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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 게재 일자 : 2018년 05월 23일(水)
나는 비겁하지 않지만 비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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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 = 김의규

구자명·김의규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5) 흐르는 시간은 어디에 있나

책임질 일 만들고 싶지 않은데
내 아내는 아이를 적극 원하네
모두 단독자… 어쩌자고 뭘 남겨

생부 주지로 있는 절에 가서
공양주 보살이 되신 어머니
대처승 허락되지만 결합안해

아버지가 보낸 아리송한 話頭
‘시간은 흐름이 없다…
흐름이 없으면 시간이 없다’


초파일을 앞두고 시내 곳곳에 색색의 연등이 매달렸다. 세월호 추모일 즈음해 대체로 그래 왔듯이 5·18 기념일도 며칠 전부터 종일 뿌려대는 눈물 같은 비로 축축했다. 충청도 산골의 노승한테서 매해 이맘때면 부쳐져 오는 초파일 휘호가 당도했다. ‘시간은 흐름이 없다. 흐름이 없으면 시간이 없다.’ 한글 궁체로 쓴 그것엔 법명 대신 절 이름을 새긴 낙관이 찍혀 있고 그 아래엔 모란꽃 압화가 몇 닢 붙어 있었다. 어머니 솜씨였다. 그 발그레한 마른 꽃잎들에서 여인의 기다림이 느껴졌다. 한 번 다녀가거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청하고 있었다. 철은 한숨을 쉬었다. 간밤에 퍼붓는 빗속에서 3차까지 이어진 회식 술이 피로한 숨결을 따라 거꾸로 치솟는 듯했다. 철은 욕실로 향했다.

―나는 비겁하다.

철은 속옷을 벗어 세탁물 바구니에 던지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오랫동안 내 욕구나 고통과 마주하기를 거부해왔어, 비겁하게. 아내는 마시던 모닝커피마저 개수대에 팽개치듯 쏟아버리고 전에 없이 신랄한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십여 분 철에게 쏘아붙인 그녀는 불임클리닉에서 온 안내장을 구겨 그의 발치에 던지고선 입은 차림 그대로 외출해버렸다. 그녀는 지난봄 장모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해 왔다. 아파트 베란다 창 아래 작은 정원에서는 장모가 좋아하던 라일락도 생모가 좋아하는 모란도 다 지고 넝쿨장미 향이 뭉클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을 넘기도록 그는 한 번도 아내에게 딱 부러지게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욕조로 발을 들이려다 옆 벽 커다란 거울에 비친 남자의 반신을 보고 철은 멈칫했다. 뱃살이 두꺼워지고 머리숱이 성겨진 중년 사내의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은 아직 바라나시의 강나루에서 거룻배 품팔이를 하는 장발 청년이었다. 그땐 얼마나 고독했던가. 또 자유로웠던가. 그러다가 비 오는 화장터에서 여행 온 숙을 만나 그 고독과 자유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을 땐 이미 그 생활도 진력이 나 있던 터였다. 한데 혼자 있는 자기 이미지는 어째서 늘 그때의 모습으로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 철은 거울 속 남자에게 동의를 구했다. 모두가 단독자인 거야. 홀로 왔다 홀로 갈 인생, 어쩌자고 뭘 또 남겨….

―나는 비겁하지 않다.

철은 평소와 달리 샤워기물을 차게 하여 머리를 적시며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내가 알아온 아내는 누구였던가? 숙, 그녀는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

방학 때 농활 내려온 대학생을 사모해 여름 내내 그를 쫓아다니다 마을 안산 어느 묘지 뒤에서 나눈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아이를 낳게 된 시골 처녀. 그러는 동안 운동권 수배자로 도피 중에 숨어든 절에서 승가의 인연을 받아들여 머리를 깎아버린 철학도. 삼촌 호적에 올라 외숙모를 어머니라 부르며 자라나는 자식을 멀찌감치서 혼자 뒷바라지하며 살다가 늘그막에 아들의 생부가 주지로 있는 절에 가서 공양주 보살이 된 생모. 대처승이 허락되는 종단의 사찰이었지만 그들은 끝내 정식 결합을 하지 않았다. 그분들도 나름 최선을 다해 자기 생을 살아내신 거야. 결혼 전에 함께 절로 찾아가 그들을 만나고 와서 숙이 했던 말이다. 계속 맞은 찬 물줄기로 머리가 얼얼했지만 철은 무언의 항변을 계속했다.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일에 대해 책임을 피하려는 게 아니잖아. 굳이 책임질 일을 일부러 만들고 싶진 않다는 건데, 잘못인가? 여자의 모성구현 본능을 존중해서라도, 하고 그녀는 말하고 싶은 듯 보였으나 다행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했더라면 나는 대답이 궁해졌을 테지….

―나는 비겁하지만 비겁하지 않다.

철은 요즘 들어 부쩍 탈모가 심해진 머리에 두피 영양제를 바른 후 손가락으로 마사지를 했다. 세상사로 골머리가 쑤실 때면 아버지의 산사를 떠올리고 골방에 틀고 앉아 화두삼매에 든 납자를 상상하면서 위로받는 버릇이 있는 내가 머리털 좀 빠진다고 이 요란을 떨다니! 그는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때 인도에서 돌아와 숙과 다시 만나는 대신 아버지의 절로 갔어야 했어. 그리고 내 심연의 카르마와 제대로 맞닥뜨렸어야 했다. 하나 그땐 방황에 지쳐 사위어가던 젊음의 잿더미 속에서 열정의 잉걸불을 살려내 지펴준 이가 숙, 그녀였지.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 속에 내가 들어와 주기를 호소했어.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구애를 뿌리치지 못했던 것처럼 사랑의 안착을 원하는 그녀의 구혼을 차마 물리칠 수 없었지. 돌이켜보면 나 자신보다 그녀에게 더 충실했던 셈인데 왜 이제 와서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걸까?

―나는 비겁하지 않지만 비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시간은 흐름이 없다…. 아버지는 무슨 낌새를 채시고 이런 화두를 보내셨을까? 그래, 시간은 원래 흐름의 속성이 있어서 시간으로 성립되는 거니까 흐르는 것이 또 흐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한데 시간이 흐르지는 않지만 흐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현상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아내가 돌아오면 이렇게 해명하면 어떨까? 내가 비겁한 건 아니지만 비겁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그런데 노승은 분명히 덧붙였다. 흐름이 없으면 시간이 없다, 라고. 그럼 이것은 ‘이고, 아니고’가 아니라 ‘있고, 없음’의 문제인가….

욕실 밖에서 아내가 돌아온 듯, 인기척이 느껴졌다. 철은 아리송한 화두가 촉발시킨 자기문답에 빠져 있느라 필요 이상 지체된 샤워를 서둘러 끝내고 욕조 밖으로 나왔다. 그가 거울 앞에 다시 서자, 뽀얗게 서린 수증기 너머에서 안개 자욱한 강을 가르며 젊은 뱃사공이 시나브로 모습을 드러냈다.

구자명 소설가·한국미니픽션작가회 창립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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