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음악 파일 유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정선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교수 가수

LP 음반 자료들 모두 폐기해
원본 구하기 어려워 안타까워

수다 떠는 녹음방송하러 갈 땐
기타 가져가서 라이브로 노래

손에 만져지는 LP 추억 아련히
파일로 돌아다니는 시대 씁쓸

지금도 가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할 때가 있다. 이야기하다가 음악 한번 듣고 또 이야기하다가 음악을 듣고 하는 프로그램의 진행 방식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았다. 중간에 청취자의 전화를 받아서 즉흥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던 방식이 지금은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청취자의 문자로 바뀐 정도라고 할까.

그러나 프로그램의 진행 방식과 달리 음악을 들려주는 메커니즘은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게 많이 변해왔다. 턴테이블에 LP 음반을 올려 음악을 틀면서 방송을 진행하던 시절에는, 생방송이 아닌 녹음방송이라도 미리 하려면 실제로 생방송을 하는 것처럼 얘기하고 음악을 들으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그대로 릴 테이프로 녹음해서 방송 시간이 되면 릴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걸고 사전에 녹음된 것을 방송으로 내보내곤 했다. 그러다가 CD가 대세가 되면서 턴테이블 대신에 CD 플레이어가 점점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지만…. 그때도 프로그램의 사전 녹음은 릴 테이프로 했다. 녹음하다가 행여 NG라도 나면 테이프를 되돌려 들으면서 틀린 부분을 찾는 삐리릿 삐리릿 소리가 정겹기도 했다.

일상생활 속에 컴퓨터가 파고들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후반에 방송국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음악 자료를 파일로 변환해서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미처 파일로 바꾸지 못한 새 노래들은 CD를 직접 플레이어에 넣어서 음악을 들려주며 음원 파일과 함께 섞여서 운용되던 과도기가 몇 년 지나더니, 이젠 새로 나오는 음반도 모두 DB에 담기게 됐다. 그리고 방송국마다 있던 라이브러리의 LP 음반들은 존재 가치가 없어져 처분해 버렸다. LP 플레이어인 턴테이블도 방송국에서 사라졌다. 가끔 황학동 같은 데서 수집된 LP를 살펴보면 방송국 이니셜을 매직펜으로 흘려 쓰거나 방송국 자체 심의를 마쳤다고 라이브러리에서 분류한 스티커가 붙은 음반들을 만나게 된다. 그때 처분한 음반들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는 거다.

릴 녹음기도 진작에 사라지고 이젠 모든 녹음을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직접 기록하는 시대가 됐는데, 프로그램 중간에 나오는 광고 음악은 아직도 릴 테이프를 사용하고 있어서 스위치를 누르면 광고 음악이 담긴 카트리지가 자동으로 플레이 되는 광경을 보기가 흥미롭다.

그렇게, 이제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필요한 음악이 있으면 조정실 컴퓨터로 DB를 불러 필요한 음악 파일을 끌어와서 플레이하면 되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 지금처럼 정밀하지 않던 초창기 디지털 압축 파일 기술로 DB에 담긴 음원의 음질이 형편없어서, 요즘처럼 퀄리티가 좋아진 음원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더욱 초라하게 들리겠지만, 옛날 음악이라 당연히 엉성한 사운드라고 그냥 매도당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안 좋다. 그렇다고 예전에 디지털화했던 음악들을 지금 시대의 기술로 DB에 다시 담기에는 너무 엄청난 작업이기도 하고, 사실 그 LP 음반 자료들을 모두 폐기한 바람에 원본을 구하기가 힘들어, 옛날 음악은 그냥 초라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발전한 기술 덕분에 프로그램을 사전 녹음하기가 아주 편리한(?) 세상이 됐다. 예전엔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녹음하려면 얘기를 나누고 음악을 듣고 하면서 1시간이 조금 더 걸렸는데, 요즘은 20분 정도면 1시간짜리 녹음을 마치곤 한다. 음악 사이에 들어가는 멘트만 녹음하고 나중에 그 사이사이에 노래 음원과 중간 광고를 파일로 가져와서 붙이면, 프로그램 녹음 끝∼이니까. 전체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20분 정도 되는 시간에 만들어 버린다. 음악의 분량이 많을수록 시간은 더 줄어든다. 물론 진행자는 음악의 곡명만 듣게 되고 실제로 음악은 듣지 못하는, 그런 요즘의 녹음 방식을 나는 싫어한다. 하지만 바쁘게 사는 지금 시대엔 모두가 그런 방식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진행자와 출연자가 음악을 같이 들을 수 있어서 곡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공감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출연자와 나눈 이야기만 기억할 뿐, 그가 들려주고 싶었던 음악은 들어 보지도 못하고 녹음을 마치게 되니, 나중에 방송을 찾아 들으며 모니터링하기까지는 누가 무슨 음악을 새로 발표했는지 알 수가 없을 게다.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니까 녹음 방송을 하러 가서 음악을 들려주지 못하고 수다만 떨다가 돌아오는 것이 재미없어서 진작부터 나는 일부러 음원 대신에 기타를 가져가서 라이브로 노래를 불러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곤 했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이해하기 쉽게 내 관점에서 설명하며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여러 회에 걸쳐서 녹음한 적이 있었다. 내가 내건 조건은 딱 하나, 음악 파일을 불러오되 직접 음악을 실시간으로 들으며 진행하자는 거였다. PD로서는 3, 4개 프로그램을 만들 시간을 손해 보는 거였지만, 다행히도 내 의견대로 진행돼 기분 좋게 프로그램을 녹음할 수 있었다.

몇 달 전에는 음악 평론이 직업인 어떤 친구가 내가 만든 음악을 모아 프로그램을 진행하겠다고 해서 필요한 곡명을 적어 줬다. 나중에 방송을 들어보니 같은 제목이지만 전혀 다른 버전의 노래를 가져다 붙여서 어이없어한 적이 있다. 아마 곡을 채 들어 보지도 않고 곡명만 보고 파일을 가져다 붙여서 그런 일이 생겼을 거라고 짐작한다. 뭐, 하여간에 오랜 세월 음악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LP나 CD 등으로 기억하고 있는 내게, 지금처럼 형체 없이 파일로만 돌아다니는 음악의 시대는 참 재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