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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 게재 일자 : 2018년 04월 11일(水)
밑동만 남은 120살 느티나무에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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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규·구자명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2) 보고 듣다

내 모든 속말을 들어주었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고맙디 고마운 어른같은 나무

“가까이 다가서고 싶으면
조금만 물러서서 바라봐”
내가 내게 사무쳐 있었나


바람이 귓등과 코끝에 맵다. 내 맘과 몸의 형편을 아랑곳하지 않고 낡은 옷의 빈틈마다 앙칼지게 파고든다. 겨울 끝 무렵 바람도 이제는 추워 내 몸의 온기나마 얻고자 함이다. 발은 내게 묻지도 않고 제 뜻대로 어디론가 내 몸을 지고 간다. 한참을 걷던 발이 우뚝 멈추어 선 곳, 그곳은 집에서 걸음으로 삼십 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조그만 언덕배기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가 아직도 반듯하게 앉아 작은 숨을 쉬는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종소리에 쫓겨 우르르 교실로 뛰어들어가는 아이들의 발에 채어 구르다 남겨진 웃음소리, 하얀 흙먼지로 가라앉아 마당이 된 곳. 긴 겨울방학에 들어간 학교는 빈 운동장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나뭇잎의 마른 꿈을 가득 주워 하릴없이 뿌려댄다. 그랬다. 날 데리고 온 발은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면 이 언덕배기에 올라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구석구석 아쉬움과 그리움의 눈길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아이들과의 놀이를 하나하나 떠올리고 키득대며 혼자 놀기를 늦도록 하곤 했다.

어릴 때의 나는 지금도 같은 나일 뿐이다. 내가 청년일 때도, 내 딸이 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그리고 그 아이가 커서 낳은 아들이 새봄이면 입학한다는 지금에도 똑같은 나인 것이다. 똑같은 내가 똑같은 자리에 와서 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한 철도 거름이 없이 이곳에 왔으니 그날들 속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있으며 또한 내일의 내가 어제의 나로부터 온다. 나는 이곳에서 즐거웠고 괴로웠으며 기뻤고 슬펐었다. 그런 때면 어두운 나와 밝은 내가 다가와 슬며시 내 곁에 앉아 우리는 또 다른 내가 된다. 내가 아무 말도 없으니 어두운 내가 말한다. 그의 말은 한낮에 제 그림자를 짙게 매단 채 더욱 뚜렷하다. 밝은 내가 이어서 한 말은 하늘로 올라 밤이 오면 별빛을 낸다.

어느새 샛별이 뜨고 이름 모를 밤새가 ‘후룩 후루룩’ 하며 짧게 운다. 문득 등이 허전하여 돌아보니 내게 등받이가 되어주던 키 높은 느티나무, 내 모든 속말을 귀담아들어 주었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을 어른 같은 나무, 철마다 제철 노래를 잘 부르던 그 늠름한 나무마저 누군가 베어버려 원탁 같은 밑동만 남았다.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를 가지 끝으로 잡아내고 바람이 몰고 온 땅의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 가장 맑은 노래와 쉬운 말씀으로 바꾸어 내 마음의 울림이 되었던 고맙디 고마운 느티나무였다. 오늘은 더욱 그가 있어야만 했다. 그에게 꼭 해줄 품은 말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무릎이 풀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두운 나와 밝은 내가 조심스럽게 내 곁에 앉는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도 이제 나무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숨을 조금 돌린 뒤 동네로 내려가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종이컵, 마른오징어를 사왔다. 느티나무 밑동 위에 소주를 따라 올리고 마른오징어를 반듯하게 놓은 뒤 느티나무께 큰절을 올린다. 억지로 눌러놓은 슬픔이 허리를 굽히자 와락 위로 솟으며 눈물로 쏟아져 나온다. 후룩 후룩 후루룩. 밤새가 또 운다. 달빛에 잘린 느티나무 밑동이 내 눈물에 희부옇게 어룽져 비친다. 거기엔 수많은 동심원의 나이테가 영원할 것 같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손끝으로 더듬으며 촘촘히 세어 보니 딱 백이십 개다. 느티나무의 나이가 백이십 살이시다. 그러니까 1898 무술(戊戌)년 황금 개해에 태어난 것이다. 환갑을 조금 넘긴 나보다 거의 한 갑자를 더 사셨다.

그런데 나는 오늘 느티나무에게 무얼 말하려 했는가? 들어줄 그도 없는데 할 말이 있으면 또 무엇 하나? 곰곰이 생각하니 느티나무에게 늘 했던 말이나 오늘 품은 말은 ‘어떻게 하면 좋지?’였다. 나무는 언제나 내 말을 끈기 있게 들어주며 때때로 나뭇잎으로 손사래를 치거나 손뼉을 치는 것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가르쳐 주었다. 나무가 시린 제 발등을 덮었던 나뭇잎들을 내게로 쓸어 모아 깔고 앉으며 나무와 술을 나눠 마신다. 잘린 나무 밑동은 술상으로 맞춤이다. 어쩌면 나무와 자주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란 마음도 생긴다. 나무에게 술 한잔 부어 주는데 얼핏 나이테가 희미하게 웃는다. 동글동글 아이처럼 웃다가 둥글둥글 어른처럼 웃는다. 느티나무의 나이테가 웃음을 멈추지 않으니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 나이테, 그것이 제 몸을 떠나고 내 몸을 지나쳐 사방으로 소리 없이 동그란 무늬가 되어 번져 나간다.

느티나무와 나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느티나무 밑동에게 말했다. “‘나 오늘 어떻게 하면 좋지?’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러자 느티나무가 말한다. “가까이 다가서고 싶으면 조금 물러서서 봐.” 내가 내게 너무 사무쳐 있기만 했다는 말일까? 그러고 보니 어두운 나와 밝은 내가 곁에 없다. 저희들끼리 다른 데서 놀고 있으리라. 느티나무는 잘리고도 내게 친절했다. 제 노랫소리를 듣게 했고 이제 나이테를 보여줌으로 내 귀를 부드럽게 두드린다. 문득 어쩌면 내게도 나이테가 생길 것 같다. 바람이 또 불어와 무슨 말인가를 주워 담고 어디론가 바삐 불려간다. 느티나무 밑동에서 돋아난 새순을 본 것은 술이 거의 떨어졌을 때다.

글·그림 = 김의규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초대회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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