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 지중해 루트’서 찾은 우리의 未來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자가 직접 찍은 옛 사파비 제국의 황도(皇都)였던 이란 이스파한의 풍경. 이슬람 세계의 허브이자 굴지의 코즈모폴리턴이었던 이스파한은 한때 세계의 절반이라고 불렸다.

- 유라시아 견문2 /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견문 3부작 중 두 번째 책 해당
힌두·이슬람 마주친 순간 다뤄
신라·고려때 이용했던 교역길
오늘날엔 韓流 흐르는 주요회로

주류 서구언론 시각서 벗어나
문명사적 통찰까지 두루 반영

‘유라시아 견문’.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1885년 스물여덟의 청년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쓰기 시작했다. 짧은 미국 유학에서 듣고 본 바를 청사진 삼아 조선의 앞길을 보여주려 했다. 이병한은 유길준의 일을 계승한다. 웅대한 포부와 뜨거운 야심이 은근하다. 견문은 한국사상사의 한 중심을 이룬다. 제자백가들이 황제와 요순의 형식을 빌려 춘추전국의 현실을 돌파했듯, 우리 사상가들은 ‘견문의 형태’로 숨 막히는 현실을 비판하고 미래의 숨통을 열었다. ‘먼저 본 자’의 사상은 ‘척박한 현실’보다 강하다. 우여곡절과 그에 따른 변형은 있을지라도 결국 현실은 견문의 큰 그림을 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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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이 처음은 아니다. 250년 전, 박지원은 베이징(北京)에서 세상의 참모습을 알았다. ‘열하일기’가 그 충격의 기록이다. 유길준은 가짜 근대 청나라를 버리고 진짜 근대 미국을 거울로 다시 미래를 기록했을 뿐이다. 거슬러 오르면, 원나라에 유학해 새로운 사상의 생기를 흡수했던 이색이 있다. 그 제자 정도전은 고려를 혁명하려 했고 역사의 수레를 돌려서 성리학 국가 조선을 열었다. 더 올라가면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드넓은 세상을 보았던 최치원이 있다. 신분의 한계에 갇혀 좌절했으나 학통은 부절하여 마침내 고려의 정치적 바탕을 이루었다.

젊은 역사학자 이병한은 견문의 사상적 전통을 이어받는다. ‘동아시아와 서유럽 사이의 드넓은 세상’에서 한국의 미래를 보자고 제안한다. 20세기가 ‘유럽의 몰락’으로 시작되었다면, 21세기는 ‘미국의 쇠퇴’와 함께 출발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독트린 등장은 ‘자유의 수출’과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국제 정치경제 프레임의 종말을 상징한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제국의 임무를 반납하고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보통 국가’로 전환 중이다. 미국이 주도했던 반공-기독교-자유주의 동맹이 곳곳에서 약화되고 있다. 미국의 안보 위협을 줄여주고 실익에 도움을 준다면, 트럼프는 푸틴과도 친할 수 있고 김정은과도 기꺼이 협상할 수 있다.

미국의 방향전환과 함께 동양의 귀환이, 유라시아의 부활이 선명하다. 동아시아와 아라비아 사이로 지구의 동맥이 옮겨오고,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지구의 배꼽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서양의 이해 관심에 따라 갈가리 찢겼던 아시아 제국들이 차례로 부활하며 화해와 협력을 통해 미래의 공동체를 마련해 가는 중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진짜 현실이고, 새로운 미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역사는 우리를 가르친다. 닫히면 약해지고, 통하면 강해진다. 동아시아 끝 작은 반도에서 태어난 한민족의 지리적 운명이다. 어디로 통해야 할까. 한국의 장기미래는 일본-미국 등으로 이어지는 태평양에 놓여 있지 않다. 분단체제에 갇힌 우리의 유일한 통로이자 그동안 부와 번영의 경로였던 이 루트는 위력을 상실하고 있다. ‘축의 이동’은 분명하다.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갈수록 힘을 얻어가는 것은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어지는 경로들이다.

‘유라시아 견문’은 우리를 ‘유라시아 루트들’에 주목하게 한다. 저자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어쩔 수 없는’ 철수로 생겨난 힘의 공백으로부터 중국, 인도, 이란, 터키 등 오래된 문명이 봉기하는 현장들을,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 제국들이 강제한 체제를 넘어 유라시아 세계의 새로운 빛이 솟아오르는 순간들을 생생히 기록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대분기 이래, 서아시아의 대분열체제, 남아시아의 대분할체제, 동아시아의 대분단체제가 유라시아의 대통합으로 수렴”되는 징후들을 때로는 현장의 대화를 통해, 때로는 감격과 예감의 언어로 서술한다.

3부작으로 이루어진 ‘견문’의 첫 번째 책이 중화와 이슬람 사이에서 찬란한 실크로드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책은 힌두·불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한데 어울려 위대한 인도양 시대를 여는 순간을 보고한다. 중국이 ‘일대일로’라고 이름 붙인,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아우르는 이 루트들은 일찍이 신라와 고려의 황금시대를 가져왔던 익숙한 과거이고, 오늘날 한류가 흘러가는 주요 회로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멋진 신세계보다 더 근사한 옛 세계”에 우리의 장기미래가 있다.

우리는 이 루트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주로 서구 언론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중화주의에 사로잡힌 조선이 세상의 변화를 몰랐듯, 서구에 길들여진 눈으로는 아시아의 전면적 융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또 다른 쇄국이고, 망국의 지름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병한의 존재는 소중하다. 미얀마, 인도, 이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터키, 이집트, 키프로스 등의 과거와 현재를, 문명사적 통찰까지 반영하여 두루 살펴본 책은 이제껏 없었다. 공부는 체험을 만나 지혜가 되고, 경험은 지식을 만나 통찰이 된다. 지혜와 통찰이 있는 책만이 위대할 수 있다면 이병한의 책은 ‘21세기의 서유견문’으로 삼을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다. 608쪽, 2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순천향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