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核동결→제재 완화→폐기’는 속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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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역설법이라는 표현이 있다. 언뜻 보면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뜨거운 얼음’이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분명하게 모순돼 있거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을 빗대는 용어다. 최근 역설법이 한반도 국제정치에도 등장했다. ‘핵(核) 있는 평화’다. 북한이 핵을 보유해도 한반도에 평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한국이 북핵을 가슴에 안고 살아도 동족이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남한 김영철 북한 통전부장에게 지난 25일 ‘동결(凍結)→폐기’라는 2단계 비핵화 해법을 직접 설명했다고 한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중단하고 비핵화 대화에 나올 경우 미국 등 국제사회가 단계별 상응 조치를 협의해 나가겠다는 방안이다. 핵 동결을 비핵화의 입구로 간주하고 핵 폐기를 출구로 분리해서 대응한다는 복안이다.

2단계 해법 논리라면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중단으로 미·북 대화가 시작되면 동시에 남북 교류·지원의 확대를 ‘협상의 입구’로 상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북측은 유엔 제재 해제, 한·미 연합훈련과 대북 확성기 등 심리전 중단을 요구하고 나올 게 분명하다. 김영철은 주변 4강을 참여시키는 비핵화 국제 논의를 제안했다고 한다. 과거 1·2차 핵실험 이후 핵무력 완성을 위한 시간 벌기용으로 참가했던 6자회담 카드를 교묘히 끄집어낸 것이다.

이번 핵 있는 평화론(nuclear peace)의 출처는 평양이다. 이 논리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비핵화 압박을 받을 때마다 활용하는 간조기(干潮期) 미소전략(smile strategy)이다. 자위력 수단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일시적 유화 전략이다. 북한은 2006년 첫 핵실험 이후 지난해 6차 실험으로 핵의 경량화·소형화·다종화 등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모든 핵보유국의 로드맵대로 수소탄 실험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20기 이상의 핵무기 보유를 넘어 운반 수단인 장거리미사일(ICBM)의 발사 실험을 진행 중이다.

실전 배치가 임박했는데도 북핵을 가상현실 무기로만 판단한다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격이다. 기존 핵 보유를 인정하고 남북관계를 광범위하게 확대하면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완화되면 2단계로 북한의 비핵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논리는 전제와 가정이 잘못된 역설이다. 이란이 비핵화 협상에 나온 것은 이스라엘의 요구로 미국이 4년간 진행한 경제 봉쇄의 냉엄한 결과다.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겨우 틀을 잡고 나가는 임계점에서 북핵 동결 주장은 이란 핵 협상에서 어떤 교훈도 학습하지 않겠다는 무지몽매한 자세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핵보유국’이라는 북한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미래 대화의 근간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은의 신년사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과정에는 핵 보유를 정당화하는 ‘북핵 평화론’이 작동했다. 김여정의 친서 전달이나 김영철 방남의 기저에는 ‘핵 보유 민족공존’ 논리가 내재해 있다. 북한이 핵을 가져도 한반도 평화가 유지된다는 위장 논리가 북한의 응원단과 예술단이 전개하는 립스틱 외교에 의해 희석되고 있다.

평양이 진정성 있는 비핵화 의지를 갖지 못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중에는 이란식의 최대한 제재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서울은 북한이 비핵화 결심을 하는 데 혼선을 야기해선 안 된다. 청와대는 운전자론으로 미·북 간 적극적인 중재는 할 수 있지만 비핵화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시켜야 한다. 잘못하면 차량이 탈선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