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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이미숙 논설위원 게재 일자 : 2018년 01월 24일(水)
‘가장 어두운 때’의 국가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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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논설위원

히틀러 위협 앞 戰時총리 처칠
체임벌린 평화 착시 극복하고
국론 이끌며 對獨 항전서 승리

평화만 앞세워선 北核 못 막아
北·中에는 잘못된 신호 줄 뿐
어떤 대가도 감내 단호함 필요


나라가 어려울 때 영국인들은 윈스턴 처칠을 떠올리고, 미국인들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찾는다. 양국의 역대 지도자 중 유독 처칠과 링컨 관련 책이나 영화가 많은 것은 국가 위기 때 이들이 보여준 통합과 결단의 리더십에 대한 열망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링컨’이 인기를 끌더니, 최근엔 게리 올드먼이 처칠로 출연한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가 국내에서 개봉됐다. 이 시점에서 처칠 리더십이 다시 화두로 떠오른 것은 영·미가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영국은 유럽연합(EU) 탈퇴 찬반 국민투표가 아슬아슬하게 통과된 후 여론이 친(親)EU와 반(反)EU로 쪼개졌다. 테리사 메이 총리의 리더십 부재로 인해 브렉시트 협상도 힘겹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 또한 TV 리얼리티쇼처럼 국정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정치분열이 극심한 상태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1940년 5월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을 침공할 때, 처칠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히틀러와 뮌헨협정을 맺음으로써 평화시대를 열었다고 호언했던 평화론자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으로 신뢰를 잃었다. “평화기에도 무능했던 인물이 전시를 끌 수 없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처칠은 ‘히틀러의 침략 본능을 꿰뚫어본 인물’이라는 평가에 힘입어 전시 총리로 등판했다. 그는 취임연설에서 “내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면서 “우리의 정책은 싸우는 것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치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전시 내각의 주화파들은 처칠의 발목을 잡았다. 에드워드 핼리팩스 외교장관은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압박했고, 히틀러의 영국 침공 위협에 겁먹은 의원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처칠을 몰아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독일과 싸울 것이냐 타협할 것이냐를 놓고 정치권이 쪼개져 있을 때, 처칠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무런 사전 연출 없이, 홀로 지하철을 탄 처칠은 서민들에게 “히틀러와 싸워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지하철의 어린 소녀와 중년 여성, 그리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들도 한결같이 “히틀러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바닥 민심이 결사항전 쪽에 있다는 것을 여러 경로로 확인한 처칠은 의사당으로 가서 “싸우다 패한 나라는 일어서지만, 비겁하게 굴복하면 망한다”는 감동적인 연설을 통해 대독(對獨) 항전 동의를 받아냈다. 평화는 적과의 타협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전쟁 불사 결의를 통해 지켜지는 것이라는 게 처칠의 신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신년사에서 “우리 외교와 국방의 궁극의 목표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을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 정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언급한 것으로,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겠다”는 발언과 통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외교·국방의 궁극 목표가 전쟁 방지라고 말할 때 주변국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당장 주적(主敵)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일본에도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한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는 유약한 나라로 간주될 것이다. 대통령은 취임 때 헌법 제69조에 따라 국가 보위(保衛)를 국민 앞에 선서한다. 외부의 위협에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하겠다는 뜻인 만큼, 최악의 경우 국가 안위를 위해선 처칠처럼 항전의 필요성을 알리고 설득해야 한다.

지난해 대통령 탄핵 후 대선 및 문 정부 출범 등으로 모두 국내문제에 집중해 있을 때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혁신을 했고, 핵탄두 ICBM 실전배치를 눈앞에 두고 있다. 안보 위기는 지난해부터 전대미문의 새 단계로 진입했다. 김정은의 핵·미사일 위협 앞에 대한민국이 처칠 시대 영국 같은 안보 암흑기에 빠져들었는데도 여전히 전쟁 방지가 최종 목표라고 얘기한다는 것은 체임벌린식(式) 평화주의 환상을 파는 것이다. 김정은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대남 유화 공세를 펴고 있다. 핵에 대해선 말도 못하면서 대화만 강조하는 것은 평화 구걸이다. 대한민국에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김정은의 핵 협박과 위장 평화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하는 처칠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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