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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8년 04월 17일(火)
自然의 숨은 질서를 ‘이데아적 형식’으로 구현하는게 藝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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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저울을 다는 여인’. 그림의 중심, 저울의 중간 추의 위치, 그림 속 여인의 시선이 한곳에서 만난다. 정신의 집중을 통해 삶의 이데아에 도달하려는 페르메이르의 바람이 형상화된 작품이다. 자료사진

■ 문광훈의 미학 에세이 - (16) 형상화란 무엇인가

시의 경우 운율 음악에선 리듬
그림은 선·색·구성으로 나타나

변용·승화라는 매개 과정 거쳐
무질서서 일정한 형식 얻게 돼

위대한 건축 조각의 선·곡선도
카오스로부터 로고스 생산작업

현실태로서 가능성과의 만남이
예술 창조행위의 가장 큰 매력

개념적 추상 기댄 철학과 달리
구체적 경험 속에서 초월 감행

형상의 기쁨은 감각 차원 아닌
사물 본질과 만남서 얻는 자유


시에 대한 논의나 회화론에서, 좀 더 넓게는 예술론이나 미학에서 형상이란 개념이 자주 나온다. ‘형상적 직관’이나 ‘형상적 질서’, ‘형상적 상상력’이나 ‘형상적 승화’ 같은 말이 그렇다. 이 개념은 미학에서 중요한 용어들 중 하나다. 그래서 분명하게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 형상이란 무엇인가?


# 형상화 : 이름 부르기

형상은 독일어로 게슈탈퉁(Gestaltung)으로 사물에 ‘형태 혹은 형식을 부여하는(form-giving)’ 것을 뜻한다. 형태는 물론 여러 가지다. 시의 경우는 언어 속에서 운율이나 비유로 표현될 것이고, 그림에서는 선과 색채와 구성으로 표현되며, 음악에서는 리듬과 선율로 나타날 것이다. 사물은 이런 형태부여를 통해 이름 없는 것에서 이름 있는 것으로 전환한다. 그래서 이해될 수 있다. 김춘수의 잘 알려진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어떤 꽃이 ‘장미’라는 이름을 통해 존재하게 되듯이, 이름 없던 야생화는 이름을 가질 때 마침내 자기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형상화란 일종의 이름 부르기 행위다. 예술의 표현과정이란 이름 부르기의 과정과 다름없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관점에서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꽃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장미’로 불리든 ‘국화’로 불리든 사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이름을 얻음으로써 낯설고 무질서한 것으로부터 친숙한 질서로, 그래서 일정한 형태를 가진 대상으로 변해간다.

이러한 형태는 자연의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자연의 여러 사물에도 있고, 이 사물을 묘사한 예술작품에도 들어 있다. 큰구슬우렁이를 살펴보자. 이것은 ‘자연사’(사이언스북스)라는 책을 참조하면, 폴리구슬우렁이(Euspira pulchella)로 보이지만, 그 정확한 명칭이 무엇인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골뱅이’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을 나는 서너 해 전 청산도를 갔을 때 지리해변에서 주워 왔다. 우렁이의 형태는 자세히 보면, 실선보다 가는 선이 수십, 수백 개 나선형을 이루면서 원심적으로 퍼져 나간다. 그것은 귀엽고 앙증맞으면서도 기하학적으로 놀라운 규칙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퍼져 가면서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데 신적 창조의 에너지가 있을 것이다.

자연의 기하학적 형태가 대개 숨어 있다면, 자연의 이 숨은 질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예술작품이다. ‘형상화’란 이렇게 자연의 질서를 드러내는 일이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 Vermeer)의 그림 ‘저울을 다는 여인’(1662~1664)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한 여인이 짙은 남색 외투에 하얀 수건을 면사포처럼 쓴 채, 저울로 뭔가를 달고 있다. 저울추 양쪽에 있는 것이 금인지 진주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녀의 배는 아이를 밴 듯 약간 불룩한데, 그녀는 저울이 균형을 잡도록 온 신경을 쏟고 있다. 그녀의 오른쪽 벽에는 최후의 심판을 그린 성화 하나가 걸려 있다. 이 때문에 그녀를 마리아의 세속적 이미지로, 말하자면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지상과 천상, 세속과 구원을 잇는 어떤 중개자로 보는 해석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다가오는 심판 앞에서 금과 진주 같은 모든 재화의 덧없음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  1665~1666년에 제작된 페르메이르의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 자화상을 남기진 않았던 화가의 뒷모습 자화상으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의 전체 의미가, 그 네 모서리에서 X 표시를 해보면, 어느 정도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두 개의 대각선을 상상해 그어 보면, 저울의 양쪽을 조절하는 중간 추의 위치와 거의 일치한다. 그녀의 시선은 바로 이 교차점을 향해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는 시선 역시 그녀가 집중한 곳을 향하게 된다. 아마도 이 지점은 그림 전체의 중심점으로서 사물의 중심-어떤 균형점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사물의 질서이자 자연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자체로 형상에 대한 알레고리다. 페르메이르는 실제로 자기 그림이 인간 행동의 도덕적 근거나 정신적 진리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저울로 잰다는 것은 균형을 생각한다는 것이고, 정신의 집중을 통해 삶의 이데아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구현한 이 같은 이데아적 형식들은 예술작품 곳곳에 들어 있다. 아니, 예술작품이란 바로 이런 형식의 구현활동이다. 이를테면 미켈란젤로의 조각이나 건축이 보여주는 선과 곡선의 도형에는 이데아적 질서로서의 형상이 들어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그것이 피아노 협주곡이든 레퀴엠이든 아니면 교향곡이든, 세계의 동적 리듬이 들어 있다. 이는 단순히 ‘좋은 소리’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질서나 구조 혹은 기하학을 암시한다. 그것은 마치 화가의 선이 단순히 멋지고 아름다운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화가 자신의 마음의 율동이고 세계의 숨은 원리인 것과 같다.

그리하여 표현행위란 자연의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드는 일이고, 삶의 카오스로부터 로고스를 생성시키는 일이다. 인간은 세계의 낯섦 앞에서 이 낯섦을 자기가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변모시키고, 이 변모를 통해 세계를 조금씩 인식해가며, 이런 인식을 통해 대상을 조금씩 제어해간다. 그리하여 예술의 표현과정은 인간의 사물 파악의 과정이요, 세계 인식의 과정인 것이다.


# ‘변용’ 혹은 ‘승화’라는 매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예술의 진실이 직접적 진실이 아니라 ‘매개된’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이름 부르기 혹은 표현행위는 이 매개과정에서 일어난다. 대상은 매개를 통해 일정한 형태와 형식을 얻는다. 매개과정이란 곧 형식화 과정이자 형상화 과정이다. 이 매개를 통해 대상은 낯섦에서 친숙함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변하게 된다. 이것을 변용(transformation) 혹은 승화(sublimation)라고 부른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넘어서서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예술의 승화적 매개과정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상화 과정이란 승화적 매개과정과 다르지 않다. 이 형상화 활동 속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렇게 돌아보는 한 그것은 반성적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의 표현에는 지금 여기를 떠나 저 먼 곳으로 향한 반성적 움직임이 있다. 이 반성적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형상은 더욱 참되다고 할 수 있다.

이 형상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한두 개체만이 아니다. 그것은 개체를 에워싼 주변과 바탕,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서의 전체적 분위기다. 이때 기능하는 것이 비유나 상징, 혹은 이미지(Image/Bild)다. 비유한다는 것은 대상의 진실을 직접 드러내는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암시한다’는 뜻이고, 이런 암시에는 ‘전체의 그림자가 녹아 있다’. 비유나 상징 없이 세계의 전체성을 다 드러내기 어렵다. 인간은 매개적·비유적으로 인식한다. 이 매개적·비유적 인식이 곧 형상적 인식이다.

형상화 과정을 그림에 빗대어 설명하면 이렇다. 전통 산수화에서 집이 그려져 있다면, 이 집에는 방이 있고 창문이 나 있으며, 창문 앞으로 마당이 있듯이 집 뒤에는 울타리가 있다. 집 앞으로 마을과 개울과 강이 있듯이, 집 뒤로는 언덕과 산등성이가 있다. 이것은 문학작품에서 로미오와 그의 연인 줄리엣이 있고, 두 연인의 친구들과 집안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다. 하나의 인물은 그 인물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친구와 친구의 친구 그리고 가족 구성원에게 에워싸인 채 나타난다. 그렇듯이 이들의 사건은 동심원적으로 퍼져 나가는 시대적 사건들의 한 요소로 자리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비유나 상징 혹은 형상의 매개 속에서 개별적인 것의 전체를 드러낸다.


# 지금 여기의 이데아

예술은 대상을 ‘하나의 전체적 구도’ 속에서, 그러나 ‘개체적 생생함으로’ 드러내 보인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비유요 상징이요 이미지라면, 작품은 이런 비유를 내장한 형상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의 비유 속에서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저 너머의 초월로 넘어가고, 그래서 일상과 이념을 하나로 잇는다. 예술적 형상 속에서 육체와 정신, 감각과 이념은 결합되는 것이다. 김우창 선생이 릴케론에서 강조한 것도 결국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상징물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 삶이 이중의 차원에 걸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상징과 현실 속에 산다는 말이고, 동시에 지상과 플라톤적 이데아의 세계에 산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특이한 것은 이 두 차원이 일상적 삶에 항시 출몰하고 교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과 삶의 차이를 분명히 의식하고, 삶에 집중하고 그것의 형상화를 시도하는 것이 최선의 삶의 방법이다. 그것은 현실 속에 있으면서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 속에 있는 일이다.”

윗글에서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인간은 현실과 상징, 지상과 이데아 사이에 산다. 둘째,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겹쳐 있다. 그래서 “두 차원은 일상적 삶에 항시 출몰하고 교차한다”. 셋째, 이런 교차를 실현하는 것이, 다시 말해 “삶에 집중하고 그것의 형상화를 시도하는 것이 최선의 삶의 방법”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에 노출돼 있다. 너무 많은 정보와 지식, 너무 많은 먹을 것과 만남 혹은 모임에 우리는 휘둘린다. 그 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고, 내가 가진 가치와 판단은 얼마나 옳은지, 오늘의 사회와 지구 현실은 얼마나 올바른 것인지 제대로 알기 아주 어렵게 돼버렸다. 이 점에서 윗글은 하나의 신뢰할 만한 좌표를 보여준다. 그 좌표란, 김우창 선생의 말을 빌려, “현실 속에 있으면서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는 일이다. 예술의 형상은 이 점을 보여준다.

세계의 가능성은 예술적 형상물에서 어떤 생생한 모습으로 암시된다. 세계의 알 수 없는 영역은 모호한 구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구체성 속에서, 말하자면 개별적 인물과 이 인물들 사이의 객관적 사건을 통해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서사라고 한다면, 이 서사의 이야기는 감각과 논리, 직관과 이성의 이원론을 지양한다. 예술적 창조행위의 가장 큰 매력도 바로 여기, ‘현실태로서의 가능성과 만나는 기쁨’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술이 아니라면, 예술의 이 형상적 직관이나 이 직관이 암시하는 형상적 질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여기를 초월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예술 없이 우리는 자신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철학도 자기 초월을 시도한다. 인간이 자신을 초극해야 한다는 것은 니체 철학의 제1 명제였다. 그러나 철학에서의 초극은 개념적 논증과 조작을 통해 이뤄진다.

신학도 초월적 존재를 상정한다. 그러나 이 초월은 신에게 의탁함으로써 이뤄진다. 신학처럼 초월적 존재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또 철학처럼 개념적 추상에 기댐 없이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초월이 감행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예술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이것을 극단화한 것이 낭만주의다. 낭만주의의 강령인 ‘세계의 시화(詩化)’는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이때 철학과 과학 그리고 신학도 모두 시로 용해된다).


# 형상의 기쁨

▲  문광훈 충북대 교수
지금 여기에서 이곳을 벗어나 저 먼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이 형상화 과정이라면, 이 형상화에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흔히 있는 기쁨이 아니라 드문 기쁨이고, 이 기쁨은 세속적이라기보다는 초월적이다. 예술에 기대어 우리는 초월적·형이상학적인 것의 언저리에 가닿는다. 이 형상 덕분에 우리는 신적인 것의 옷자락 혹은 그 주름을 만질 수 있다. 예술의 기쁨은 형상의 기쁨이다.

형상의 기쁨이란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가 예술가로서 형상을 ‘만드는’ 기쁨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을 독자·관객으로서 ‘만나는’ 데 있다. 전자가 창조적·생산적 기쁨이라면, 후자는 수용적·이해적 기쁨이다. 예술가의 기쁨은 그것이 형상물을 1차적으로 창조한다는 점에서 수용자의 기쁨보다 더 능동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수용자의 기쁨은 예술가의 창조적 기쁨보다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수용자가 생산자보다 다수라는 점에서 ‘보다 확대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형상의 기쁨에는 생산적 기쁨의 적극성과 수용적 기쁨의 확대성이 포개져 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가의 표현은 세계의 숨은 질서-보이지 않는 리듬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정치 프로그램처럼 명령적이거나 지시적이지도 않고, 도덕률처럼 훈계적이거나 교설적이지도 않다. 또 철학의 언어처럼 개념적이거나 논증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예술이 섬세한 감수성의 표현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형상 속에서 세계의 전체성과 무진성(無盡性)을 구현하는 리듬과 운율과 생명의 표현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플라톤적 이데아에 닿아 있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만나는 다른 현실의 지평-다른 세계의 깊이와 넓이가 아니라면, 예술이 대체 무엇을 추구하겠는가? 예술의 기쁨은 전혀 다른 지평의 이데아적 예감에서 온다.

그러므로 형상의 기쁨은 단순히 감각의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 속에서 감각을 넘어선다. 형상을 통해 우리는 사물의 본질(essence)과 만나고, 이 만남에서 자유를 느낀다. 인간의 여러 다른 활동들-과학이나 정치·경제 혹은 철학까지도 이 점에서만은 예술에 뒤진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많은 예술가들이, 그가 시인이든 화가든 음악가든, 혹은 영화감독이나 건축가든, 자신의 표현충동을 억누를 수 없는 이유는 이 같은 형상의 탁월성, 이 탁월성이 주는 근원적 기쁨에 있을 것이다. 형상의 기쁨은 자기 초극의 기쁨이고 실존적 변형의 기쁨이다. 오직 예술에만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전혀 다른 세계의 기쁨이 있을 것이다. (문화일보 3월 20일자 24면 15 회 참조)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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