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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18 신춘문예 게재 일자 : 2018년 01월 02일(火)
단지 조금의 빛(황정은論) -송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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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당선작

1.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다. 다만 존재한다. 살아남은 자의 호명에 의해서. 어떤 호명은 그 자체로 망각에 대한 저항이 된다. 그 저항은 힘겹고, 약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호명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그 불편한 슬픔 앞에서 우리가 최소한의 저항마저 하지 않게 된다면 짐승이 될 뿐이다. 죽음은 호명하는 일을 허망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명을 계속하겠다는 건 그 허망함을 견뎌보겠다는 것이고, 우울 속에서 영원한 애도를 하겠다는 것이다. 호명하는 순간에만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은 현존한다. 살아남은 자의 기억 속에서 죽은 자가 완전히 망각될 때 죽은 자는 한 번 더 죽는다. 기억하는 일은 물론 자주 고통을 불러오고 망각은 자주 안온함을 불러온다. 하지만 망각이 만연한 사회에선 누구나 쉽게 잊히고 쉽게 고통스러워진다.

김홍중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물질적 가치를 노골적으로 추종하는 동물적 속물주의에 지배된 생존자가 등장한다. 이 생존자는 “파괴적인 구조조정, 불황, 실업, 무한경쟁의 시장에서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는” 경제적 생존과 “사회의 도덕적 존엄성이 훼손되고 파괴된 상태에서 무차별적인 과시가 지배하는 왜곡된 인정투쟁의 공간에서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는” 사회적 생존을 추구한다. 여기에 더해 오늘날엔 생명의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간다움에 대해 묻지 않기란 어렵다. 그런데 인간다움을 묻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다. 모두가 병든 사회에서 인간다움에 대해 묻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인간다움에 대해 물을 수 있을까. 황정은의 소설에 등장한 어떤 인물들을 보면 우리는 우리가 인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러한 의문을 가능케 하는 인물들이 있다.

첫째,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에 등장하는 ‘앨리시어’의 부모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고, 자신을 머슴으로 고용했던 남씨 일가를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 여기며 “전쟁으로 모두 먹고살기 어려울 때 내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잘 곳을 주고 일자리를 준 집이니 때마다 찾아뵙는 게 인정이고 도리”이고 “목숨은 모두 가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가치가 있다”(44-45쪽)고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앨리시어의 아버지이다. 그런 그는 아내이자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앨리시어와 그 동생에게 가하는 폭력에 철저히 무심하다. 앨리시어에 의해 ‘씨발 년’이라고 불리고, 앨리시어와 그 동생에게 자신에게 몇 대까지 맞았는지 횟수를 세지도 못한다며 그들을 “머리도 없는 짐승” 취급하고 “맞은 횟수를 잊어버린 네가 순전하게 잘못했다”(65쪽)고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앨리시어의 어머니이다.

둘째, ‘복경’(‘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어떤 고객은 화장실에 두고 온 핸드백을 자신이 있는 주차장까지 가져오라고 하고, 또 어떤 고객은 오래도록 사용한 이불을 환불해 달라고 억지를 부린다. 백화점의 “판매원과 계산원은 서로를 증오하고 미화원은 둘 다를 증오하고 직원식당의 조리사들은 이들 모두를 증오하고 이들 모두는 조리사를 증오”(196쪽)한다. 고객 응대에 능숙한 백화점 매장 매니저는 백화점 근처 지하상가의 매장 직원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나’는 백화점 내 다른 매장 매니저에게 “손님을 대할 때 너무 웃는다며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웃는 거, 싸구려로 보인다”고 “보고 있는 자기가 다 창피할 때도 있는데 대체 왜 그렇게까지 웃냐”(208쪽)는 말을 듣는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나’의 심리도 다른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셋째, ‘웃는 남자’(‘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내 곁에 서 있던 노인이 내 쪽으로 쓰러졌고 간발의 차이로 나는 그를 피해 비켜섰다 (……)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마침 도착한 버스에 탔다. 그게 다였다. 죄책감을 느껴서 도망을 치고 싶었다거나 뭔가를 계산한 것도 아니었다. (……) 저 사람이 쓰러진 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저 사람은 무더위 때문에, 자신의 몸 상태 때문에 저절로 쓰러졌는데 그게 내 탓인가.”(177-178쪽), “구 인승 승합차와의 충돌로…… 작은 유릿조각들과 빗물, 차가운 빗물이 바늘처럼 얼굴로 튀어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 버스가 크게 회전했을 때……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있는 힘껏 붙들었지. 그 짧은 순간…… 나는 디디가 아니고 가방을 붙들었지.”(181쪽)

‘나’가 겪은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폭염에 쓰러진 노인을 두고 곧바로 버스에 탄 일이고, 다른 하나는 디디를 잃었던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당시 디디가 아닌 자신의 가방을 곧바로 붙든 일이다. 이 소설은 앞에서 거론한 문제적 인물들과는 조금 다르다. 앞의 인물들은 그 심리의 원인을 유추하는 게 가능하지만 ‘웃는 남자’에 등장하는 ‘나’의 심리는 언뜻 유추하기 어렵다.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뭔가 잘못되었는데…… 그 잘못에 내 잘못이 있었나. 잘못이기는 한가…… 아니다 잘못이다. (……) 나는 어쩌면 총체적으로, 잘못된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177쪽)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무엇이 잘못된 건지는 알지 못한다. 결국 ‘나’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낀다. 두 사건을 통해 드러난 ‘나’의 심리는 ‘(나는) 어떤 인간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나’의 심리는 나중에 겨우 유추 가능해진다. 혜지 아저씨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자. ‘나’가 혜지 아저씨라고 불렀던 아버지의 목공소 동료가 있었다. 어느 날 혜지 아저씨의 티코가 덤프트럭과 부딪힌 사고가 있었고, 아버지가 혜지 아저씨의 연락을 받고 사고 현장을 찾았다. 아버지는 혜지 아저씨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혜지 아저씨는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혜지 아저씨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건 아버지였다. 결국 혜지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혜지 아저씨의 부인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대해 물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긴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혜지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왜 혜지 아저씨에게 닥치라고 다그쳤을까. 말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를 아껴서 사는 데 집중하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그의 상태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내 아버지는 말했고 그건 아마 사실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은 아닐까. (……)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184쪽) 결국 그 심리는 ‘패턴’이라는 단어로 유추할 수 있다. ‘나’와 아버지는 자신들이 마주한 일 앞에서 특별히 나쁜 의도를 가졌다거나 죄책감을 못 느꼈던 게 아니다. 두 사람은 그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 일 앞에서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했다. 무의식적으로 굳어진 습관에 의한 말과 행동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마땅한 대답을 할 수 없고, 다만 자신이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될 뿐이다.

이러한 황정은의 소설 속 인물들을 보면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구분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구분할 자격이나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여력은 충분한가요? (……) 아픈데 돈이 없으면 병원비를 제때에 낼 수 없습니다. (……) 살려내고 싶어도 살릴 수 없는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진통조차 해줄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 마음은 뭐가 되겠습니까. 짐승 아니겠습니까. 짐승이 되어버린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돈을 벌어. 그 짐승이 되지 않으려고 돈을 법니다.”(‘복경’, 193-194쪽) 인간다움의 조건에 대해 황정은은 “여력의 여부”(194쪽)라고 쓴 적이 있다. 동물적 속물주의 시대엔 생존 그 자체가 해결과제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생존이라는 문제에 떠밀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에선 인간다움을 묻는 일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 된다. 황정은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혹은 물을 수 없는) 시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생존과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져 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않으냐고.


물론 황정은의 소설엔 윤리적 주체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언제나 애도에 실패한다.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에 따르면 애도의 성공과 실패는 대상에 대한 애착의 단절 여부에 달려 있다. 대상에 대한 애착을 단절하지 못할 경우, 우울증에 빠진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살아남은 자가 앞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려면 애착을 가졌던 대상을 다시 한 번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착의 대상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건 불가능하다. 대상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질 순 있어도 완전히 사라질 순 없다. 살아남은 자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애도에 실패할 수밖에 없고 우울 속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밖에 없다.



디디의 죽음을 생각할수록 나의 삶을 생각한다. 어떻게 살았나. 어떻게 사는가. 살아서 그것을 생각한다.

- ‘웃는 남자’, 184쪽



‘웃는 남자’의 ‘나’는 디디를 사고로 떠나보내고 난 뒤 스스로에게 묻는 이 질문은 살아남은 자에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하고 슬픈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살아남은 ‘나’가 힘겹게 입 밖으로 꺼낸 최소한의 윤리적 가능성이다. 이 질문은 기억의 윤리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황정은 소설의 윤리적 주체들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는 이들이다. 그들은 고통스러울 게 분명한 기억들을 부르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거기서 어떤 인간다움을 발견한다.



2.

처음부터 없었던 것(nothing)과 있다가 없어진 것(absence)은 다르다. 자본은 있었던 것을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이를테면 토지의 효율과 도시 기능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재개발사업이 그렇다.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오래되고 낡은 건물들이 허물어진다. 그곳을 터 삼아 살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한순간 거리로 내몰린다. 허문 자리에 아파트와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선다. 큰 건물들과 화려한 빛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아름답다 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은 그곳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사나운 서치라이트라고 표현한 권력의 빛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권력의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를테면 단상에 선 정치인을 찬양하기 위해 쓰이는 조명이다. 건축을 통치 수단으로 썼던 아돌프 히틀러는 건축가인 알베르트 슈페어와 함께 뉘른베르크 전망대 회장의 무대 풍경을 기획했다. 어두운 경기장에 모여든 수많은 군중은 아돌프 히틀러를 비추는 조명과 밤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수백 개의 서치라이트에 감탄하며 ‘하일 히틀러(Heil Hitler)!’라고 외쳤다. 빛의 대성당(Cathedral of Light)이라고 불린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알베르트 슈페어는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세계 최초 빛의 건축’이라며 감격했다. 권력의 빛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말한 반딧불(lucciola)을 잘 허문다. 반딧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미지다. 반딧불은 미약하다. 반딧불은 언제나 사나운 서치라이트를 피해 다녀야만 하는 신세다. 반딧불은 어디서 어떻게 출현할지 알 수 없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장래의 빈틈 있는 이미지에 관한 것이지, 구원이나 종말의 시간의 거대한 지평에 관한 것이 아니다. 벤야민적인 메시아주의의 그 유명한 ‘좁은 문’은 오로지 잠깐만 열릴 뿐이다. 벤야민은 ‘1초’라고 말한다. 그 시간은 대략 어둠이 다시 권세를 누리기 전에 한 마리 반딧불이가 자신의 동족을 비추기 위해―부르기 위해―필요한 시간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미지는 죽지 않는다. 이미지는 잔존한다. 이미지는 징후로서 출현한다. 그러나 아주 잠깐 동안만.”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 해서 흔히 사용되는 알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이십 개를 사면 이십일 개, 사십 개를 사면 사십일 개, 오십 개를 사면 오십일 개, 백 개를 사면 백한 개, 하며 매번 살 때마다 한 개가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하나, 뿐이지만 반드시 하나 더, 가 반복되다 보니 우연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날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가 전구를 세다 말고 나를 빤히 보시더라고요. 뭔가 잘못 물었나 보다, 하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입을 조금씩 움직이고 계세요.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그러다 한참 만에 말씀하시길,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대형마트 같은 곳에서, 무재 씨도 그런 것을 사 본 적 있나요.

가끔은.

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선지 들지 않고요.

그러고 보니.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

―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94-95쪽



그 이미지, 그 아름다움은 아마도 이곳에 있는 게 아닐까. 그 아름다움은 아마도 이것이지 않을까. “시간을 들여 정성껏 봉투를 벌려서 입구를 동그랗게 만들어 둔 다음에, 오른손을 상자에 넣어서 손톱만 한 전구를 한 움큼 쥐고 나서, 왼손에 들린 채로 대기하고 있는 봉투 속으로 한 번에 한 개씩”(103쪽) 넣는 할아버지가 있는 전구 가게 오무사,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오무사 할아버지의 그 마음, 조그맣고 값싼 전구의 희미한 불빛이 아름다움인 건 아닐까. 아주 잠깐 동안만 존재하는 그것들 말이다. 언젠가 구원이 올 거라는 전통적 메시아주의는 허망하다. 행복은 미래에 있지 않다.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서 부러움을 일깨울 수 있을 행복은 우리가 숨 쉬었던 공기 속에 존재하고, 우리가 말을 걸 수 있었을 사람들”과 함께 존재한다. 벤야민이 말한 희미한 메시아적 힘(eine schwache messianische Kraft)은 그가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라고 말한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고 그 힘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다. 물론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란 말 그대로 미약한 힘이다. 그러나 미약하다는 건 무능하다는 말과 같지 않다.

고백해야겠다. 소설이 희망을 말하는 건 기만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소설은 철저한 절망의 기록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과격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소설은 희망을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단지 미약한 희망일지라도. 그저 절망하는 일은 우리를 괴롭히는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무엇보다 바라는 것이다. 절망하지 않고 단지 미약한 희망을 말하는 것. 황정은이 들려준 오무사 이야기와 더불어 은교와 무재의 “선량한 사람들의 그 선랑함이 낳은 사랑” 이야기가 그 미약한 희망의 증거다.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 ‘명실’, 110-111쪽



아름다움에 관해서 말할 것이 조금 더 있다. 황정은의 소설은 최근으로 들어설수록 더 햇빛(혹은 양지(陽地))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도 씨는 죽기 직전 자신보다 먼저 죽은 유라 씨를 “양지 바른 곳”(‘대니 드비토’, ‘파씨의 입문’, 창비, 2012, 58쪽)에서 부르고, 녹두에게 장어를 먹이기 위해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에겐 찾아드는 건 “맑은 노을”과 “저물어가는 빛”(‘양산 펴기’, ‘파씨의 입문’, 152쪽)이고, 양지가 아닌 음지와 같은 서점에서 ‘나’는 “햇빛을 내 피부로 받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 중에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아 햇빛이 가장 좋은 순간에도 나는 여기 머물고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다 갈 것”(‘양의 미래’, ‘아무도 아닌’, 48쪽)이라 말하고, ‘나’는 “햇볕은 따뜻해서 바람만 아니라면 어디 모퉁이에 앉아 (……) 다만 햇볕을 쬐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명실’, ‘아무도 아닌’, 94쪽)하며 햇볕 아래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노인들을 뒤늦게 이해하게 되고, 디디가 집을 얻을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 중에 하나가 “햇빛”(‘웃는 남자’, ‘아무도 아닌’, 176쪽)이다.

그리고 ‘명실’에서 ‘그녀’가 실리와 함께 바다에서 마주한 광경이 있다. “육지를 떠난 고깃배들이 먼바다에서 집어등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이 언제까지고 이어졌다. 그녀는 전에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질리지도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드는 것은 그 불빛들이었다. 그게 없었다면 다만 어둠일 뿐인 공간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것. 그녀는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압도적인 공간에 내던져진 인간에게…… 그것은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109쪽)

이것은 황정은이 세월호 사건 이후 쓴 르포 ‘가까스로, 인간’에도 기록된 아름답다고 여긴 밤의 기억 중 하나다. 르포에 쓴 또 다른 밤의 기억이 있다. “선상문화제가 열렸던 밤의 갑판에서 오카리나 공연이 시작된 순간”이 그것이다. “첫 번째 곡으로 ‘섬집 아기’가 연주되기 직전에 모든 조명이 꺼지고 갑작스럽게 나는 완전한 밤 속에 있게 되었다. 머리 위로 아주 작은 달이 떠 있을 뿐이었는데 내 앞에 선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의 앞에 선 이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 앞의 뒷모습도, 그 앞의 뒷모습도 보였다. 갑판에 모여 선 사람들이 달빛을 받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으로도 충분하게 그들의 윤곽이 있었다. 배가 가는 방향을 바라보고 선 그 뒷모습들이 아름다웠다.”(97-98쪽)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황정은이 아름답다고 여긴 건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드러난 사람들의 뒷모습뿐만이 아니었다. 황정은은 그와 꼭 닮은 것을 2014년 7월 24일 서울광장에서 본 적이 있다고 쓴다. 안산에서 출발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울광장에 도착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끊이지 않고 박수를 치던 수만 명의 사람들. 유가족들이 모두 앉을 때까지 그 누구 하나 먼저 앉지 않고 박수를 치던 사람들. “팔꿈치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저마다의 진심으로 박수를 치던 사람들. 그 뒷모습들이 저 밤바다에서 보았던 수평선과 같았다”고 “압도적인 검은 것 위에 세월이 마냥 막막하게 떠 있지 않도록 하는 것. 그 팔꿈치들의 간격이, 그 광경이 무척 아름답다”(98쪽)고 쓴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절망하는 일은 잃어버리는 일이라고.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을 잃은 건 아니다. 망해왔고 망하고 있고 앞으로도 망할 거라고, 무엇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비관하고 냉소하는 동안에 희미한 불빛은 거의 다 꺼져가고 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사랑의 모든 장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도 사랑의 모든 장소들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목화를 닮은 낮잠 냄새”(‘양산 펴기’, 153쪽)를 맡는 일. 사랑하는 이의 “가마가 두 개”(‘백의 그림자’, 34쪽)라는 걸 알아내는 일. 그 모든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는 장소들. 아름다움은 포옹을 할 때 비로소 생기는 틈에, 그 좁은 자리에 겨우 든다.



3.

망각되어 가는 모든 이름들을 계속 불러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이름들을 부르는 일이 가능하다는 건 알지만(이름을 모르는 게 아니므로) 그것이 허망한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이름을 가진 모든 이들이 부재해 있으므로) 실종된 소녀 ‘진주’를 마지막으로 목격했다는 것 외에 ‘진주’의 실종에 관해서 그 무엇도 말할 수 없는 ‘나’(‘양의 미래’)처럼 우리는 목격한 것이 있지만 애당초 불가능한 증언을 할 수밖에 없는 증언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또한 말은 고통을 다 담을 수 없는 무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잊지 않겠다’는 말도 무력한 것일 수밖에 없지만 무능한 것이라고 할 순 없다. 말 또한 덧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다만 덧없기만 한 것을 덧없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우리 자신이다. 덧없고 아름다운 말뿐 아니라 덧없고 아름다운 것(“그 팔꿈치들의 간격”)을 믿는다는 것. 이제 우리가 덧없다고 말할 때 그건 절망에 굴복하겠다는 게 아닌 절망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



그대는 어디에 있나.

이제 그대의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이것을 어디까지 들었나.



(……)



그대가 옳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대가 옳다.

그대와 나의 이야기는 언제고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올 것이고, 그대와 나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 ‘야만적인 앨리스씨’, 162쪽



우리는 눈 속의 기록(‘뼈 도둑’, ‘파씨의 입문’)을 최초로 발견한 자들이자 황정은의 소설에서 끊임없이 호명되는 그대(혹은 당신)이다. 이 호명은 우리가 무력한 그 말조차 충분히 말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세월호가 가라앉고 백 일이 되는 날, 안산에서 서울광장까지 꼬박 하루를 걸어온 유가족을 대표해 한 어머니가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그녀는 말했다. 엄마아빠는 이제 울고만 있지는 않을 거고, 싸울 거야.



(……)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다 같이 망하고 있으므로 질문해도 소용없다고 내가 생각해버린 그 세상에 대고, 유가족들이 있는 힘을 다해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니 이제 내가 뭘 할까.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



그러니 누구든 응답하라.

이내 답신을 달라.

- ‘가까스로, 인간’, 96-98쪽



우리가 무언가를 묻기 위해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황정은은 우리에게 어디에 있느냐는 윤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황정은은 응답을 요청한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 우리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예컨대 강정, 밀양, 쌍용, 세월은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이 망각되길 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어야만 한다. 싸워야만 한다. 너무 늦었지만 이 글이 그 요청에 대한 응답이 되었으면 한다.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싸워나갈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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