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서부 지역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5번 도로와 그 옆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샌와킨 밸리 대평원. 소설에는 캘리포니아 지역의 주요 도로가 자주 등장한다. 여로형 소설인 ‘깊고 푸른 밤’에서 도로는 주요한 공간이다.
최인호 소설 ‘깊고 푸른 밤’의 배경 미국 캘리포니아
시대억압에 고통받던 주인공
미국 곳곳 떠돌며 여행하지만
불안속 어정쩡한 이방인 신세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장소
캘리포니아 주요 도로들 등장
자동차 창문 통한 겉핥기 체험
도시에 대한 표면적 이해 그쳐
끝내 자유·안정감 찾기도 실패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바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 선택
낯선 곳에서 힘든 체험 통해
결국 고국에 대한 애정 회복
최인호의 소설 ‘깊고 푸른 밤’(‘문예중앙’, 1982년 봄호)은 해외여행 자체가 드물던 1980년대 초에 특이하게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제6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문제작이다. 동명의 작품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최인호 자신이 미국을 배경으로 각본을 썼으나 내용은 소설과 크게 다르다.
미국은 지구에서 가장 큰 바다인 태평양을 건너야 가닿을 수 있는 나라로, 우리와는 낮과 밤이 반대인 멀고 먼 나라다. 그럼에도 미국은 한국 현대문학의 첫 장면에서부터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최초의 신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이인직의 ‘혈의 누’(1906)에서 주요 인물들은 모두 미국으로 향한다. 청일전쟁 중 부모와 헤어진 어린 옥련은 일본에서 만난 구완서와 화성돈(지금의 워싱턴DC)에 가서 학업에 정진하며, 옥련의 아버지 김관일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옥련과 재회한다. 최초의 근대장편소설인 이광수의 ‘무정’(1917)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여러 가지 젊음의 갈등을 겪던 ‘무정’의 형식, 선형, 영채, 병욱은 기차에서 조우하는데, 이들도 모두 해외로 유학을 가는 길이다. 이때 형식과 선형이 과학과 지식을 얻기 위해 선택한 곳이 바로 미국의 시카고대학이다. ‘혈의 누’와 ‘무정’에 등장하는 젊은 주인공들의 행로에서 알 수 있듯이, 20세기 초입부터 한국인의 심상지리 속에 미국은 선진 근대문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서 미국은 하나의 추상적 기호로, 작품의 구체적인 배경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지향점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와 달리 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에서는 서사의 전부가 미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 작품의 ‘그’는 분노 때문에 한국을 떠나 미국을 여행하고 있으며, 그와 동행하는 고교 후배 준호는 한때 유명 가수였으나 대마초 사건으로 몰락해 미국으로 건너온 후 불법체류자가 돼 간다. ‘깊고 푸른 밤’은 사람들이 ‘궁정동 파티’를 이야기하는 1970년대 후반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준호와 그가 한국을 떠난 이유는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준호와 그가 미국으로 간 이유는 한국이 자유와 안정감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준호는 한국에서 대마초를 피웠다가 사회적 여론의 재갈이 물린 채 격리됐으며, 작가인 그는 자신이 쓰는 모든 소설에도 분노하고 심지어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그 모든 것에 분노”를 느끼다가 미국에 간다. 준호는 한국에서 자유의 조그만 숨구멍도 느낄 수 없었으며, “지난 10여 년 동안 한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혹사”하며 글을 써온 그의 분노 속에도 시대적 억압이 드리워져 있다.
소설은 그와 준호가 로스앤젤레스(LA)를 출발해 데스 밸리와 요세미티 등을 거쳐 1주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산호세의 교민 집에 들러 하루를 머물고 그다음 날 깨어나 LA까지 가는 대략 하루 동안의 여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 촉박한 여로에서 그와 준호는 어떠한 미국인도 만나지 못한다.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은 미국에 살고 있는 교민(僑民)들뿐이지만, 교민들과도 깊은 교감을 나누지 못한다. 준호는 뉴욕과 시카고를 거쳐 LA 다운타운의 싸구려 하숙방에서 지내는데, 교민들은 미국에 뿌리를 내리려 하는 준호를 비웃고 마침내는 상대할 수 없는 인물로 백안시한다. 산호세에서도 그와 준호는 교민들과 통성명을 하고 밤새도록 떠들고 웃고 춤을 추지만, 다음 날 그와 준호는 그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미국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허는, 산호세의 교민 집에서 준호가 “어젯밤에 형은 미친 사람 같았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난동에 가까운 주사를 벌이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준호 역시 “어디까지나 여행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식으로 이민 온 사람도 아닌 어정쩡한 이방인”이 돼 가는 중이다. 준호가 그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마리화나의 도취 속에서뿐이다. 한국에서 나름 잘나가는 가수였던 준호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마리화나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미국에서도 여전히 준호가 마리화나에 집착한다는 것은 미국 역시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곳임을 증명한다. ‘깊고 푸른 밤’에서 그나 준호가 느끼는 장소상실감(placelessness)은 미국에 사는 다른 교민들에게도 해당된다. 이것은 그와 준호가 단 하루 머문 산호세의 교민들이 벌이는 술자리를 통해 에둘러 드러난다. “난장판”이 된 거실에는 온갖 물건이 나뒹굴고 “술 냄새와 담배 냄새 그리고 밤새워 피웠던 마리화나의 독한 풀 냄새가 뒤범벅이 돼 구역질 나는 냄새”가 가득하다. 교민들은 “익사해 죽은 시체를 끌어올린 형상”이나 “이승에서 방황하는 죽은 자들의 혼령”에 비유되기도 한다.
‘깊고 푸른 밤’은 기본적으로 여로형 소설이고, 그렇다 보니 도로야말로 이 작품의 주요한 공간이다. 캘리포니아의 간선도로라고 할 수 있는 5번 도로나 101번 도로는 물론이고, 1번 도로를 포함한 캘리포니아의 거의 모든 주요 도로가 등장한다. 미국이라는 사회의 외부에 선 그와 준호가 미국을 체험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자동차의 창밖을 통해서다. 이 작품에서 미국은 구체적인 삶의 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미국이 장식적으로만 파악되는 이유는, 미국을 몰라서가 아니라 미국을 알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에게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미국행은 “스스로 선택한 유배지(流配地)로의 여행”이고, 그렇기에 “그는 아주 작은 하나의 섬에서부터 배를 타고 대륙의 뭍으로 귀양 온 죄인”에 불과하다. 귀양 온 자에게 귀양지는 애착을 가진 삶의 공간일 수 없다. 그는 미국의 모든 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잊어버릴 의무만이 남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 작품에는 살리나스(Salinas)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길게 나오는데, 살리나스를 체험하는 방식은 그와 준호가 미국을 체험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도시는 어느 도시건 같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살리나스는 “샌프란시스코와 LA로 가는 도로 위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살리나스는 평범한 현대 도시라기보다는 농업도시로서의 개성이 뚜렷한 곳이다.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과일, 채소, 견과류의 절반 이상이 캘리포니아에서 나오며, 그것의 주요 산지는 중부 캘리포니아의 샌와킨 밸리(San Joaquin Valley) 대평원이다. 살리나스는 이 대평원의 중심도시로서 미국 전체 양상추의 80%를 생산할 정도다. ‘깊고 푸른 밤’에서는 살리나스의 이러한 특징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미국 내의 1만 개가 넘는 현대 도시들 중 하나로만 언급될 뿐이다.
이와 관련해 소설을 낳는 근본 바탕인 작가의 체험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깊고 푸른 밤’은 최인호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가수 이장희와 LA에서 몇 달간 함께 머문 체험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할 때, 육화(肉化)된 진실의 수준에서 탄생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LA, 산호세,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여타 도시의 고유한 특성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깊고 푸른 밤’에서 미국은 구체적인 삶의 공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스펙터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깊고 푸른 밤’이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주를 주요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이러한 작품의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광대한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처럼 산(요세미티), 사막(데스 밸리·모하비), 대평원(샌와킨 밸리), 바다(태평양) 등을 모두 갖춘 곳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와 준호는 한국에서 체험하지 못한 자유나 안정감을 미국에서 얻는 데 실패한다. 이것은 그와 준호가 끝내 그토록 돌아가고자 한 LA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LA는 가장 큰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곳으로, 한국인의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 봤댔자 반겨 줄 사람은 없어”라는 준호의 말처럼, LA는 이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될 수 없다.
LA 대신 이들이 최종적으로 가닿는 지점은 바로 바다이다. 그와 준호가 산호세에서 LA로 돌아가는 길로 굳이 1번 도로를 택한 것부터가 바다를 지향한 결과다. 나아가 1번 도로를 택한 이유에는 바다를 선택한 의미 이외에도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그가 준호에게 건네는 “태평양이야. 저 바다는 네가 돌아가려는 나라의 기슭과 맞닿아 있지. 우린 틀림없이 돌아가게 돼”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다(태평양)는 미국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공간인 것이다.
결국 준호는 “우리가 왜 이곳에 앉아 있지. 이곳은 남의 땅이야. 왜 우리가 이곳에 있지. 왜 우리가 이곳에 있는지 난 그 이유를 모르겠어. 난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구할 수도 없어”라며 미국에서의 완전한 무력감을 토로하는 지경에 이른다. 차가 고장 나서 멈춰 섰을 때, 준호는 “난 돌아가겠어.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는 즉시 비행기 좌석을 예약하겠어”라며 귀국 의사를 표현한다. 그 역시 이 바다 앞에서 자신을 미국까지 내몰았던 분노의 불길이 꺼져가는 것을 느낀다. 나아가 “그는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그 누구에게든 위로받고 싶었”기에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는 미국에서의 힘겨운 체험으로 인해 고국에 대한 애정을 자연스럽게 회복한 것이다. 그러나 귀국을 결심하는 이 순간 그는 평소 그토록 싫어하던 마리화나에 취해 있다. 미국과의 대비를 통한 한국의 구원. 그러나 이러한 구원이 마리화나의 연기 속에서 이뤄진다는 것은 텍스트의 균열 혹은 증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에서 미국은 더 이상 조선의 미몽과 야만을 환기시키는 맹목적인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을 재발견하게 만들 정도로 현대인의 공허와 소외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는 하얀 스크린에 가깝다. ‘깊고 푸른 밤’에서 한국인의 고민이 펼쳐지는 구경거리로서의 미국은 ‘혈의 누’나 ‘무정’에서 그려진 무조건적인 선망의 공간과는 무척 다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의 구체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두 공간은 닮아 있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캘리포니아의 1번 도로 위에서 바라본 태평양은 오늘도 여전히 깊고 푸른 밤인지 모른다.
글·사진=이경재 문학평론가
숭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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