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전남 진도 하조도의 손가락바위. 이렇게 봐서는 층암이 손가락보다 주먹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아래로 내려가 측면에서 올려다보면 영락없는 손가락 모습이다. 손가락바위 중간에는 바다 쪽으로 뚫린 굴이 있는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사무소가 최근 굴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치우고 위험표지판을 세웠다.
진도 앞바다 鳥島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봄의 기미를 찾아 나선 길이었습니다. 목포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다도해의 섬 조도까지 내려갔습니다. 남쪽에서 더 남쪽으로 길을 이으며 내려갔지만 봄기운은 아직 어디에도 당도하지 않았더군요. 남녘의 섬도 땅은 꽝꽝 얼어붙었고, 난대림의 숲에는 잔설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봄기운에 담아 전하고 싶었던 위로는 허사가 되고 말았지만 그곳에서 만난, 계절을 가리지 않는 훌륭한 풍경과 푸근한 이야기만으로 거기까지 간 보람은 충분했습니다.
# 봄소식을 찾아 남녘 섬으로 가다
전남 진도 앞바다에 ‘조도’가 있다. 진도 역시 섬이니 조도는 섬에서 다시 배로 건너가야 하는 ‘섬 속의 섬’이다. 조도는‘새 조(鳥)’에 ‘섬 도(島)’를 쓴다. ‘새들이 바다 위에 점점이 내려 앉아있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형상을 따서 붙인 지명이 이렇게 딱 들어맞을 수 없다. 조도 주위로 떠 있는 수많은 섬이 마치 새 떼들 같다.
주민들은 그냥 ‘조도’라고 부르지만 이렇게 부르면 헷갈린다. 지도 위에 조도란 섬은 없고 상조도와 하조도가 있다. 두 섬이 연도교로 이어져 있어 이제 같은 섬이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조도라고 하면 때로는 ‘진도군 조도면’을 뜻하기도 한다. 조도면은 진도 서남쪽에 흩뿌려진 섬을 죄다 품고 있다. 진도군이 행정구역을 정하면서 섬이란 섬은 모두 다 조도면에 넘겨준 것이다.
이렇게 조도면이 넘겨받은 섬은 모두 몇 개나 될까. 지도를 펼쳐보면 조도면에 속하는 섬 무리(군도·群島)는 모두 6개다. 가사군도, 차군도, 관매군도, 성남군도…. 여기에 상조군도와 하조군도도 있다. 무리 지은 섬과 독립된 섬을 모두 다 헤아려보면 자그마치 178개에 달한다. 이 중 142개가 무인도이고, 사람이 사는 유인도가 36개다.
사실 해남에서 진도대교를 넘어 진도로, 거기서 또 배를 타고 조도로 건너가 찾아 헤맸던 건 ‘봄의 기운’이었다. 연일 매서운 한파가 계속되고 있지만, 남녘에는 그래도 푸릇한 봄의 기운이 부드러워진 땅을 뚫고 올라오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는데, 이렇게 기다림이 간절하니 봄의 훈기가 얼마나 더 감격적으로 다가올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녘의 섬에도 봄은 ‘아직’ 멀었다. 그래도 남녘 섬에서 그림 같은 다도해 풍경과 섬 안에 깃든 이야기를 만났으니, 봄기운을 느끼지 못했어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섬들을 모두 눈에 담을 수 있는 전남 진도 상조도의 전망대. 도리산 정상의 전화기지국 주변을 빙 둘러 조망 덱을 놓아서 다도해의 경관을 360도로 감상할 수 있다. 200여 년 전 영국함대의 선장이 이 풍경을 보곤 ‘세상의 극치를 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 층암절벽이 우뚝 솟다…손가락바위
조도까지 가는 여객선은 진도의 진도항에서 출항한다. 진도항의 예전 명칭은 팽목항이다. 단번에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그 항구 맞다. 실종자 가족과 유가족들의 안타까운 통곡과 수많은 사람의 눈물과 기원이 깃든 곳. 팽목항은 진도항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름에 깃든 비극의 그림자를 지워버리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오해다. 팽목항의 공식명칭을 진도항으로 바꾼 건 세월호 사고 한 해 전인 2013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마침 물발이 가장 세다는 여덟 물이었다. 항해 내내 급류를 연상케 하는 거친 조류의 물살에 여객선은 휘청거리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진도항에서 출발한 배는 40분 만에 하조도의 창유항에 닿았다. 조도의 중심은 창유항이 있는 하조도다. 상조도보다 인구도 많고 번화했다. 조도면사무소도 여기에 있다. 그래 봐야 육지에다 대면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조도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 2만 명이 넘었다. 지금은 상·하조도를 합친 주민 숫자가 3000명을 조금 넘는다. 한창때는 섬 안에 다방만 9개나 됐다는데, 지금 조도에는 커피숍이 단 한 곳도 없다.
하조도 최고의 명소는 돈대봉의 손가락바위다. 독특한 형상으로 솟은 층암절벽이 빚어내는 풍광이 신비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곳이다. 여객선이 닿는 창유항에서 멀지 않은 산행마을에서 20여 분만 산길을 오르면 손가락바위와 만나게 된다. 보는 각도에 따라 손가락 하나로도 주먹 쥔 손으로도 보이는 바위다. 손가락처럼 보이는 바위를 옆으로 돌아가면 구들장을 만드는 점판암이 떡시루를 쌓아놓은 듯한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이 바위 중간쯤에 동굴이 있다. 바다로 나 있는 반대쪽 동굴 끝이 그대로 액자가 돼 관매도가 떠 있는 바다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빼어난 동굴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동굴로 오를 수 있도록 사다리가 놓여있었는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사무소가 탐방로를 정비하면서 출입금지 표지판을 세우고 사다리를 치워버렸다. 여기까지 갔다면 내친김에 손가락바위를 지나 돈대봉의 주 능선을 타고 정상까지 올라봐도 좋겠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에서는 조도 섬마을의 풍경이며 다도해의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이렇게 주 능선을 다 걷는다 해도 3시간이 채 안 걸린다.
돈대봉 아랫마을에는 지금 수확이 한창인 무와 대파, 봄동 배추가 심어진 밭이 온통 초록의 구릉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조도에서 이런 풍경은 봄이 아니라 겨울의 것이다.
남녘 섬에서 봄은 밭두둑이나 빈 논의 논두렁에서 아지랑이와 함께 번져가는 작은 봄꽃들의 개화로 시작한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남녘의 섬은 봄기운을 품은 공기부터 달랐는데, 어찌 된 일인지 올해는 봄꽃은 고사하고 겨울부터 피고 지는 동백마저 침묵이다. 동백은 일찍 핀 꽃이 얼어떨어진 뒤 아예 꽃망울도 없다. 얼어서 서걱거리는 땅을 이틀 동안 뒤져서 양지바른 쪽에서 겨우 보라색 개불알풀꽃 더미 두 개를 보았을 따름이었다. 조도에는 집집 마다 그물을 덮어 쑥을 키우는데, 쑥도 수확이 예년 같지 않다. 조도에 쑥이 처음 나면 뒤이어 거문도에서 쑥이 머리를 내밀 때까지 쏠쏠한 ‘독점 수입’이 된다는 데, 날이 추워 수확이 늦어지면서 마을주민들은 애가 탄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진도항에서 하조도의 창유항을 잇는 여객선 새섬두레호. 진도군과 서진도 농협이 절반씩 돈을 보태 건조해서 지난해 8월부터 운항을 시작한 562t의 최신식 차도선형 여객선이다.
# 다도해…말을 잊게 하는 풍경
상조도로 가는 길. 하조도에서 상조도로 건너가는 연도교인 조도대교 중간쯤에서 차를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섬 주민들은 이쯤에서 고개를 돌려 돈대봉의 손가락바위를 보면 주변의 암봉과 어우러져 ‘임신한 아녀자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니 그런 듯도 했지만, 무릎을 칠 정도는 아니다. 잇단 채근에 ‘그렇다’고는 했지만 말이다.
조도에는 이른바 ‘홍도식’ 관광 포인트가 곳곳에 있다. 기암괴석이 많은 전남 신안의 홍도에서 유람선을 타면 마이크를 잡은 선장이 능수능란한 입담으로 바위의 형상을 갖가지 사물에다 비교하곤 하는데, 조도에 그런 식의 설명이 따라붙는 곳들이 많다는 얘기다. 홍도에는 심지어 ‘콜라병’ 바위도 있다. 그것도 ‘코카콜라’ 브랜드의 콜라병이다. 홍도만큼은 아니지만 조도 역시 일대의 섬이나 해안의 바위를 놓고 ‘거북이가 목을 빼고 있는 모습’이거나 ‘오리가 헤엄치며 막 발을 디딘 형상’이라는 설명 등이 한 보따리다.
사실 풍경을 가리키는 주민의 손가락 끝에 온정신을 집중하고,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다 해도 이런 설명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억지 같기도 하고, 촌스러운 것 같기도 해서다. 사실 한 세대 전쯤 내로라하던 관광지, 그중에서도 섬이나 해안 절경이 내세우는 건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자연이 스스로 가치가 아니라, 조각처럼 무엇을 꼭 빼닮아야만 훌륭한 풍경이었던 시절의 얘기다.
이런 비유 없이도 상조도와 하조도를 통틀어 최고의 명소로 일컬을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상조도 전망대다. 전망대는 조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상조도의 도리산 정상에 있다. 산 정상이라지만, 전망대를 설치하면서 포장도로를 놓아 차로 쉽게 오를 수 있다.
도리산 정상에는 전화 기지국을 빙 돌아 사방팔방을 다 볼 수 있도록 나무 덱을 설치해 놓았는데, 나무 덱으로 놓은 이 길 전체가 전망대다. 여기에 올라서기 전에 미리 찬탄과 감탄의 문장을 생각해두자. 전망대에서 경관을 보는 순간, 이합집산하는 섬의 모습을 보며 그만 말을 잊을 것이니 말이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사방팔방으로 펼쳐지는 시야의 규모도 어마어마하지만, 쪽빛 바다의 멀고 가까운 자리에 수묵화처럼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의 운치 앞에서는 탄성만 나왔다.
# 영국함대 선장이 말한 ‘세상의 극치’
조도 일대의 다도해의 경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200여 년 전 이 섬을 찾아왔던 영국함대 얘기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인 1816년 9월. 영국함대 소속 두 척의 선박이 상조도에 정박했다. 선두에 선 235t짜리 배 리라호가 먼저 닻을 내리자 뒤따라 그 배의 4배쯤 되는 1101t 거함 알세스트호가 들어왔다. 이 두 척의 영국함대 선박의 본래 임무는 동인도 회사 상업보호를 위해 중국에 사절단으로 파견하는 애머스트경 일행을 중국 땅에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브라질을 경유하는 6개월 동안의 긴 항해 끝에 중국 웨이하이(威海)에 도착해 임무를 무사히 마친 두 선박은 ‘조선을 탐사하라’는 영국 정부의 훈령을 받고 서해안을 따라 진도까지 내려온 길이었다.
이들은 상조도에서 닻을 내리고, 일대를 정탐하고자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그곳이 바로 지금 전망대가 설치된 도리산이었다. 호위함 리라호를 이끌던 선장 바실 홀은 도리산 정상에서 본 다도해의 빼어난 경관에 깜짝 놀랐다. 탐사를 위해 조도 군도에 점점이 떠 있는 섬을 135개까지 헤아리던 홀 선장은 이 일대의 경관을 두고 ‘세상의 극치’라고 외쳤다고 했다. 식민지 시대에 전 세계를 항해하며 잔뼈가 굵은 영국 함대의 선장이 ‘지상 최고의 풍경’이라고 치켜세웠을 정도니 조도 일대의 경관은 가히 ‘세계적’이라 할 만하다. 홀 선장의 조도 얘기는 일본 오키나와(沖繩) 일대까지 탐사해서 1818년 영국 런던에서 펴낸 ‘조선 서해안과 류큐섬 탐색항해 전말서’란 책에 기록돼 전한다.
첨언하자면 홀 선장의 영국함대는 이곳 조도에 당도하기 전, 충남 서천의 마량 앞바다에도 닻을 내렸다. 홀 선장은 마량에서 지금으로 치면 군수격인 현감 벼슬의 조선 관료와 해군부대 사단장 격인 수군 대장과 만나 정중하게 우호적인 교류를 나눴다. 이때 선장은 현감에게 성경책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게 조선 땅에 전해진 최초의 성경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량항에는 성경전래지기념관이 세워졌다. 기념관에는 당시 현감이 받았던 성경책과 똑같은 판본의 1611년 발간된 킹 제임스 성경이 전시돼있다. 기념관 측이 미국의 한 박물관에서 자그마치 3억 원에 사 온 것이다.
# 등대와 배구…섬에 깃든 얘기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하조도 동단의 등대. 등대는 1909년 처음 불빛을 밝혔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조도 등대 관리를 총괄하는 직함의 정식 명칭은 항로표지관리소장이다. 과거에는 ‘등대장’이라고 썼지만, 등대의 공식명칭이 ‘항로표지관리소’로 바뀌면서 직함도 바뀌었다. 여담이지만 하조도 등대를 지키고 있는 항로표지관리소장의 키가 자그마치 192.5㎝. 섬 주민 중 최장신이다. 이전까지는 조도의 연합공소에서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주말마다 여객선을 타고 조도에 오는 신부님이 기록을 갖고 있었다는데, 이 신부님의 키가 190㎝다.
조도 출신 중에서 큰 키와 빼어난 운동 실력으로 작은 섬 조도의 이름을 널리 알렸던 이가 있었다. 1960년대 초·중반 배구계를 주름잡던 국가대표 고 박서광 선수다. 육군팀과 대한중공업, 호남비료 등의 실업팀에서 뛰던 그는 배구계의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다. 그의 신장은 185㎝에 달했다. 지금이야 그리 크지 않은 키지만, 당시만 해도 상대방의 블로킹 한 뼘 위에서 스파이크를 꽂아넣던 최장신 주전 공격수였다.
작은 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가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대표의 주축이 됐으니 섬 주민들은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그는 조도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뛰던 코트에서 그는 잊혔다. 2013년 작고했을 때 그의 빈소를 찾은 배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배구협회에서도 장례가 끝난 뒤 화환 하나만 보내왔을 뿐이었다.
조도 주민들은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 있다. 조도에서는 해마다 8월 15일이면 마을대항 배구대회가 열린다. 박 선수의 가족들이 모두 육지로 이사한 지금까지도 배구대회는 계속되고 있다. 섬 안에 그를 위한 작은 흉상이나 소박한 기념관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박 선수가 활약했던 때가 모두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등대전시관 한쪽에 누군가 붙여둔 박 선수의 사진 한 장에서 가난했고, 소외됐던 먼바다의 섬사람들에게 그가 주었을 위안을 생각한다.
조도(진도)=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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