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문화재>“흉년의 도둑 선처” 왕자시절 英祖 미담… 正祖가 되새겨 글 짓고 碑 세워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조선 21대 왕인 영조와 22대 왕인 정조의 사연이 아로새겨진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는 1만5000여 가구의 초대형 단지인 서울 은평구 ‘은평 뉴타운’ 내 9단지와 10단지 사이 금암문화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2013년 조성된 금암문화공원에는 금암기적비가 한쪽 편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고, 공원에는 체육시설과 미끄럼틀 같은 어린이 놀이시설도 들어서 있다.

아파트 단지 안에 만들어진 공원이기 때문에 공원 너머로 아파트 숲이 보이고, 공원 한쪽 편에는 지하철 3호선 고가구간 선로도 지나고 있다. 금암기적비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명릉(明陵, 숙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현재의 서울 은평구 진관동인 ‘금암’에 들렀다가 할아버지인 영조의 옛 미담을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세운 것이다. 200여 년이 흘렀지만 왕의 어제(御製), 어필(御筆)비로 문학사 및 서예사에서 중요한 자료다.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됐다.

정조가 회상하며 비에 새기도록 했다는 영조 관련 미담은 이렇다. 영조가 왕자인 연잉군으로 있을 때 금암에는 의주(義州)로 가는 역참(驛站)이 있었다. 그래서 금암발참(黔巖撥站, 발참은 파발꾼이 교대하거나 말을 갈아타는 역참)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영조는 왕자 신분으로 부왕인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 금암발참에서 쉬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쉬던 중 덕수천(창릉천의 옛 이름)을 건너가는 소도둑을 잡았다는 말에 참장(站將, 역참의 책임자)을 불러놓고 “필시 흉년에 춥고 배가 고파 도둑질을 했을 것이니 선처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 궁궐로 돌아가 세제(世弟)로 책봉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 이 사건은 영조가 50년간 선정을 베푸는 징조가 됐다는 내용이다.

정조는 1781년 8월 명릉을 참배하는 길에 금암에 이르러 할아버지 영조의 자취를 둘러보고 경기도 관찰사에게 오랜 세월에 스러진 참사를 새로 짓고 빈터를 닦아 비를 세우도록 했다.

현재 참사는 없고 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세워져 있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이 얹혀 있다. 비신의 높이는 148㎝이며, 폭은 68㎝, 두께는 26㎝로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이다. 비문 말미에는 ‘소자가 왕위를 이은 지 5년째 되는 신축년 가을 팔월 초 길일에 삼가 짓고 써서 15일에 세우다’(小子嗣位之五年辛丑八月初吉日敬製敬書十五日立)라고 쓰여 있다. 글씨는 단정한 정자체로 18세기에 유행하던 서풍이다.

제왕이 세운 기적비이니 만큼 엄숙함과 예의를 갖추라는 뜻으로 기적비 우측 약 50m 지점에는 이곳이 성역임을 나타내는 하마비(下馬碑,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돌비석)도 세워져 있다.

글·사진 =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