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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8년 05월 08일(火)
소박하면서도 현대적 감성… ‘고졸한 아름다움’ 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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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근의 1954년 작품인 ‘절구질하는 여인’.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마티에르가 눈길을 끈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으며 크기는 130×97㎝이다.

■ 전준엽이 만난 한국의 美感 - (6) 시간을 넘어선 가치

과거 ~ 미래 관통하는 ‘보편성’
표피에 반응하는 쾌감이 아닌
내부까지 파고드는 진한 울림

日 료안지 사찰의 ‘돌의 정원’
독특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미니멀리즘的 현대성과 소통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한국은
투박하고 은은한 조각 많은데
씹을수록 우러나오는 깊은 맛

현대회화 박수근으로 이어져
털이 닳아서 딱딱해진 붓으로
캔버스에 물감 겹발라 찍어내


‘오래된 미래’. 문명 발달로 예정된 환경 재앙을 향한 경고다. 스웨덴 환경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인도 북부 오지 라다크에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전통 가치관의 붕괴와 그에 따른 환경 파괴를 비판한 책의 제목으로 쓰이면서 유명해진 말이다. 모순된 글귀 같지만 잘 따져보면 가치의 영속성이라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오래전부터 가치가 있었고, 현재에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통하는 가치. 보편성이다.

시간을 넘어서는 아름다움도 그렇다.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처럼 자연스럽고 현대 감각에도 어울리는 아름다움. 이마누엘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파인 아트(Fine Art)’의 키워드로 말한 영속적인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이다. 이런 쾌감은 어떻게 가능할까.

감정의 표피에 반응하는 울림이 아니라 감정 내부까지 파고드는 진한 울림이 있어야 한다. 감정의 껍질만 건드리는 울림은 조용한 호수에 이는 물결의 파문처럼 섬세하고 넓게 퍼져 나가지만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20세기부터 번성한 대중 예술 같은 것이다. 이에 비해 감정의 밑바닥까지 뒤흔드는 울림은 바다를 뒤집어엎는 쓰나미 같은 거센 파도다. 한번 몰아닥치면 영원한 상흔을 새기는 것과 같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쾌감엔 쉽게 반응하지만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으로 저급 예술이 이런 쾌감을 생산한다. 이에 비해 클래식 음악과 같이 감각의 표피를 뚫고 감정 내부까지 파고드는 쾌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파장이다. 이처럼 지워지지 않는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영속적 쾌감을 준다고 칸트는 말한다.

옛것에서 미래를 보는 심미안을 가진 예술가들은 ‘오래된 미래’ 같은 예술 창조를 추구한다. 칸트의 파인 아트 개념을 실천하는 예술이다. 논어에 나오는 ‘온고지신(溫古知新)’이나 연암 박지원이 말한 ‘법고창신(法古創新)’ 같은 세계다. 서구 가치관 우선의 모더니즘이 휩쓸었던 20세기가 지나면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과 어울리는 새로운 가치다.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는 이런 생각을 담아낸 지난 세기 후반부터의 흐름이다. 미국의 ‘뉴페인팅’은 기존의 회화 방식에 다양한 표현 재료를 접목해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냈고, 표현주의라는 기존 틀에서 새로운 표현 어법을 찾은 독일의 ‘신표현주의’도 그렇다. 역시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로 불리는 프랑스 ‘신 구상회화’도 지난 시절 산물인 구상적 표현 방법으로 참신한 회화의 미래를 예측했다.

이탈리아가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로 제시한 ‘트랜스 아방가르드’는 대놓고 오래된 미래를 미학으로 삼았다. 자기네 전통 회화 정신에서 코드를 바꿔 전위적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신화의 세계나 폼페이 벽화 이미지에서 현대성의 실마리를 찾아 새로운 감각으로 재창조해 이탈리아 회화 위상을 높였다.

과분한 물질문명 반작용 덕분에 정신의 다이어트로 주목받는 ‘미니멀리즘 가치관’도 그렇다. 동양 전통 속 절제의 미학이 현대적 가치로 전이된 경우다. 일본에서 번성한 선불교의 정신성과 궁합을 맞춘 젠 스타일 미학이 대표적이다. 일본이 미니멀리즘 디자인과 건축으로 21세기 자포니즘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런 연유다.

▲  교토 료안지 돌의 정원.

교토에는 료안지라는 사찰이 있다. 15세기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는 ‘돌의 정원’이 유명하다. 현대 추상회화가 연상되는 오래된 흙담을 배경으로 가로 25m, 세로 10m의 하얀 모래 위에 15개의 크고 작은 돌이 담박한 산수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선종의 정신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데, 특히 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제된 아름다움이 미니멀리즘적 현대성과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도 이곳에 반해 자신의 작품으로까지 제작했다.

우리의 전통 미감에도 오래된 미래가 보이는 것이 있다. 고졸한 아름다움. 원래부터 있어 온 것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소박하지만 현대적 감성으로도 손색이 없는 미감이다. 이런 아름다움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리의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온 것으로 정체성이 분명하다.

아프리카 남부에는 짐바브웨라는 나라가 있다. ‘돌로 만든 집’이라는 멋진 뜻이다. 여타 아프리카 지질과 달리 이곳에는 나라 이름으로 쓰일 만큼 돌이 많다. 그런데 그 돌이 예사롭지 않다. 색채가 다양하고 석질이 단단해 조각 재료로는 그만이다. 그래서인지 이 나라에는 기원전부터 석조 문명이 발달했다.

이런 환경은 결국 독특한 현대 조각을 일구어냈다. 그게 ‘쇼나 조각’이다. 짐바브웨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쇼나 부족이 만들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쇼나 조각을 처음 보았을 때 돌의 오묘하고 다양한 색채에 놀랐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시적 느낌이 서양 조각에서 보이는 세련된 감각과 어우러져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석질이 독보적인 조각 문화를 만든 것이다. 이처럼 자연 환경은 예술을 잉태하는 자궁 같은 역할을 한다. 가장 질 좋은 대리석이 나오는 이탈리아나 그리스에서 일찍이 조각이 발달한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는 산악 국가다. 대부분 바위산으로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주류를 이룬다. 다루기가 까다로운 화강암으로 만든 전통 미술 작품은 투박할 수밖에 없다. 돌의 견고한 성질을 달래 솜씨를 보여주기에는 힘이 부친다. 장식을 입히는 데도 한계를 느낀다. 소소한 치장은 넘겨버리고 핵심만 담는 방법이 편했을 것이다.

▲  경주 남산 남면승려상.

따라서 이런 재료로 만든 우리의 전통 조각은 투박하고 몽롱한 형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게다. 눈앞에서는 화강암의 꺼끌꺼끌한 질감만 보일 뿐이다. 조금씩 발걸음을 뒤로 물리면 형상이 슬며시 배어 나온다. 이래서 은은한 미감이라는 말이 타당해 보인다. 마치 질감이 튼실한 현대 회화를 대하는 느낌이다. 화강암이라는 다루기 힘든 재료 때문에 비롯된 미감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고졸한 아름다움이다.

이런 미감은 현대회화에서도 보인다. 박수근(1914∼1965) 그림이 그렇다.

그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살았다. 죽어서야 비로소 인정받았고,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가 됐다. 독학으로 독창적 화법을 만들어 가장 한국적인 미감을 현대로 이어주었다.

천재 화가의 삶치고 그의 일생은 평범했다. 천재의 삶에 흔히 따라붙는 드라마틱한 연애나 기구한 운명의 반전, 괴팍한 습관이나 기행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힘겨웠던 시대인 해방 공간과 전쟁을 맨몸으로 헤쳐 온 성실한 가장의 모습만 있다.

강원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의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이 전부다. 정규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자신의 삶에 화가의 씨앗을 심은 것은 열두 살 때 책을 통해 본 밀레의 ‘만종’으로부터 비롯됐다.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겠다는 꿈으로 삶을 단련했고, 결국 ‘한국의 밀레’가 됐다.

박수근은 부두 노동자로 날품을 팔았고,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 곤궁한 삶을 추슬렀다. 그런 삶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어진 마음과 진솔한 생활을 그려내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를 표현하려고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마티에르와 간결하면서도 투박한 선이 나오게 되었다. 재료를 풍족하게 쓸 수 없던 탓에 직접 개발한 마티에르가 ‘박수근 회화’를 만든 셈이다. 캔버스에 물감을 여러 겹 발라 두꺼워진 화면에 털이 닳아 버린 몽당붓으로 찍어 만든 기법이다.

▲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박수근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에서 태어나 원하는 만큼의 미술 교육을 받았다면, 그리고 풍족하게 재료를 쓸 수 있었다면 박수근식 회화가 나왔을까. 모를 일이다. 붓털이 닳고 닳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해진 붓으로 개발한 자신만의 방식이 우리의 고졸한 아름다움과 맞아떨어지게 됐다. 한국 산천에 지천으로 깔린 화강암의 투박한 표면을 닮은 화면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렇듯 세련되지 못하고 오래된 느낌의 그림을 사람들은 왜 좋아할까. 한국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표적인 음식은 김치와 된장이다. 이들의 독특한 맛은 발효에서 나온다. 오래 묵혀 삭아버린 맛. 혀끝에서는 거칠어 금방 녹아들지는 않지만 오래 씹을수록 혀 깊숙이 머무르며 우러나오는 깊은 맛. 그래서 여운이 오래가는 것이 발효의 맛이다.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익혀 만들어 민족의 인자처럼 돼버린 생활의 맛이다. 이 맛이 다스려낸 감성이 우리 미감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고졸함이다.

박수근 회화가 보여주는 맛이 이와 닮았다. 사발에 부어 마시는 막걸리나 뚝배기에 끓여낸 된장찌개 같은 맛이다. 그래서 한국인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그림이 됐고, ‘국민 화가’로 불리고 있다. 이제는 세계인이 이 맛을 주목하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변두리 화가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미술계에 학연, 지연이 전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더 큰 문제는 서구의 추상표현주의를 추종하던 1950∼1960년대 화단에서 박수근 화풍을 너무나 촌스럽고 생소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낯선 그림이 외국인들 눈에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회화로 보였다. 미술시장 기능이 거의 없었던 시절에 박수근의 그림을 눈 밝은 외국인들이 수집하기 시작했으니까.

(문화일보 4월 10일자 22면 5 회 참조)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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