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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8년 02월 27일(火)
자연에 이입된 ‘색채감정’… 그림은 풍경의 詩이자 詩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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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밀한 고요 속에 자연과 인간, 풍경과 내면의 어울림을 보여주는 코로의 작품 ‘고독, 비겐의 회상’ 자료사진

■ 문광훈의 미학 에세이 - ⑭ 코로 그림의 시적 정취

코로의 색은 단순 장식 아닌
강렬한 감정이입의 결과물

풍경화를 보며 느끼는 정서는
자연과 내면서 조응하는 감정

색채로 표현된 감정 묘사는
분출 아닌 완화·제어된 형태
격정에 차 있기보다 부드러워
독특한 시적 분위기 만들어내

풍경화 ‘고독, 비겐의 회상’
고요한 그림서 느끼는 평온함

자연과 내면이 일치되는 경험
그림이 주는 위로 ‘시적 고양’


나는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그림을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그루 큰 나무가 있는 초원’(1865∼1870)과 ‘고독, 비겐의 회상’(1866), ‘쿠브롱의 추억’(1872) 같은 그림들을 특히 좋아한다.

# 색채감정

코로에게 색채는 장식용이 아니라 자연에 상응하는 내면의 반응이다. 그래서 그가 그린 색채 하나하나에는 잔잔하고 정감에 찬 감정이 배어 있다. 그러니 그의 그림은 강렬한 감정이입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곧 ‘색채감정’이다. 색채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감정이다. 화가의 색상은 그 자체로 감정의 표현이다.

자연이 보여주는 풍경에서건, 이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건, 우리가 만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감정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적어도 그곳이 우리의 마음에 드는 곳이라면, 산이든 들이든, 강이든 바다든, 거기로 가고 싶은, 거기로 가 그곳에 머물고 싶은 내밀한 충동을 드러내고, 그곳을 보며 거기에 살고 싶은 숨은 마음의 표현이다. 자연에의 그리움에는 자연을 향한 감정의 그리움 - 어떤 감정을 느끼고 그렇게 느낀 것을 현실에서 확인하고픈 욕구가 자리한다. 이것을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자아의 원천들’에서 이렇게 적는다.

“우리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자연이 우리 안에 있는 강력하고 고상한 감정들, 이를테면 창조의 위대함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 목가적 풍경 앞에서 느끼는 평화의 감정, 폭풍과 내버려진 요새 앞에서 느끼는 숭고함의 감정, 그리고 어떤 외로운 삼림 지역에서 갖게 되는 우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에 끌리는 이유는 자연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 감정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자연은 우리가 이미 느낀 감정을 되비추고 강화하거나 잠들어 있는 감정을 일깨울 수 있다. 자연은 우리의 가장 드높은 감정이 연주될 수 있는 거대한 키보드와도 같다. 우리가 음악으로 향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일깨우고 강화하기 위해 자연으로 향한다.”

테일러는 근대적 인간의 자연적 감정과, 이런 감정에 내포된 도덕적 의미를 서술했지만 자연 풍경을 담은 회화의 의미를 생각할 때도 어느 정도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의 지적대로 자연이 우리 안에 자리한 이런저런 감정들 - ‘경외감’과 ‘평화의 감정’ 그리고 ‘숭고한 감정’과 ‘우울한 감정’을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리적 풍경을 감상하면서, 이런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마음속의 ‘강력하고 고상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풍경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풍경화에서 보는 것은 물론 풍경화에 담긴 자연이지만, 이 자연은 나와 무관한 물리적 현상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깊은 의미에서 나의 느낌과 정서에 ‘조응하는’ 무엇이다. 그림이 주는 인상이 깊으면 깊을수록, 화가의 그림과 독자의 감정 사이의 조응 정도는 높아진다. 내가 어떤 그림에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 그림의 풍경이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문을 남기기 때문이다.

자연은 감정의 거대한 키보드이고 놀라운 반향판이다. 결국 우리가 자연을 찾는 것도, 이런 자연을 묘사한 풍경화를 좋아하는 것도 마음속에 있는 평화와 숭고, 우울과 경외를 새롭게 느끼기 위해서다. 우리는 마음을 모른다. 마음에 깃든 감정도 잘 알지 못한다. 마음은 미지의 광산 혹은 쓸쓸하게 남겨진 유적지와도 같다. 그래서 그것은 부단히 탐사되고 발굴돼야 한다. 그렇다면 예술 경험의 의미도 바로 여기 - ‘드높은 감정의 재발견’에 있다. 코로 그림의 시적 정취는 영혼의 이 같은 갈망을 채워주는 데 있다.



# 제어된 열정

그러나 코로의 그림에서 색채감정을 말할 때, 이 감정이 있는 그대로 표출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격렬한 감정의 직접적 분출이라기보다는 완화된 형태이고, 그래서 어느 정도 ‘제어된 채’ 자리한다고 할 수 있다. 한스 하인츠 홀츠는 이렇게 썼다. “코로에게 영감을 준 것은 들라크루아의 열정적인 몸짓도 아니었고, 앵그르의 조각상 같은 파토스도 아니었다. 그것은 양지바른 자연 앞에서 갖는 느낌의 균형이었다. 코로의 작품은 어떤 방해받지 않은 조화의 모사인데, 이 조화 속에서 흥분은 제자리도 없는 채 있고, 감정은 그저 완화된 강렬성으로만 표현된다.”

코로의 회화 작품에 어울리는 형용사가 있다면, ‘정열적’이거나 ‘조각상 같은’ 것이 아니라, 홀츠가 정확하게 지적하였듯이, ‘양지바른’이나 ‘방해받지 않는’ 혹은 ‘완화된’과 같은 단어들일 것이다. 이런 형용사들에 그의 풍경화에 깃든 많은 비밀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의 정열은 ‘완화된 파토스’다. 그것은 격정에 찬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래서 그만큼 여성적이다. 그것은 개별 대상의 독자적인 특성으로 두드러지기보다는 전체에 녹아들고 스며든 분위기로서 주로 나타난다. 코로의 풍경화를 회화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이 같은 시적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쓸 수 있다. 코로의 풍경화에서 그림과 시(詩)는 하나로 만난다고. 그의 그림은 풍경의 시이자 시의 풍경이다. 그림 풍경이 하나의 시라면, 그것은 이 그림 풍경에 자연의 풍경이 녹아 있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자연의 물리적 풍경과 이 물리적 풍경을 바라보는 화가의 내면 풍경이 서로 어우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드높은 감정의 표현이고, 이 높은 감정에 단순히 감정만 아니라 이데아도 녹아 있다면, 최고의 예술 상태는 자연의 외면 풍경과 화가의 내면 풍경이 일치를 이루는 상태 - 하나의 이데아적 상태가 될 것이다. 풍경의 시란 자연의 물리와 화가의 심리가 드높은 수준에서 하나로 융합하는 상태가 될 것이고, 이 하나 된 상태를 우리는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음악의 화음이나 율동 혹은 리듬도 이 고양된 일치에서 울려나올 것이다. 예술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동’이란 것도 이런 일치의 경험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그러나 코로의 색채가 부드럽다고 해서 그 열정이 무기력한 것은 아니다. 그의 정열은 고통을 표출하기보다는 견디고 감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수동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수동성 속에서 그것은 슬픔을 이겨낸다. 그 점에서 적극적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수동적 능동성 아래 그 한계를 지양한다고나 할까? 감정의 더 높은 균형은 이런 한계의 지양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고독, 비겐의 회상’(1866)을 살펴보자.


▲  코로의 ‘두 그루의 큰 나무가 있는 초원’. 이 역시 시적인 것의 경험을 공유하게 한다.

# 시적 고양

‘고독, 비겐의 회상’의 중앙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자세히 보면 한 그루가 아니라 두 그루다. 오른쪽에 붙은 나무가 자작인 듯 껍질이 희기 때문에 한 그루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나무의 발치에 한 여인이 앉아 있다. 이렇게 앉은 채로 그녀는 그 너머 - 강인 듯 호수인 듯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앉아 있는 두 그루 나무의 왼편으로 큰 수풀이 놓여 있고, 오른쪽으로도 나무와 수풀이 자리한다. 코로는 이 같은 구도의 정경을 무척 좋아한 듯하다.

풍경화 ‘고독, 비겐의 회상’에 흐르는 주된 정조는 어떤 내밀함일 것이다. 여인이 앉아 있는 나무 주변에는 바람이 일지 않는다. 그래서 지극히 고요하고 한적해 보인다. 이런 고요에 거울처럼 반듯한 수면의 잔잔함이 화응한다. 여기에는 물살이나 파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가 느끼는 마음의 평온함은 이런 물리적 고요에 대응하는 인간 심성의 이름일 것이다. 이 고요와 평온 덕분에 그림 속 그녀는 ‘고독’ 속에서 지난날을 ‘회상’할 수 있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 좀 더 조용해지고, 조용함 속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회상 속에서 마침내 평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고요와 고독, 회상과 평온은 의미론적 친족 관계에 있다. 고요의 동의어는 고독이고 회상이며 평온일지도 모른다.

이 내밀한 고요 속에서 우리는 자연과 인간, 풍경과 내면이 어울림을 느낀다. 이 어울림은 풍경에 스며든 평화를 관조하는 데서 올 것이다. 자연은 더없이 아늑한 풍경을 펼쳐 보이고, 여인은 이 풍경을 말없이 바라본다. 어슴푸레한 분위기 때문에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가까이 선 나무와 멀리 있는 대상은 분리된 것 같지 않다. 차라리 이 둘은 하나로 만나는 듯하다. 하늘과 지평선은 공간적 깊이 속에서 서로 뒤섞인다. 이런 공간 속의 사람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하여 코로의 회화 공간에서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기보다는 이 행동을 멈춘다. 행동할 때에도 그것은 조용하고 내밀하여,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수면을 바라보는 여인의 옆모습이 그러하듯이, 그려진 풍경의 일부로서 이 풍경 자체가 돼버린 듯하다. 그림 속의 평온은 이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을 바라보는 나 또한 이 풍경 속으로 스미는 듯하다. 그렇게 들어가 관조에 잠긴 이 여인처럼, 이 여인의 곁에 앉아 자연의 평온과 휴식을 누리고 싶다. 하나의 관조는 또 다른 관조를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관조가 그림에 의해 유발되는 한, ‘예술적’이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는 한 ‘심미적’이다. 심미적 관조는 근본적으로 시적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드높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코로 회화의 독창성은 아마도 심미적 관조의 이 시적 호소력에 있을 것이다.

코로의 그림에서 모든 것은 조용하고 내밀하면서도 풍성하게 느껴진다. 나무든 강이든, 사람이든 빛이든, 자연의 모든 정경은 더없이 평화롭다. 그림의 서정적 성격은 이 평온함으로부터 올 것이다. 이 평온한 풍경에 힘입어 우리 감정도 평온해진다. 평온함 때문에 나무와 잎은 정겹기 그지없고, 관조하는 여인의 모습은 우아하며, 자연의 풍경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코로의 그림에서 우리가 위안을 얻는 것은 사물의 이 시적 정경과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분위기는 물론 자연의 세부에 조응하는 화가의 섬세한 감정이입 덕분일 것이다. 이 감정이입이 코로 특유의 색채감정을 낳았을 것이다. 이 색채감정의 효과를 나는 ‘시적 고양’이라고 부르고 싶다.

시적 고양의 메커니즘을 좀 더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시적인 것의 가치는 단순히 감정적·정서적 자극에 있지 않다. 감정의 내용은 그 자체로 파악되기보다는 어떤 틀 안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 틀을 만드는 것, 그것이 ‘형식화’다. 시적 감정은 형식화를 통해 파악되고, 그러면서 점차 객관화된다. 그리하여 형식화란 감정의 이성화 혹은 주관의 객관화에 다름 아니다. 감정의 거친 내용이 의미의 더 일관되고 유기적인 질서로 변모하는 것은 이런 여과·추출의 과정을 통해서다.



# 고요와 평화와 서정의 음미

이런 식으로 우리가 느낀 것은 객관화·의미화·형상화·형식화를 통해 감각적·본능적 차원으로부터 정신적 의미의 세계로, 그래서 더 높은 이데아적 질서로 나아간다.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물론 이성 때문이다. 부단히 반성하면서 지금 여기로부터 좀 더 나은 차원 - 좀 더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상태로 ‘상승적으로 이동해 가는’ 것이다. 고양이란 이 상승적 이동과 다르지 않다. 삶이 변할 수 있는 것은 예술 경험의 이런 상승적 이동 속에서일 것이다. 이 상승적 반성운동이 없다면, 예술 경험은 무의미할 것이다.

코로가 보여주는 세계 - 빛과 색채와 공기의 놀이 속에서 자연 풍경을 관조하는 모습, 그리고 그 그림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관조하게 한다. 관조는 관조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시의 마음을 고양한다. 고요한 마음은 비굴하거나 교만할 수 없다. 그것은 대상을 거리감 속에서 살펴보기 때문이다. 마음은 심미적 관조 아래 자연의 풍경과 이 풍경의 고요를 차츰 닮아간다. 우리의 눈이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에 표현된 풍경의 고요에서 마음의 고요를 느껴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심미적이다.

그러므로 코로의 풍경화를 본다는 것은 시적인 것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고요를 느끼고 평화를 누리며 서정을 음미한다. 이것이 시적 향유다. 시적인 것은 그의 그림에도 있고, 이 그림을 바라보는 주체의 마음에도 있다. 마음은 마음을 부른다. 그러면서 이 마음의 원천은 어디까지나 그림이다. 이러한 향유의 원천은 그림 속 인물의 관조적 시선에서 올 것이다. 관조는 사물과 사물의 너머로 나아가고, 이 가시적인 것 속에서 비가시적 차원을 포괄한다. 그리하여 그림 속 그녀는 잔잔한 물의 수면과 숲의 평화 그리고 그 너머 대기의 알 수 없는 침묵까지 누린다. 이 관조적 향유 속에서 그녀와 숲과 나무와 물과 공기, 그리고 정신은 하나로 만날 것이다. 관조적 시선 아래 사람과 자연, 인간의 느낌과 세계의 미지는 서로 어울린다.

고요와 평화와 서정을 ‘더불어 숨 쉬는’ 것, 이 내밀한 감정의 말 없는 공동체험이야말로 코로의 그림이 주는 가장 큰 위로일 것이다. 이 평정한 마음은 단순히 안락을 구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사물에 주의하고 주변을 검토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거리 두기의 반성 의식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거리감 덕분에 코로는 사회정치적 현실의 혼란으로부터 물러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유행이나 예술적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오직 자기 세계의 구축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화일보 2월 6일자 25면 13 회 참조)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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