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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게재 일자 : 2018년 03월 09일(金)
‘굴욕 통한 北변화’는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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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돈재 前 국가정보원 1차장

평창동계올림픽 전후로 문재인 정부의 대북(對北) 행보를 보면 시곗바늘이 지난 2000년 6월 제1차 남북 정상회담에 멈춘 것 같다. 특사단 방문으로 북핵(北核) 문제가 곧 해결될 것처럼 흥분하는 것도 그렇고, 김정은을 ‘식견 있는 지도자’로 치켜세우는 모습 또한 그렇다.

정부는 이번에 김정은이 통 큰 양보를 했고 특사단 방북이 큰 성과를 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18년 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날 가능성이 크고, 핫라인을 설치해도 수틀릴 때 끊어 버리면 그만이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유훈을 들먹이며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면서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지만, 우리 국민을 속이고 핵 개발 책임을 미국에 떠넘기는 아주 오래된 선전술에 불과하다.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남측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을 사람은 더욱 없다. 한·미 연합훈련을 양해했다고 하지만 양해하든 말든 양국은 훈련을 할 것이니 북한으로서는 손해 본 게 없다. 이렇게 북한은 자기들 수순대로 ‘꽃놀이패’를 즐기는데 우리는 또 흥분하고 있다.

이번 남북 간의 특사 교환 과정을 보면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북한 대표단에 대한 과공(過恭)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족의 원흉 김일성 손녀의 방문을 ‘백두혈통’의 최초 방문이라고 치켜세웠다. 문 대통령은 평창올림픽 공식 행사에서 북한 간첩 신영복을 ‘존경하는 사상가’로 칭송하면서 신영복의 서화 앞에서 김여정과 사진을 찍었다. “문 씨 중에 애국자가 많다”는 말도 안 되는 김영남의 얘기를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홍보까지 해주었다. 통일부 장관은 북한 공연단의 공연에 세 번이나 앙코르를 외쳤다. 간첩 잡던 국가정보원 요원이 현송월을 위해 우산을 받쳤다.

우리 방북사절단의 모습은 더욱 참담하다. 우리 최고 엘리트 고위관리들이 38세나 아래인 애송이에게 예를 다했다. 악수할 때는 꼭 두 번씩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건배할 때에는 하나같이 공손하게 앞섶을 여몄다. 김정은은 양팔을 떡 벌리고 앉았는데 우리 수석대표는 공손하게 일어서서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모두가 ‘김정은 말씀’을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선 시대 조공 사절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 백미는 김정은에 대한 평가다. 박학다식하고, 솔직·대담하고, 여유 있고, 배려심 있고, 예의 바르고, 철두철미한 지도자란다. 김정일을 ‘식견 있는 지도자’라고 한 김대중 대통령의 헌사(獻辭)는 비교도 안 된다. 김정은이 녹록지 않은 상대임을 알리는 내부평가를 나무랄 이유는 없다. 그러나 고모부와 이복형을 잔인하게 살해한 살인자를 우리가 나서 ‘배려심 있는 지도자’로 세계 무대에 데뷔시켜 줬으니 할 말이 없다.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충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세계가 칭송하는 국내총생산(GDP) 세계 11위의 자유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최고위 관리가 180위의 가난한 병영국가의 잔인한 세습 독재자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국민은 분통이 터진다.

국격(國格)과 국가 위신은 주권 국가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다. 과거 서독은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중시하면서도 결코 ‘구걸’한 적이 없다. 눈앞의 편리나 이익을 위해 국가 위신을 소홀히 한다면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없고 나라와 국민이 천대를 받게 된다. ‘굴욕’을 통해서는 한반도의 평화도, 북한의 변화도, 통일도 이룰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굴욕적 모습은 김정은이 북한 주민을 기만하고 억압하는 데 특히 좋은 소재가 된다. 많이 조심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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