을 스르르 흘리고 있었다. 떨어진 옷들을 집으려고 보니 모조리 희연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지럼증이 일었다.

갑자기 자동차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인의 따지는 소리와 욕설이 섞인 남자의 고함이 따라붙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목이 탔고 속이 메슥거렸다. 수이는 일어나 계단참으로 갔다. 몇 칸을 내려가다 우뚝 섰다. 멀거니 서 있다 도로 올라온 수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할배! 할배, 일어나자.”

노인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불을 걷고 노인을 일으켰다.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질질 끌면서 욕실로 옮겼다. 뭉개진 변 자국이 욕실까지 이어졌다. 노인의 옷을 벗기고 변기에 앉혔다. 노인의 몸은 뼈에 가죽을 바른 듯 앙상했고 사타구니 사이에 거무죽죽한 성기가 졸아붙어 있었다. 수이는 간신히 노인을 변기에 앉히고 껴안았다. 노인의 쪼그라든 성기에 손이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등 쪽에 샤워꼭지를 들이대고 씻겼다.

“내가, 씨발, 우리 할아버지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우리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는데…내가…아, 씨발….”

노인의 얼굴이 닿은 배가 축축해졌다.

시트를 둘둘 말아 내놓고 문과 창문을 활짝 열었지만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할배, 먹어. 먹자고. 먹어야 또 싸고, 싸고 나야 또 먹고. 꾸역꾸역 먹어야 살지.”

수이가 국에 밥을 말면서 말했다.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입을 벌려 억지로 한 숟갈을 떠 넣었다. 욕지기가 올라와 숨을 참았다 쉬었다 했다. 노인의 눈에서 질금질금 눈물이 삐져나왔다.

“아, 씨발! 지금 울어? 날씨도 좋은데 왜 울어! 가만있어도 밥 갖다 줘, 잘 데 있어, 그만하면 늘어진 팔잔데 왜 울어!”

휴지로 노인의 입가를 닦아주다 수이가 소리쳤다. 목구멍이 실로 꿰맨 것처럼 콱 막혔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수이는 얼른 밥을 한술 더 떠먹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플라타너스 우듬지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열어둔 문으로 바람이 한 줄기 휙 들어왔다. 수이는 노인의 몸을 이불로 감싸주었다. 노인이 힘없는 눈으로 수이를 보았다. 눈꺼풀이 처지고 짓물러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수이는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액자 속 교복차림 청년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 옆 사진에선 청년이 깃발을 들고 한 손을 허리에 척 올리고 있었다. 청년은 함빡 웃는 얼굴이었다.

“할배, 깃발 든 사진 멋지다. 자알 생겼다.”

수이는 밥을 한술 더 떠서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이 아이처럼 받아먹었다. 수이는 사진을 한 번 더 보고 나서 이불을 발끝까지 여며 주었다.



원피스는 제법 고가였다. 두 달 치 월세보다 비쌌다. 저가 옷들은 박음질이 성글어서 뜯어지더라도 미어지지는 않았다. 고가의 얇은 옷일수록 박음질이 섬세해서 조금만 당겨져도 미어지기 쉬웠다. 뜯어진 솔기는 박음질을 하면 되지만 미어진 부분은 방법이 없었다. 업체에 전화를 건 수이는 분실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샘플을 분실하면 어떡하느냐고 담당자가 화를 냈다. 전화기를 귀에서 뗀 상태로 한참을 듣기만 했다. 담당자가 제풀에 지치자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고 끊었다.

다시 들어갈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무사F에 접속했다. ‘오늘도 무사喜’가 두어 군데 보였다. 수이는 최근 목록부터 빠른 속도로 훑어나갔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너, 이렇게 일할 거면 그만둬. 일 시켜달라는 애들 줄 서 있어.

실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촬영 의상의 가격과 브랜드를 에디터에게 보내지 않은 걸 잊고 있었다. 수이는 천천히 자판을 눌렀다.

너도 그러니? 쫓기고 있니? 다 그만둘까?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걸. 너는 있니? 너는 갈 곳이 있니?

실장은 오전 중으로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정말 그만두는 걸로 알겠다고 했다. 수이는 마른세수를 했다. 태그가 붙은 의상은 촬영 당일 메모를 해두었지만 샘플 의상은 반드시 추후에 가격을 확인해야 했다. 십 분 내에 가격 확인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담당자들은 바로바로 해결해주지 않았다. 적어도 한나절은 걸렸다. 그나마 돌아오는 답은 대부분 ‘가격미정’이었다. 패션업체와 매체는 서로 갑이고 을이었고 코디는 말하자면 병이었다. 그런 코디의 어시인 수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깐 망설이다 무사F의 회원 세 명에게 쪽지를 보냈다. ‘오늘도 무사喜’까지 합하면 같은 셔츠를 무려 회원 네 명에게 파는 거였다. 수이는 쪽지를 보내고도 한참 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 순서는 셔츠를 세 장 사는 일이었다. 핸드폰이 또 울렸다. 원피스 업체의 담당자였다. 계좌번호와 금액이 찍혀 있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니?”

수이가 픽업 의상을 한 아름 껴안고 사무실로 들어서자 실장이 소리를 질렀다. 굳은 얼굴이었다.

“가격과 브랜드는 다 정리해서 보냈는데요….”

의상을 행어에 걸던 수이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무사 매니저가 연락했더라.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방방 뛰더라. 고소하겠다는 거 겨우 달래 놨다.”

수이는 손목에 걸린 쇼핑백을 슬그머니 뒤쪽으로 감췄다. 안에 셔츠가 들어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수이는 등 뒤의 쇼핑백을 양쪽으로 번갈아들면서 손바닥을 허벅지 뒤쪽에 문질렀다.

“너 오전 중으로 가격 보내라고 했지? 너 때문에 교정지 못 넘긴다고 에디터가 나한테까지 전화했더라. 일 제대로 못 해? 하긴 이제 네가 할 일은 없겠다.”

변명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실장이 수이를 노려보았다. 수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언덕길도 계단도 가팔랐다. 아까부터 아랫배가 찌르듯이 아팠다. 생리대가 남았을까. 수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한쪽 손잡이가 떨어진 쇼핑백을 끌어안고 수이는 계단참에 쭈그리고 앉았다. 계단은 캄캄했다. 옥상으로 난 출구에 달이 걸려 있었다. 달이 자꾸만 부옇게 번져 보였다. 수이는 바로 노인의 방으로 건너갔다. 오전에 내놓은 시트가 그대로였다. 바람결에 구린내가 훅 풍겼다.

“할배! 할배 뭐해?”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수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 위에는 빈 그릇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 참…지금이 몇 신데 아직 밥도 안 줬대?”

노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노인이 이불 밖으로 손을 꺼내 수이를 불렀다. 노인의 손에 지폐 몇 장이 쥐여 있었다.

“이게 뭐야? 할배, 돈도 있었어?”

노인은 꼬깃꼬깃해진 지폐를 수이 앞에 떨궜다. 지폐 뭉치가 툭, 방바닥에 떨어졌다.

“뭐야? 나 가지라고?”

지폐는 모두 여덟 장이었다. 팔만 원. 셔츠 하나 값도 안 됐다.

“어우, 배고파. 우리 이걸로 피자나 시켜 먹을까? 배고파서 신발이라도 뜯어먹게 생겼어. 참, 뜯어먹을 신발도 없네. 슬리퍼 빠뜨렸잖아.”

노인의 눈길이 쇼핑백에 머물렀다. 수이는 생각난 듯 쇼핑백을 열어 셔츠를 한 장 꺼냈다.

“할배, 이거 뭔지 알아? 이거 엄청 비싼 옷이다? 할배, 이런 거 못 입어 봤지? 하나 가져. 할배도 죽기 전에 이런 옷 한번 입어 봐야지, 응?”

수이가 셔츠를 노인의 가슴팍에 올려놨다. 노인이 셔츠를 손바닥으로 쓸며 사진 속 청년처럼 함빡 웃었다. 이 없는 입속이 캄캄했다.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수이는 잽싸게 쇼핑백을 챙겨서 제 방으로 건너왔다. 불을 켜지 않은 채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살폈다. 여자가 쟁반을 들고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문간에 뭉켜 놓은 이불을 발로 툭툭 차더니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금방 밖으로 나온 여자는 몇 번이나 노인의 방을 곁눈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의 손끝에서 셔츠가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수이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희연의 메시지였다. 아니 희연의 번호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누구세요?

수이는 자신이 보냈던 메시지를 하나씩 지우고 번호를 삭제했다.

플라타너스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구린내가 바람에 실려 왔다고 느낀 순간, 다시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이는 문간에 주저앉은 채 구역질을 했다. 한 손에 쥔 전화기가 부르르 떨었다. 실장이거나 무사의 매니저이거나 ‘오늘도 무사喜’이거나 원피스 담당자이거나, 아니면 희연의 번호를 쓰는 누구이거나 상관없었다. 수이는 손바닥으로 명치를 꾹꾹 눌렀다. 구겨진 지폐뭉치가 떨어졌다. 지폐가 마른 잎처럼 굴렀다. 한 장씩 굴러가던 지폐들이 바람에 실려 가로수 너머로 휙, 날아갔다. 수이의 젖은 눈이 아득히 따라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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