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무역路·문명의 길 밝힌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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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의 세계사 / 주강현 지음 / 서해문집

해양문명사에 천착해 오랫동안 바다와 관련한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냈던 저자가 등대를 주제로 인류 문명사를 조명한다.

고대 인류 문명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의 파로스 등대부터 오늘날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 시대 등대인 헤라클레스 등대, 세계 등대 유산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란테르나 등대, 광학기술의 혁신을 상징하는 플레넬 렌즈를 처음 장착한 프랑스의 코르두앙 등대에 이르기까지 기행을 통해 찾아간 등대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에게 등대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면서 문명사를 비추는 등불이다. 예컨대 로마 시대 헤라클레스 등대는 카이사르의 대서양 진출을 상징한다. 저자는 헤라클레스 등대를 소개하면서 등대가 건설될 무렵 성장했던 카이사르의 대서양 진출 야심과 전략, 그리고 해상무역의 주요거점이 된 갈리시아에 대해 다룬다. 또 페니키아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제노바, 베네치아로 이어지는 지중해 패권의 중심에서 황금시대를 증거하는 제노바의 란테르나 등대를 말하면서 세계무역의 주도권이 지중해에서 대서양 상인들에게 넘어가는 과정을 들려준다.

이어 북해와 발트해의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바이킹의 바다와 한자동맹의 무역로에 불을 밝히던 등대를 찾아가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 세력이 이끈 대항해시대의 등대와 ‘제국의 빛’을 밝힌 영국의 등대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들 사이사이로 등대의 건축적 의미와 건축양식, 깃들어 있는 신화 등의 이야기까지 곁들이고 있다. 또 등대를 어떤 건축적 기법으로 누가 설계했으며, 어떤 필요로 지었는지는 물론이고, 당시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함께 건축적 양식의 변화와 미학적 풍조까지 두루 소개돼 있다.

등대가 가진 역사적 의미의 비중 차이 때문인지 유럽의 등대에 비한다면 분량이 아주 적지만, 중국과 동아시아의 등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저자는 타이완 해협에서 시작된 중국 등대의 역사를 차근차근 짚고, 제국주의로 나아간 일본 메이지(明治) 등대의 이야기도 다룬다. 한국의 등대는 식민시대 정복의 횃불과 다름없었으며, 한반도 연안에서 일제가 세운 등대가 하나하나 켜질 때마다 식민지의 어둠은 깊어갔다.

저자는 서구중심의 해양문명사가 가진 오리엔탈리즘 시각의 극복에 대해서도 말한다. 대항해시대가 안달루시아의 이슬람유산에 빚지고 있으며, 인도양은 일찍이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의 무대였다는 것. 서양식 등대 관념에서 벗어나면 이슬람에서는 모스크가, 중국에서는 산정에 세워진 불탑이, 일본에서는 사찰의 석등도 모두 등대였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 책은 등대 기행의 역사와 경제·문화사적 의미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카펫을 짜듯 화려하게 그림을 그려낸다. 등대 하나를 놓고 꺼내놓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수다스럽고, 다양한지 마치 책 앞에 풀어낸 털실 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털실 뭉치를 차분하게 하나하나 고르다 보면 등대를 넘어 그 등대가 비추고 있는 해양을 중심으로 한 흥미진진한 문명사와 만날 수 있다. 376쪽, 2만 원.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