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評>‘虛業의 정치’ 그 진정한 의미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보수와 진보 추구 방향 달라도
공적 이익 틀 안에서 공존해야
사사로운 이익 앞세우면 안 돼

정당內 ‘집합행동’ 대책도 중요
후보자들의 중구난방 막아야
보수정당 개혁 논의에도 유효

고(故) 김종필 전 총리는 정치를 허업(虛業)이라고 했다. 실업(實業)과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정치를 실업으로 하는 사람은 욕망과 이기심을 바탕으로 선택하지만, 허업으로 하는 사람은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익을 추구한다. 이것이 정치인이 정치를 하는 이유이고 국민이 정치인을 따르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허업의 정치는 현대사회의 정치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보인다. 정치인도 돌봐야 할 가족이 있고, 친척이 있다. 공적 이익을 위해 자기 주변을 모두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김 전 총리가 바라는 허업의 정치가 공적 이익을 위해 개인의 사사로운 삶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건 아닐 것이다. 우선, 정치인은 개인적 삶을 위한 선택 이외에 국가 정책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일반인과 다르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은 일반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고 그에 따라 국가 정책을 선택하는 임무를 지니는 것이다. 허업의 정치는 이러한 정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지 공익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다음으로, 허업의 정치는 모든 정치인이 하나의 정책적 안건에 대해 똑같은 선택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인과 보수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인이 생각하는 공적 이익의 방향이 같을 수 없다. 허업의 정치는 공적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차이는 인정하되, 사적 이익을 공적 이익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얼마 전 바버라 부시 여사의 장례식에 모인 4명의 미국 전 대통령과 전·현직 영부인이 함께 찍은 사진은 이를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갈라져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러한 지향을 공적 이익의 틀 안에서 추구했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적 이익을 우선하는 허업의 정치는 집합행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제일 수 있다. 집합행동의 문제란, 각 개인이 자신에게 최대의 이익을 줄 수 있는 대안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 전체의 이익은 최적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는 선거 과정에서 후보와 정당 간의 관계에서도 관찰된다. 선거 과정에서 정당은 후보들의 집합체로서 공약의 실천을 보증한다. 정책적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후보들을 직접 선택하거나 그러한 후보를 받아들임으로써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공약 실천이라는 공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은 정당이 주는 이러한 이익을 향유하기 위해 정당에 참여한다. 동시에 이들은 동료 후보들이 기여하는 정책적 통일성에 무임승차하고 자신의 역량은 유권자의 추가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 쏟으려는 유인을 지닌다. 문제는 이러한 개인적 유인에 따른 선택이 많아질수록 정당은 정책적으로 통일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에 따라 공약의 실천 가능성도 희박해진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지난 6·13 지방선거는 허업의 정치를 실현했는지 여부가 결과를 좌우했다고도 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당선자들은 소속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를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소속 정당의 공적 가치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가 충분하지 않았던 야당 후보들은 소속 정당의 정책적 통일성보다는 자신의 역량을 선거 승리라는 실업(實業)에 집중했다고 할 수 있다.

선거가 끝난 이후 후자의 정당은 존폐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들 사이에 유권자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런데 정당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부르짖으면서도 허업의 정치 필요성을 누구도 강조하지 않는다. 소속 정당 후보의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은 정당이 필요한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거나, 선거 결과의 논공행상에 따라 리더를 교체하는 것을 개혁의 요지로 삼고 있다. 과연 그러한 논의와 개혁 방향만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민주화 이후 수십 년이 지났지만, 고인이 강조한 허업의 정치는 충분히 구현되지 않고 있다. 허업의 정치가 추구하는 지향이 지방선거 이후 활발한 정당 개혁의 논의와 한국 정치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