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의 정치 역정…쿠데타 주역에서 ‘3金 정치’의 주역으로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풍운의 정치인’ JP 최근 모습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세. 이로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지난 4월 18일 신당동 자택에서 자유한국당 이인제 충남지사 후보를 만날 때 모습. 2018.6.23 [연합뉴스 자료 사진]

박정희·김영삼·김대중 정부 창출 주도했으나 ‘2인자’ 꼬리표 못 떼
내각제의 꿈도 못 이룬 채 영면

23일 타계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1926~2016년)는 한 마디로 풍운아(風雲兒)의 인생을 살았다. 5·16 쿠데타의 주역에서 박정희정권의 2인자로, 또 신군부에 의한 정치활동 금지 대상자를 거쳐 ‘3김(金) 정치’의 주역으로, 다시 민주자유당 창당·DJP 연합 등 연합정치의 주역으로 이어진 그의 인생역정을 압축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낱말은 없다. 지난 2004년 정계를 떠날 때까지 늘상 ‘2인자 정치’에 머물렀지만 그는 한국 현대 정치사를 뒤흔든 주요 사건의 현장에서 어김없이 중심에 있었다.

◇지방 유지 아들로 태어나 엘리트 군인으로 = JP는 1926년 1월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서 아버지 김상배와 어머니 이정훈의 7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지역 유지이자 한학자였다. 공주공립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이른바 일야일권(一夜一券) 습관을 실천하며 교양을 넓혔고 검도부장과 승마부장, 학생 중대장 등을 맡으면서 리더십도 키웠다.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청년기 그의 모습에선 해야 할 말은 하고야 마는 반항아적 기질도 엿보인다. 1944년 일본 주오(中央)대 유학 중 태평양전쟁 강제입대 방침에 반발해 귀국해 버렸는가 하면 대전사범학교 재학 중에는 교생 실습을 나가 일본인 교장을 폭행, 헌병대에 구금되는 일도 있었다. 1948년 서울대 사범대 중퇴 후 사병으로 입대했을 때엔 혹독한 훈련에 반발해 탈영하기도 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8기)를 거쳐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되면서부터 비로소 엘리트 군인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5·16과 박정희정권 창출 = 1960년 3·15 부정선거부터 4·19 혁명에 이르는 정치적 격변은 엘리트 군인 JP의 인생에서도 중대 전환점이 됐다. 4·19 직후 그는 육사 8기 동기인 영관급 장교 7명과 함께 이른바 정군(整軍)운동에 나섰다. 3·15 부정선거에 앞장섰던 군 수뇌부와 부패·무능 장성들을 몰아내기로 하고 연판장을 돌렸다. JP는 민주당 장면 국무총리와 현석호 국방부 장관에게 정군 건의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오히려 군 내부 하극상 사건 주모자로 지목돼 구속됐고 강제로 예편당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JP와 젊은 장교들이 느꼈던 좌절과 분노는 결국 5·16 쿠데타 기획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육군 제2군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JP는 총 6항으로 이뤄진 ‘혁명공약’을 집필했을 뿐 아니라 쿠데타 이후 설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 재건국민운동본부 등을 기획하는 등 사실상 5·16의 설계자였다. 이후 그는 초대 중정부장, 공화당 의장, 제11대 총리 등을 거치며 명실상부한 박정희정권 2인자로 활약했다.

◇한·일 협정 체결 = 중정부장을 맡고 있던 1961년 10월 JP는 일본을 방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1951년부터 미국의 조장 속에 이어져 온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을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이후 현해탄을 넘나드는 수 차례의 회담 끝에 1962년 11월 JP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 간에 대일 청구권자금 규모를 확정한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작성됐고, 이는 1965년 6월 조인되고 8월 발효된 ‘한·일 협정’의 토대가 됐다.

밀실 합의의 산물이었던 ‘김·오히라 메모’는 JP의 1차 정계은퇴 원인이 됐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김·오히라 메모’는 명목을 명시하지 않은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과 민간차관(1억 달러 이상)의 규모만 적시했을 뿐이다. 일본의 강제 침탈에 대한 사과나 배상, 강제 징용·징병 및 일본군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인정 및 사과,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 인정 등 한·일 간 핵심 쟁점은 메모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이 메모를 토대로 체결된 한·일 협정을 통해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결과적으로 ‘김·오히라 메모’가 일본에 면죄부가 된 셈이다.

JP는 그러나 2015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에서 대일 청구권 자금이 포항제철, 울산화학공업단지, 경부고속도로 등 경제 성장의 마중물이 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을 정당화했다. 그는 “대일 협상은 누군가 죽을 각오로 나서 담판을 짓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역사의 난제였다”며 “‘이완용 같은 매국노’라는 소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번듯한 자유민주주의를 영위하기 위해 그 기반이 되는 경제 건설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라는 것”이라며 “오늘날 어느 선진국 못지 않은 자유민주주의, 그 바탕이 된 세계 경제 10위권의 경제력은 한·일 교섭에서 장만한 밑천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3김 시대’와 두 번째 2인자 정치 = 1979년 김재규 중정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사태, 뒤이은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의 12·12 쿠데타와 5공화국 출범은 JP에게도 정치적 시련으로 다가갔다. 19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보안사령부에 46일간 연금됐다 풀려났지만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은 JP에게도 새로운 기회였다. 4자 구도(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이듬해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의 ‘녹색 돌풍’을 일으키며 김대중(DJ) 평화민주당 총재,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 등과 함께 ‘3김 정치’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JP가 이끌었던 신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은 대구·경북(TK)까지 세를 넓혔던 15대 국회(1996~2000년) 때를 빼곤 충청을 기반으로 한 지역당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럼에도 JP는 충청 지역에서의 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1990년 민자당 창당과 1997년 DJP 연합 합의에 조연으로 참여, 마치 박정희정권에서 그랬던 것처럼 YS정권과 DJ정권에서도 ‘2인자 정치’를 이어갔다. ‘2인자 정치’를 통해 그가 꾀했던 것은 평생의 지론이었던 내각제 실현. 그러나 YS에 이어 DJ도 그의 이 같은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

◇노무현 탄핵과 좌절, 은퇴 = 9선(6·7·8·9·10·13·14·15·16대) 국회의원으로 3번(박정희·YS·DJ)의 정권 창출, 2번(11대·31대)의 총리 역임에 빛나는 JP의 정치역정에서 2004년 4월 15일 치러진 17대 총선은 마지막 좌절이자 마침표였다. 한나라당, 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나섰던 JP의 자민련은 탄핵 역풍 속에 참패했다. 자민련이 충남에서만 4석을 얻는 데 그쳤다. 비례대표 1번 후보로, 헌정사상 첫 10선 의원의 주인공이 될 것처럼 보였던 JP도 낙선했다. JP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JP는 결국 선거 패배 4일 뒤인 4월 19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자민련 당사에서 5·16부터 43년 간 이어 온 자신의 정치역정이 종료됐음을 선언했다.

JP는 훗날 자신의 증언록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사실 나는 좀 더 장엄하게 정치와 이별하고 싶었다.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자 했다. 온 지구를 하루 종일 덥혔던 태양이 서산에 이글거리며 지는 것처럼, 그렇게 내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었다. 내일 또다시 떠오를 태양을 기약하며 서해의 붉은 낙조로 빨려 들어가는 햇덩어리가 되길 나는 욕망했다. 괴테가 ‘창문을 열어라. 빛을 더…’라면서 죽음을 맞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기상(氣像)일 것이다.”

한국 정치사를 풍미했고, 대통령이라는 1인자 자리를 뺀 모든 것을 성취했던 그였지만 내각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씁쓸하게 퇴장했던 것은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