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분노 정치’와 ‘저주 언어’의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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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 DGIST 석좌교수 커뮤니케이션학

분노의 사회다. 전직 대통령의 ‘정치 보복’과 현직 대통령의 ‘분노의 마음’이 맞교환됐다. 저주의 언어가 남발되고 툭하면 구속하고 보는 형벌이 앞서가는 사회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쿠바의 카스트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1961년 피그만 공격을 시도했다가 참패했다. 그런데 애초에 그 공격을 지지했던 참모와 각료들이 실패 이후엔 자신들은 본래 반대했었다고 거짓말하는 것에 케네디는 분노했다. 그 분노를 못 이겨 추후 거짓말하는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의 오벌오피스와 각료회의실에 비밀 녹음 장치를 설치하고 회의 내용을 은밀히 녹음했다. 이 관행은 리처드 닉슨 때까지 이어졌고, 결국 그 녹음 파일에 의해 닉슨 스스로 탄핵됐다.

분노는 그것에 머물지 않았다. 승산 없는 베트남 전쟁이 계속 확전의 길로 나아간 이유, 900만 명의 미군을 투입하고도 결국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배를 안긴 비극이 발생한 단초가 그 녹음 파일의 언어 분석을 통해 밝혀졌다. 핵심은 당시 적군이던 북베트남을 ‘개·돼지’의 동물로 희화화한 경멸적 언어가 백악관 대화의 주종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적군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력을 상실했고, 패착에 패착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친개’나 ‘바퀴벌레’ ‘연탄가스’ 같은 저주의 언어가 누구에게 더 패착이 될 것인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정치의 본질은 언어다. 언어를 통해 분파 대신에 통합을, 분노 대신에 통찰을 성취할 수 있다. 정치 지도자 간에 아무리 날 선 공방이 오가더라도 곱씹을 수 있는 언술을 통해 국민에게 새로운 관점과 아이디어를 보태줄 때 국가의 품격도 살아난다. 진정, 인류 문명이 꽃피게 된 것은 언어의 발명에 기인한다. 언어는 아이디어를 객관화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인간의 능력까지 확장해 주었다. 정치가 지향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풍요로운 꿈의 실현, 곧 민주사회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만개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생산물은 일정 부문 지구 표면에 오래 잔존하는 오염물질을 남긴다. 그 반면에 아이디어의 생산물인 언술은 덧없이 사라지는 속성(Here today, gone tomorrow.)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도 저주의 언어가 정치에 이용될 때, 깊은 상처의 오염을 뭇사람에게 길게 남긴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분노의 탈출구가 다양해졌고, 그로 인해 저주의 언어가 범람하는 상황(댓글, 가짜 뉴스)을 쉽게 목격한다. 언어의 생산적인 능력이 더 파괴적인 것으로 역전되지 않을까 지극히 염려된다.

갈등의 정치가 분노를 낳고, 분노의 정치가 저주의 언어를 불러온다. 문제는 그 저주의 언어가 다시 갈등과 분노를 부채질하는 악순환을 만든다는 점이다. 갈등과 분노의 상대방을 저주의 언어로 낙인(stigma) 찍어서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우고 세력을 결집하려는 정치적 음모가 너무 뻔하게 보인다. 인간의 조건에서 그런 악순환을 완화시킬 수 있는 가장 실현 가능한 수단은 절제된 언술의 활용이다. 저주의 언어에 동승하는 패거리가 있더라도 ‘국민의 눈높이’를 생각하면 어떤 정치가가 더 존경받을 수 있는지 명백해진다. 예컨대, 중구난방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태보다 국가 이성을 사려 깊게 견지하려는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의 절제된 언술 행위가 더 돋보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적일 때 어쩌면 그의 이성과 언술에 기대야 하는 우리로선 다행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