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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효정의 에로틱 시네마 게재 일자 : 2018년 03월 06일(火)
암살 대상 親日派와 치명적 사랑…혁명 아닌 남자를 선택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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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 계

혁명의 일원이 되는 순간 목숨의 안위가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역사의 곳곳에 묻힌 수많은 고귀한 생명이 그렇게 혁명을 통해 자유와 독립을 쟁취했다. 지난 2007년 개봉한 리안(李安) 감독의 ‘색, 계’(사진)는 일본의 중국 침략 시기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젊은 여대생 왕지아즈(탕웨이)의 이야기를 다뤘다. 혁명에 참여했던 왕지아즈도 혁명의 시기에 희생된 한 인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을 건 희생으로 그가 구하고자 한 것은 독립이 아닌 사랑이었다.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왕지아즈는 연극부에서 활동하다가 뜻이 맞는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해 사살하는 친일파 정보부대장 이(량차오웨이)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왕지아즈는 암살 계획의 핵심 인물로, 홍콩 무역상의 아내 맥 부인으로 위장하고 이의 부인이 주도하는 사교모임을 통해 이에게 접근한다. 폭력과 고문을 일삼는 냉혈한인 이를 유혹해서 암살하는 것이 왕지아즈의 임무다.

빨강 립스틱과 매니큐어를 바른 왕지아즈가 자신의 부인과 마작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는 왕지아즈를 향한 시선을 접지 못한다. 이는 이제 막 소녀의 티를 벗은 왕지아즈의 젊음과 미모의 덫을 문다. 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왕지아즈에게 몰래 운전사를 보내 호텔로 오게 한다. 떠들썩한 상하이(上海)의 한구석 호텔 방에서 그들은 혁명만큼이나 뜨거운 정사를 벌인다.

▲  김효정 영화평론가
권력의 노예가 돼 나라를 배신한 이는 왕지아즈와의 첫 잠자리에서도 자신의 폭력성과 뻔뻔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는 상대도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왕지아즈가 걸치고 있던 옷과 액세서리를 갈가리 찢고 사랑을 나눌 때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짓밟는다. 그렇게 처참한 정사가 끝나고 왕지아즈는 혼자 남겨진 침대 위에서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 낸다.

그 이후로 이는 틈만 나면 왕지아즈를 호텔로 불러낸다. 짐승처럼 왕지아즈를 취했던 이였지만 그는 점점 여자에게 마음을 연다. 놀라운 것은 자신의 동지들을 고문했던 배신자이자 암살 목표인 이에게 왕지아즈도 서서히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가 침대 안으로 들어올 때면 어느새 화장이 모두 지워진 왕지아즈의 얼굴에 홍조가 번진다. 그런 왕지아즈를 바라보는 이의 희미한 미소를 보면서 혁명을 위한 희생으로 내걸었던 왕지아즈의 몸은 매일 밤 배신자를 안고 싶어 안달이 나는 몸으로 변해간다.

사랑인지 위장인지 모를 위험천만한 감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던 즈음, 이는 왕지아즈에게 고가의 분홍색 다이아몬드를 선물한다. 보석의 미색(美色) 때문일까, 아니면 이젠 너무나도 커져 버린 남자를 향한 사랑 때문일까. 왕지아즈는 불안함으로, 그러면서도 묘하게 자신을 잡아끄는 설렘으로 밤낮을 고뇌한다.

결국 이의 암살 날짜가 정해진다. 몇 년에 걸쳐 진행되어 온 왕지아즈의 위장 임무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여자는 남자를 선택한다. 자신에게 반지를 끼워주려던 이에게 도망치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생포된 여자는 이에 의해 숙청된다.

결국 이들의 혁명은 실패했다. 그러나 영화는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을 보상하지 못하고 실패한 혁명에 대해 죄를 묻지 않는다. 대신 157분에 걸친 대 서사극에서 그려지는 혼란의 시대는 남녀가 섞이는 순간의 치명적임과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이들의 경계를 처연하게 바라본다. 특히 량차오웨이(梁朝偉)와 탕웨이(湯唯)의 뛰어난 시선 연기는 이와 왕지아즈가 만나 서서히 서로의 경계를 넘어가는 과정을, 혁명과 사랑 그 불안한 언저리를 섬뜩할 정도로 섬세하게 전달한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사실적인 정사 장면이 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혁명 대신 사랑을 택한 여성이 치러야 했던 비극적인 대가에 대한 시대적 응시로 가득한 작품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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