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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His Story 게재 일자 : 2018년 03월 28일(水)
“이상하다 싶어 못 둔 手를 AI는 과감히 둬… 따라했더니 통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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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환 9단이 지난 26일 KBS 바둑왕전 결승 대국에서 김지석 9단을 256수 만에 흑 불계승으로 꺾은 후 복기를 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바둑 세계랭킹 1위 박정환 9단

이세돌 9단 승리한다 점쳤는데
알파고 상상이상 묘수에 충격
AI덕에 인간바둑 발전 빨라져

5년째 韓1위에‘국내용’꼬리표
인터넷 댓글보며 상처 받았지만
1월 몽백합배 우승으로 짐 덜어

커제9단 상대 超速棋로 불계승
과거 ‘패하면 안된다’전전긍긍
이젠 ‘후회 없이 하자’마음바꿔

올상금 7억넘지만 부모님 관리
인터넷 대국료만 내맘대로 써
棋士 안됐으면 수학자 됐을 듯


박정환(25)의 전성시대다.

52개월 연속 한국 바둑랭킹 1위. 국제무대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지난 1월 몽백합배 정상에 올라 2015년 LG배 우승 이후 3년 만에 세계대회 우승컵을 품었다. 2월 하세배, 크라운해태배를 제패했고 지난 19일에는 일본에서 열린 월드바둑챔피언십 2연패를 달성했다. 그리고 26일에는 KBS 바둑왕전에서 통산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KBS 바둑왕전 우승 상금은 2000만 원. 박정환 9단은 올해 들어 7억7000만 원이 넘는 상금을 쓸어담았다. 현재의 기세라면 2014년 이세돌 9단이 세운 국내 최고 연 상금 14억1033만 원 경신도 노려볼 수 있다.


최근 2년간 세계 1인자로 군림했던 중국의 커제(21) 9단도 박 9단에게 혼쭐이 나고 있다. 박 9단은 커제 9단을 월드바둑챔피언십을 포함해 최근 3번 모두 꺾었다.

그러나 박 9단은 여전히 겸손하다. KBS 바둑왕전 우승 직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카페에서 만난 박 9단은 특히 박정환의 전성시대를 논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강조했다. “기세가 좋고 컨디션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앞으로 세계대회에서 2번 정도 더 우승한 뒤에야 전성기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월드바둑챔피언십에서 커제 9단과 일본 1인자인 이야마 유타(29) 9단을 꺾었지만, 정말 막강한 상대들이라서 배운다는 자세로 집중했고,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박 9단은 충분히 생각한 후 확신이 들면 수를 두는 스타일이다. 속기는 어떤 수를 둘 때 일어날 변화를 다 고려하지 못하고 감에 의존해야 한다. 반면 장고 바둑은 변화를 충분히 살핀 후 둘 수 있어 그는 장고를 선호한다. 그래서 커제 9단과의 격돌을 앞두고 2시간 바둑이면 약간 불리하고, 3시간 바둑이라면 해볼 만하다 전망했었다. 그런데 2월 하세배에서 1수 30초, 1분 생각 시간 10회를 사용할 수 있는 초속기로 커제 9단에게 불계승을 거뒀다. 이번에 우승한 KBS 바둑왕전 역시 대표적인 속기전이다.

한국, 중국, 일본이 공인하는 랭킹 시스템은 없다. 통상적으로 바둑랭킹 전문 사이트 ‘고레이팅’ 순위를 차용해 세계랭킹을 따진다. 박 9단은 지난해 12월 초 커제 9단을 밀어내고 정상에 올라섰고, 3개월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26일 현재 커제 9단과의 랭킹 포인트는 64점으로 벌어졌다. 박 9단이 1위에 오른 후 최대 폭이다.

“최근 성적이 좋은 건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과거에는 세계대회, 중요한 대국을 앞두고 긴장한 적이 많았거든요. ‘패하면 안 된다,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었죠.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한판, 한판 최선을 다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남지 않거든요. 여전히 대국에 대한 부담감은 있지만 즐기다 보니 마음은 편해지고 스트레스가 찾아올 틈이 없어졌어요.”

사실 박 9단은 그동안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국내 최고 자리에 오른 지 벌써 5년. 하지만 세계무대에선 만족할 만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고 그래서 ‘국내용’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더군다나 한국 바둑은 2016년 2월 강동윤 9단이 LG배를 품은 후 2년 동안 세계 메이저대회 우승컵을 차지하지 못했다. 몽백합배, 신아오배, 삼성화재배, LG배, 백령배, 춘란배, 응씨배 등 7개 대회 타이틀을 모두 중국 기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박 9단이 1월 몽백합배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은 세계대회 ‘무관(無冠)’에서 벗어났다. 특히 박 9단은 중국의 퉈지아시(27)·저우루이양(27)·커제 9단, 천쯔젠(18) 5단, 셰커(18) 5단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올랐다. 커제 9단을 비롯해 퉈지아시, 저우루이양 9단 모두 세계대회에서 우승했던 강자들이다. 바둑계에서는 국내외를 평정한 9단을 ‘쇠가슴’에 비유한다. 과거에는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지금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있기 때문.

“바둑 사이트에 달리는 댓글을 대부분 찾아 읽는 편입니다. 저에 대한 팬들의 평가를 잘 알고 있죠. 댓글에 상처를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발전할 수 있는 동기로 삼고 있습니다. 세계대회 타이틀이 없었기에 톱 랭커로서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몽백합배 우승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던 것 같지만,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앞으로 더욱 애쓰겠습니다.”

박 9단은 ‘공부벌레’다. 사활(死活) 풀이가 박 9단의 취미. 바둑팬 사이에서는 ‘사활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모든 사활 문제를 풀어 더 풀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박 9단은 여전히 사활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최근엔 바둑 인공지능(AI) 연구에 푹 빠졌다.

“사활은 공부를 멈출 수 없는 영역이에요. 예전에 푼 사활 문제를 잊어버려 다시 풀 때도 있죠. 시간을 딱히 정해두고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깨어있는 동안엔 바둑을 계속 생각합니다. 휴대전화, 컴퓨터로 바둑을 보는 경우도 많죠. 슬럼프도 결국 바둑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대국이든, 슬럼프든 이겨내는 방법은 끊임없는 노력뿐입니다. 인공지능의 바둑은 인간보다 창의적인 수가 더 많아요. 인공지능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기사들의 바둑에서) 못 봤던 수를 많이 둡니다. 또 제가 생각만 하고 ‘이상하겠지’라고 여겨 실전에서 두지 않았던 수를 인공지능은 과감하게 둡니다. 그래서 실제 대국에서 인공지능이 뒀던 수를 써보기도 하고 인공지능이 두는 수를 응용하기도 합니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가 맞붙었을 때 박 9단은 이 9단의 승리를 예상했다. 박 9단을 포함, 바둑인 대부분이 이 9단의 우위를 전망했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하나의 충격이었고, 이젠 ‘현실’이 됐다.

“제가 알파고를 상대했더라도 겨우 1승을 거두거나 아니면 5번 모두 졌을 겁니다. 알파고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죠. 인공지능의 수를 잘 연구하고 활용한다면 바둑 발전에 도움이 될 겁니다. 인공지능 덕분에 인간 바둑 발전이 더 빨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 9단은 6세 때 바둑에 입문, 20년 가까이 바둑 외길을 걷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갇힌 삶. 그래서 좀 더 자유로운, 또래들과 같은 평범한 삶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도 인간이기에 바둑이 지겨울 때도, 부진에 빠져 지칠 때도 있다.

“술,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푼 적도 있어요. 하지만 제게 바둑은 인생의 동반자잖아요. 그리고 제가 선택한 길이기에 모든 걸 감수해야겠죠. 바둑으로 기쁘고 행복한 적이 더 많고, 고비야 없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잘 참고 견뎌왔습니다. 이젠 바둑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 웬만하면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아, 참. 제가 어릴 적 수학을 정말 좋아했어요. 바둑기사가 되지 않았다면 수학자가 됐을 겁니다.”

박 9단은 영화, 드라마, 음악을 즐긴다. 바둑기사가 주인공이었던 ‘응답하라 1988’은 바둑 하는 사람을 잘 표현했고 실제 기보를 활용해 드라마를 제작, 현실감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요즘에는 20대 청춘의 삶을 그린 ‘으라차차 와이키키’를 즐겨본다. 잠시라도 바둑판을 떠나있을 땐 보통의 20대와 다른 점이 없다. 거액의 상금을 챙겼지만,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 쓰는 것까지도.

“영화, 드라마, 음악은 기분전환에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개인적으론 가수이자 배우인 수지를 좋아합니다. 걸그룹 레드벨벳의 리더 아이린의 팬이기도 하죠. 한때 독립한 적도 있었지만 ‘집밥’이 그리워 다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돈 관리는 부모님께서 하세요. 필요할 때 돈을 받아서 씁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인터넷 대국이죠. 인터넷 바둑으로 받는 대국료는 제가 다 쓰고 있어요.”

조성진 기자 threeme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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