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을 읽다보면 의아한 점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겨우 20대밖에 안 된 청년 군주 세종이 나이 많은 여러 신하를 휘어잡고 국정을 끌어가는 점이다. 과도한 선물과 접대를 요구하는 중국 사신이나, 걸핏 하면 ‘대장경 원판’을 달라고 생떼 쓰는 일본 사신들에 대해서 거의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다가 마침내 실리를 제대로 챙기는 모습도 얼른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대체 세종은 어디서 그렇게 노련하게 정치하는 법을 배웠을까? ‘세종실록’을 되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부왕 태종의 존재이다. 태종은 세종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민무구 형제의 도발로부터 나이 어린 그를 보호했으며, 결정적으로 양녕대군 대신 세자의 자리에 앉혔다. 무엇보다도 그는 세자 교체 66일 만에 전격적으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그야말로 태종이 없었으면 세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점은 왕위를 물려준 태종이 세종에게 해준 정치자문이다. 물론 5년여의 상왕 통치는 세종의 입장에서 볼 때 자존심 상하고 참기 힘든 것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태종은 1418년 8월 10일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주상이 장년(壯年)이 되기 전까지 군사에 관한 일은 내가 친히 청단할 것(予親聽斷)”이라고 조건을 달았다.
세종을 ‘정치적 미숙아’로 간주하고 후견인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에서 결단하기 어려운 일(國家難斷之事)’이란 매우 주관적인 것이라서 대마도 정벌 등 ‘군사에 관한 일’은 물론이고, 인사와 재정, 그리고 외교에 관한 일까지 태종이 마음먹기에 따라선 개입하지 못할 정치영역은 없었다.
세종이 똑똑했던 것은 그렇게 주어진 조건을 부정하고 무리하게 뒤집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수용하고 즐기는 자세를 보인 점이다. 심지어 그는 ‘심온사건’으로 처가가 박살 나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연회에 참석해 밤늦게까지 춤추는 등 조금도 불만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불만은커녕 적극적으로 부왕의 거처로 찾아가 아뢰고 의논한 다음 부왕의 뜻대로 결정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가령 1422년(재위4년) 2월 20일에 세종은 수강궁에 문안하고 그곳에서 머물러 자고(宿) 있는데, 바로 그날 황희를 남원의 유배지에서 돌아오게 하고 직첩(職牒)을 돌려주게 했다. 양녕대군 쪽에 줄을 섰던 황희를 복권시켰을 때 예상되는 언관의 반대와 그에 대한 대비, 그리고 황희의 기용 등을 긴밀히 논의했을 것이다.
‘정치 멘토(Mentor)’라는 측면에서 볼 때, 태종 같은 스승도 드물 것이다. 태종은 회군(回軍)과 건국(建國)과 즉위(卽位)라는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를 헤치고 나간 사람이다. 평범한 변방의 무장(武將)의 아들로 살아갈 운명을 자기 손으로 바꾸어 왕위에까지 오른 ‘운명의 개척자’였다. 그런 그가 겪은 수많은 인물 이야기와 정치적 결정과 추진력의 중요성을 청년 군주 세종에게 세세하게 들려주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어떠한가? 물론 역대 대통령들이 태종과 같이 뛰어난 정치 스승은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 정상회담처럼 예민한 정치적 사안이 있는 지금, 하룻밤을 새워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자문하고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낮춰 지혜의 말들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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