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뒤섞인 시대… 그래도 ‘아날로그 사랑’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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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수 ‘40일의 발칙한 아내’

미스터리 빌린 러브스토리
한국 현대史의 아픔도 스며

“제가 기존에 썼던 소설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읽기에 힘들다는 평을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소설은 쉽고 재미있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썼어요.”

한지수(51·사진) 작가는 바람을 이룬 듯싶다. 그가 문학사상을 통해 펴낸 장편 ‘40일의 발칙한 아내’는 술술 읽힌다. 가상공간의 죽음이 현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한다.

대한민국스토리공모대전에서 수상한 이력에서 보듯 한 작가는 소설 작품의 영상화에 관심이 많다. 새로운 이야기를 짓고 그것을 박진감 있게 펼쳐 보이는 데 공을 들인다. 그렇다고 소설 문학 특유의 언어 미학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의 새 영역을 발견하는 데 앞장서면서도 소설의 기존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이자 동시에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이다. 나는 ‘사랑’을 보고 싶었다. 죽은 사람마저도 지독히 사랑할 수 있는 듬직한 감정이 그리웠다.”

‘작가의 말’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 소설은 러브스토리다. 그런데 여주인공 ‘이경’은 처음부터 죽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만 38세의 남자 주인공 ‘선재’는 자신의 여자가 죽은 지도 모르고 있었다. 변호사가 찾아와 이경이 유산과 보험금을 남겼다는 것을 알렸을 때도 선재는 의아해한다. 외제차 딜러이자 무명 사진작가인 선재는 혼자 사는 게 익숙해서 결혼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남자다. 그런데 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여자가 자신을 법적 남편으로 지정하고 막대한 유산을 남겼을까.

그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에서 뒤늦게 알게 된다. 인터넷 가상 결혼 사이트에서 40일간 만난 ‘여섯 번째 아내’가 현실에서 이경이라는 이름을 지닌 여성이었음을. 또한 우연히 만나서 육체적 교감을 나눴으나 그게 환상 속에서인지, 현실에서인지 헷갈리게 했던 고혹적인 여인 ‘마린’이 ‘여섯 번째 아내’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소설 속 가상공간의 만남이 현실에서의 관계로 육화할 때, 현대사의 아픔이 아릿하게 스민다. 성실했던 가장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풍비박산 난 집안. 간첩 아들로 30년을 살아야 했던 남자와 고문 가해자의 딸이었던 여자. 이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목울대를 뜨겁게 한다.

가상공간과 현실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최근 인기를 끌며 상영 중인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닮았다. 담아낸 이야기가 다르긴 하지만,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21세기의 인간들이 사실은 아날로그식의 사랑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노래 가사와 시(詩)에 기댄 이 소설의 아날로그 정서는 읽는 이를 푸근하게 만든다. 동시에 언어 미학의 독특한 맛을 차분히 누리게 한다. 특히 음악을 배경으로 한 육체관계 묘사 장면 등에서 빛나는 미감(美感)을 여운으로 품게 한다.

한 작가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만났던 여성 환자가 소설의 모델이 됐다고 했다. 크고 맑은 눈에 반듯하게 빛나는 이마를 지녔던 젊은 여인. 봉사자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한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난 여인. 한 작가는 그 감사인사의 울림이 창작 동력이 됐음을 밝히며 이렇게 소망했다. “사랑을 노래하고 그리는 이 책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기를, 그리하여 사랑이 없다 탄식하는 세상에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믿겠노라 다시 한 번 결심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를….”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