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모임 주도한 안평… 세력화 겁낸 수양에 희생”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심경호 고려대 교수는 “‘몽유도원도’와 안평,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너무 일치시키려 하기보다 당대 학자들이 그림을 본 후에 쓴 제찬 시문의 세계적인 수준을 함께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연구실에서 책 ‘안평’을 들고 있는 심 교수.

국내 첫 평전 펴낸 한문학자 심경호 교수

‘도원기’등 예술혼 발휘하며
조선 명필가로 손꼽힌 안평
주변 문사들과의 모임 이끌어

권력욕 컸던 세조에 오해받아
계유정난 얽혀 강화도서 사약
‘夢遊’처럼 쓸쓸한 최후맞아

“또 갔더라도 어떻게 도원(桃源)에 이르렀단 말인가? 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거늘 도원에 노닐면서 하필이면 이 몇 사람만 따르게 되었던가? 그것은 내 성품이 고요하고 외딴곳을 좋아하며 평소 자연을 그리는 마음을 품고 있던 데다가, 이 몇 사람과의 사귐이 한층 두터운 까닭에 그런 것이리라.”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정묘년(1447년) 4월 20일 도원을 찾는 꿈을 꾼 뒤 안견(安堅)에게 그 꿈을 그리도록 명해 3일 만에 그려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안평이 그림을 그리게 된 정황을 직접 쓴 ‘도원기(桃源記)’가 붙어 있다. 또 그림에는 꿈에도 등장했던 박팽년을 비롯해 21인의 ‘제찬 시문’(題贊詩文·그림을 보고 감상을 적은 시와 글)이 달려 있다. 어찌 보면 ‘도원기’ 중에는 안평의 청백(淸白)한 성품과 함께 뛰어난 지적·예술적 감각, 거기에다 수양대군(뒷날 세조)에게 정치 세력화로 비쳐 결국 비운의 죽임을 당한 ‘문사들과의 모임’ 등 미래의 예견까지 담겨 있는 듯하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한문학·문헌학자인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가 안평대군에 대한 첫 총체적인 평전인 ‘안평’(알마출판)을 최근 펴냈다.

무려 1200쪽이 넘은 책의 서두에서 심 교수도 “그는 야심가인가, 희생자인가라는 점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20년 전부터 맴돌던 의문”이라고 말한다. 심 교수는 11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도원기를 너무 예언적으로, 쓸쓸하게 볼 것만은 아니다”라고 전제하면서도, “당시 타자(수양대군)의 눈으로 보면 예술가 집단이 권력집단으로 비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예술과 학문이 권력과 무관하게 설 자리가 어디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고 말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에 붙인 ‘도원기’. 안평은 중국 황제가 인정할 만큼 명필이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는 계유정난(癸酉靖難·1453)에 휘말려 강화도로 귀양을 가 결국 사사됐다. 그러다 보니 ‘단종실록’(원제 ‘노산군일기’) 등 승자의 기록물은 크게 왜곡돼 심 교수는 “파편처럼 흩어진 자료들을 모아” 안평의 35년 인생을 복원해야 했다. 심 교수는 “안평을 제대로 보려면 세종과 수양을 같이 봐야 한다”며 “세종 대에 주석본 편찬의 학술활동이 많았는데, 세종은 수양에게 ‘석보상절’ 등 한글 쪽 작업을, 안평에게 ‘두시(杜詩)’ 등을 비롯한 한시와 고전의 편찬작업을 정책적으로 안배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양이 안평의 수준에 끝내 도달하지 못한 것은 한시(漢詩)를 짓지 못했다는 점이다. 외재율 곧 운(韻)을 중시하는 한시는 당시에도 어려웠는데, “수양에게 그 격차는 조선 초 문학의 중흥시기에 소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매우 뼈아픈 결함이었다”고 심 교수는 봤다.

그뿐 아니라 안평은 활달하면서도 귀족적인 송설체(조맹부체)를 구사해 중국에서도 이름을 날린 명필이었고, 안견·최경 등 화가들의 후견인으로 그림에도 밝았으며, 조선과 중국의 글씨와 그림을 많이 모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 그러다 보니 안평의 주변에는 문사들이 많았다.

심 교수는 “정치인과 예술가가 분리되지 않던 시절, 예술 모임은 곧 정치적 세력화로 간주되지 않을 수 없었다”며 “그것은 정치권력을 수중에 넣고자 했던 수양에게는 정치 세력화의 형태로 비쳤다. 수양이 예술가 집단을 대척점으로 본 것이 안평의 비극”이라고 밝혔다. “안평의 삶을 좇다 보니, 비가(悲歌)와 같은 형태로 쓰게 됐다”는 심 교수는 “안평의 35년간 삶을 꿈속에서 노닒, 즉 ‘몽유(夢遊)’라고 규정해도 좋으리라. 그 꿈은 질척질척하여 깨어난 뒤 뒷맛이 씁쓸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백하여 차라리 쓸쓸하기까지 한 그런 꿈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몽유도원도 제찬의 글들을 단순히 안평과 그림의 시각에서 볼 것만은 아니다”라며 “예컨대 이현로의 장문의 부(賦) 등 다양한 양식의 글들은 당대 중국에 견줘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문화의 성숙도를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올해에만 ‘김삿갓 한시’와 ‘내면기행’을 비롯해 두 권의 중국 번역서 등 700∼1000쪽이 넘는 5권의 책을 펴낸 심 교수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책들이 한꺼번에 나오게 됐을 뿐”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