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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이미숙 논설위원 게재 일자 : 2018년 04월 18일(水)
文대통령, 닉슨式 치밀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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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논설위원

의욕 과잉 케네디, 蘇 회동 실패
신중 접근 닉슨, 中 회동 성공
文정부, 케네디式 이상주의 경도

판문점 정상회담 이벤트화 우려
김정은, 천안함 폭침 사과해야
北核폐기 관철해야 평화 가능


미국 대통령 가운데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에 대한 평가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린다. 케네디는 미국의 이상을 구현한 지도자라는 점에서 영원한 추앙의 대상이고, 닉슨은 그 치부를 드러낸 권력중독자로 저주받는다. 최근 개봉된 영화 ‘더 포스트’에서 워싱턴포스트의 전설적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는 케네디를 정치와 언론의 황금시대를 연 리더라고 회고하면서도, 닉슨에 대해선 악당에 둘러싸인 편협한 지도자로 묘사한다.

그런데 외교에 있어선 사뭇 다르다. 케네디가 취임 첫해인 1961년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진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첫 만남은 실패한 정상회동으로 기록된다. 케네디는 핵무기 해결 의욕만 앞세워 준비 없이 정상 회동을 했는데 대실패로 끝났다. 케네디가 “핵무기는 7000만 명을 10분 안에 죽일 수 있다”라고 운을 떼자, 흐루쇼프는 “그래서? 전쟁으로 갈지 평화로 갈지 미국에 달렸다”고 맞받았다. 케네디는 “그러면 전쟁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회동 후 “이런 식으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전략 없이 적대국 정상을 만나면서 당한 수모는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결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만든 힘이 됐다.

반면 닉슨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미·중 관계 정상화를 준비했다. 1972년 2월 방중에 앞서 헨리 키신저-저우언라이(周恩來)가 비밀회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걱정을 했다. 두 나라의 경제·안보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컸음에도 그랬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의 회동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웠고, 잘못되면 ‘외교의 끝은 전쟁’이라는 말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고 보고 모든 경우에 대비했다. 핑퐁외교로 분위기를 만들고, 키신저-저우언라이 채널로 사실상 합의를 한 뒤 정상회동에 나섬으로써 세계사적 대전환을 이뤄낼 수 있었다.

4·27 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는 모습은 취임 초 케네디의 이상주의적 행보와 닮았다. 회담 의제도 확정하지 못했으면서, 군사대결 종식 선언을 하겠다는 의욕을 보이는 게 바로 그렇다. 청와대가 4·27 회담 표어로 ‘평화, 새로운 시작’을 제시한 것을 봐도, 핵심 이슈인 북핵 폐기에서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핵무기 위험성을 얘기해봐야, 김정은은 “그래서?”라고 흐루쇼프식으로 받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북한은 핵보유국 대신 ‘전략적 지위 확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핵 문제를 회피하겠다는 시사일 수 있다. 김정은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면담 때 ‘핵·재래식 무기를 남측에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힌 만큼, 핵은 의제가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이 미·북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판문점 회담에서 케네디식 의욕을 앞세우는 대신 닉슨식 치밀함을 갖고 김정은에게 모든 것을 얘기해야 한다. 첫째, 설명에 긴 시간이 필요해도, 얼굴을 붉히는 상황이 되더라도 북한의 정상국가 염원과 핵무기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핵 폐기가 북한 문제 해결의 대전제임을 납득시키는 게 성공의 첫 단추다. 둘째, 김정은이 새로운 남북관계를 원한다면, 자신의 공식 집권 이전에 일어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그리고 무인기 남침 등 수많은 대남 도발에 대해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해야 한다. 유감 및 재발 방지 약속은 기본이다. 그래야 언젠가는 6·25 전쟁 책임 문제도 짚을 수 있다. 셋째, 김정남 독극물 VX 살해사건 이후 북한의 화학무기 문제와 북·시리아 화학무기 커넥션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입장도 밝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직한 중재자로 기록될 것이다.

이런 노력 대신, 듣기 좋은 소리만 주고받으며 남북정상회담 생중계 등 보여주기식 이벤트만 나열한다면 김정은의 위장 평화공세와 시간끌기에 이용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핵 있는 평화’도 가능하다는 환상을 갖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한국판 ‘체임벌린 모멘트’가 조성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김정은의 선의(善意)에 국가의 생존을 내맡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오는 5~6월 김정은과의 회담이 실패할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옵션을 동원하려 할 것이고, 이럴 때 한·미 동맹 균열도 심각해질 것이다. ‘평화의 새 시작’을 원한다면, 김정은이 핵·화학 무기를 내려놓는 것 외엔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게 ‘시작을 위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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