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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18년 01월 12일(金)
책을 깊이 파지 않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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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장

책을 위아래로 보면 땅을 닮았다
땅을 파야 작물 심고 자원도 캔다

책 속으로 파고 드는 것은 왜일까
세상의 지혜를 찾기 위해서 한다

책을 읽기보다는 훑어보는 시대
현재·미래 알려면 책벌레가 되자


손에 책을 잡고 내용을 파악하는 활동을 ‘읽는다’고 한다. 책을 읽는 활동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 있다. 즉 ‘책을 판다’라고 한다. 책을 판다고 하면 돈으로 책을 사고파는 매매 행위를 떠올리기 쉽다. 책을 판다는 말은 매매 행위 외에도 책을 읽는다는 독특한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책을 읽는다는 의미로 왜 매매와 같은 뜻을 지닌 책을 판다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책을 판다’에서 ‘파다’라는 동사에 주목하면 그 비밀을 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먼저, 100쪽 안팎이 아니라, 적어도 1000쪽이 넘는 두꺼운 사전을 책상에 올려놓자. 이어서 책상에 눈높이를 맞추고 책의 위아래를 계속 훑어보자. 그러면 한 권의 책이 꽤 여러 장의 종이로 만들어진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책은 손에 쥐었을 때 앞쪽과 뒤쪽으로 나뉘지만, 두꺼운 사전을 책상에 놓았을 때 위쪽과 아래쪽으로 위치를 다르게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면 한 권의 두꺼운 책이 땅 모양을 빼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책의 앞표지는 지표면을, 본문은 밖에서 안으로 깊숙하게 쌓인 지층을 닮아 보인다. 여기에서 책을 ‘판다’는 말이 땅을 판다는 말과 닮아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까닭으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책벌레’라고 한다. 사람을 벌레라고 하면 끔찍이 싫어할 만도 한데 책벌레만은 예외적으로 예쁘게 들린다. 책을 파고 들어가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특성을 나타내는 조어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이황과 이이 그리고 정약용과 같은 학자만이 아니라, 세종과 정조처럼 촌음을 다투는 국왕마저도 책벌레였다.

사람이 먹는 채소와 작물을 심으려면 제일 먼저 땅을 파야 한다. 이때 파는 것은 채소와 작물의 씨앗을 땅속에 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고, 딱딱한 땅을 부드럽게 하여 채소와 작물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또, 사람이 지난날 겨울철 난방을 책임지던 석탄을 캐내려면 지표면에서부터 땅속으로 갱도를 파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이때 파는 것은 자원이 묻혀 있는 곳을 향해 찾아서 땅속에서 밖으로 끄집어내는 활동이다.

이러한 의미의 유사성에 착안하면 책을 파는 행위는 사람이 책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의미를 캐내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책을 ‘파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구별되는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책을 파는 행위는, 앞의 몇 장을 읽다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중간에서 그만두거나 책에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골라 먹는 책 읽기와 다르다. 책을 파고드는 읽기는 한번 잡은 책 속으로 들어가서 끝을 보게 마련이며, 한 책에서 다음 책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특성을 갖는다. 이로 인해 책을 읽지 않는 생활과 책이 없는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세상이 된다.

책벌레들은 왜 그렇게 책 속으로 파고드는 것일까? 책 속에서 지금의 세상을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그릴 수 있는 의미와 진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와 진리는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이렇게 보면 책을 깊이 파는 읽기는, 나의 현재와 미래를 마주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원 중에서 사상의 자원을 캐내는 활동이다.

현대는 옛날과 달리 책을 자유롭게 사고파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책을 파는 책벌레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출판사는 아무리 좋은 책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거론되고 있다. 현실이 책보다 재미있다 보니 문학책을 읽지 않고, 생계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책을 살 여유가 없으며, 재미있는 놀이가 많다 보니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들 한다. 아마 책을 읽는 습관의 변화도 독서층의 감소에 일조하지 않았겠는가.

어린아이는 한글을 깨치지 않았으니 처음부터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어른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읽기를 대신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옛적의 이야기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읽었던 책을 들으며 간접적으로 책을 접했다. 이때 이야기를 더 들으려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보채기도 하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또 읽어 달라고 주문했다. 이렇게 책을 듣는 방식에 익숙하다 보면 한글을 깨치고 난 뒤에 혼자서 책을 읽는 방식으로 진화하게 된다.

책 읽기는 손으로 텍스트를 잡고 눈으로 펼친 책장을 뚫어지게 보고 입으로 소리를 내고 손으로 메모를 하는, 꽤 복합적인 활동을 가리킨다. 요즘도 여전히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사실 그 양상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눈으로 빨리 텍스트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며 손으로 책장을 넘기지만 소리를 내지 않는다. 전자 매체의 경우, 눈으로 화면 전체를 훑어보고 손으로 연신 화면을 쓸어 올린다. 책을 읽는다기보다 쭉 ‘훑다’ 또는 ‘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보는 것이 원래 듣고 읽는 것만큼이나 적극적인 행위임이 틀림없지만, 책을 훑고 보는 행위는 책장을 깊게 만나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책을 보고 있지만, 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다가 그만두는 것이다.

현재를 투시하고 미래를 기획하려면 여전히 책은 멀리할 수가 없다. 투시와 기획의 지혜가 책 속에 응축돼있기 때문이다. 책 읽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면 사람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책을 읽어주는 집안에서 자라나서 책을 혼자 스스로 읽고 그 안에서 현재와 미래를 만나는 책벌레로 진화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길을 터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이 길을 터주고 있는지 막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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