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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8년 07월 10일(火)
인간 현실을 담아내는 文化… 숭고와 야만은 ‘동전의 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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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마르와 아우슈비츠는 서구 유럽문화의 영광과 몰락에 대한 비유로 인용된다. 바이마르는 한때 괴테와 실러가 활동하던 문화도시였던 반면, 아우슈비츠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던 강제수용소가 있던 곳이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실러 동상, 아우슈비츠의 출입구, ‘각자에겐 각자의 몫을’이라는 글귀가 걸린 부헨발트 수용소 출입구 모습. 자료사진·문광훈 제공

■ 문광훈의 미학 에세이 - (19) 바이마르의 영광과 부헨발트의 몰락

獨 과학자 ‘하버’의 모순된 生
화학비료 발명 기아해결 불구
홀로코스트 독가스 개발 앞장
과학연구의 윤리성 고민 없어

바이마르, 동독 대표 문화도시
부헨발트, 25만명 강제수용소
의학실험·학살 5만6천명 숨져
8.7㎞거리 두곳…극과극 운명

삶의경탄·향유 위해 사는 인간
현실 직시 통해 자유획득 가능
고통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예술
문화의 존재이유도 여기에 있어


# ‘하버’라는 과학자의 생애

최근 어느 과학강연에서 프리츠 하버(1868∼1934)의 기구한 삶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는 공기 중의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고안해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다. 합성 암모니아는 화학비료의 원료로 사용돼 획기적인 식량 증산에 기여했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렇게 생산된 식량을 먹고 있으니 그 공헌의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가 개발한 암모니아 합성법이 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량살상무기로 사용되었다.

나는 독문학 수업에서, 그것이 현대 독문학이든 망명문학이든, 아니면 홀로코스트 관련 세미나에서든, ‘치클론 베(Zyklon B)’라는 이름을 자주 들었다. 그것은 흔히 ‘문명의 파국’으로 간주되는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돼 계속 등장한다. 바로 이 치클론 베를 개발한 과학자가 하버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화학무기로 원래 살충제로 만들어졌지만 나중에 독가스로 전용되었던 것이다. 5㎏의 치클론 베로 1000명을 죽일 수 있다니, 그 독성의 위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하버는 유대인이었지만 국수주의자였다. 같은 화학자였던 그의 아내는 독가스를 개발해 전쟁에 사용하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과학적 이상의 타락’이고 ‘학문을 오염시키는 야만’이라고 말렸지만 그는 귀담아 듣지 않는다. 1915년 4월 벨기에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독가스 공격을 그가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사실을 안 후, 부부는 말다툼을 벌였고, 그가 또 다른 독가스전을 준비하기 위해 집을 나서던 날 그녀는 그의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럼에도 하버는 전쟁 중에 과학자가 조국을 위해 연구하는 것은 당연하며, 화학연구든 독가스 연구든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서 다시 전선으로 떠났다고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하지만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하버의 삶도 위태로워진다. 그는 평생 독일을 위해 일했지만, 유대인에 대한 크고 작은 차별은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오랫동안 일하던 대학연구소를 사직한 후, 때마침 이스라엘로부터 연구직 제안을 받자 이를 수락한다. 그곳으로 가던 도중 그는 스위스에서 심장마비로 죽는다. 그의 나이 66세 때의 일이다.



# 학문의 사회적 책임

하버는 화학자로서 탁월한 연구자였지만 과학연구의 윤리적 토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한 것 같지 않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초래한 수많은 죽음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하버는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3주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고모들 손에서 컸다. 23세에 박사학위를 받고 라이프치히대의 오스트발트 교수의 연구조교로 3번이나 지원했으나 탈락한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이 무렵이다. 아마도 젊은 유대인 과학도인 자신의 인종적·신분적 정체성이 상류사회 진출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는 30세 때 정식교수가 되고, 3년 후 결혼한다. 하지만 그의 출중한 연구 열의와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학연구소에 자리 잡는 일은 빈번히 좌절된다. 이 거듭된 실패 속에서 그의 국수주의적 성향은 더 강화됐는지도 모른다.

하버의 기구한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착잡했다. 그것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것이지만 과학자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관련되는 ‘연구의 윤리’ 문제이기도 하다. 좀 더 넓게 보면, 지식과 행동의 문제이고, 앎과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욱 착잡한 것은 삶을 반성하고 표현하는 예술 활동에서도 그런 모순이 잠재돼 있다는 사실이다.



# “문화는 야만의 기록물”인가?

1987년 무렵의 일이다. 대학원 시절 한 세미나에서 발터 베냐민의 글-“문화의 기록물이 야만의 기록물이지 않은 채로 존재한 적은 결코 없었다”라는 문장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어 “전통의 연속성이란 가상일 수도 있다. 억압된 자들의 역사는 하나의 불연속성이다”라는 글도 읽었다. 머리가 아뜩해지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대학 2∼3학년을 지나면서 문학에 헌신하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결심한 이상 어떤 일이든 내가 선택한 일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거의 강박적인 생각을 갖고 살았다. 생업(生業)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에 전념하지 않고 이리저리 재거나 계산하는 것은 ‘불순하다’고까지 여겼다.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한다거나,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학문의 동료로 보지도 않았다. 학문이 마치 신성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던 나는, 학문도 사람이 하는 일의 하나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학자들이란 지극히 좁은 주제에 평생토록 매달리는 까닭에 그 어느 집단보다 선입견에 찬 무리인 경우가 많음을 알지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철없고 아둔한 시절이었다.

이런 어리석음으로 문학예술이나 문화가 그나마 순정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야만의 기록물’이라니, 이 무슨 부당하고 가혹한 판정이란 말인가? 게다가 전통이나 역사에서의 연속성이란 가상이고 거짓에 불과하다니. 역사의 연속성이란 기껏해야 ‘억압하는 자의 연속성’이고, 따라서 역사의 과제는 ‘피억압자의 불연속적 전통을 복구하는 데 있다’니, 베냐민의 논평은 너무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마치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처럼 세상에는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고 이 실낙원의 현실에서 의미를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절망과 환멸 속에서 몇날 며칠을 폭음과 탄식으로 횡설수설하며 보냈다.

지나치게 숭고한 관념은 실현될 수 없거니와 그것을 가지고 살 수도 없다는 엄연한 현실의 원리를 청년 시절엔 깨닫지 못했다. 인문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그 순결하고 오염되지 않는 영역임을, 적어도 그 당시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편견은 오래갔다. 그때 이후 나의 관심은 문학에서 창작으로, 창작에서 문학비평으로, 다시 문학비평에서 예술비평으로 점차 옮겨갔고, 독일에서 공부를 시작할 무렵에는 예술론과 미학이라는 좀더 구체적인 방향을 잡게 됐다. 그러면서도 그 시절 이후 겪었던 환멸과 그로 인한 착잡함은 공부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기만 했다.

인간이든 현실이든, 사회든 역사든, 그 어느 것도 일목요연하거나 조화롭거나 일관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현실을 변함없이 규정하는 것은 모순과 이율배반이다. 문학과 예술이 현실에서 움직이는 한, 그것은 이 현실을 담아야 하고, 이 거친 현실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한, 착잡하고 자기 기만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현실의 모순과 어떻게 만나고 대결하면서 그 현실을 견디고 쇄신해갈 것인지일 것이다. 모순에 대한 의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고, 모순의 인정과 그 직시가 없다면, 어떤 것도 진실돼 보이지 않았다. 지난 1년간 연재한 이 미학 에세이를 쓸 때도, 그것이 문학예술에 대한 것인 한, 그러했다. 예술과 문화를 둘러싼 이런 착잡함은 아마도 ‘바이마르와 아우슈비츠’라는 표현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 인간 말살의 세계유산

서구 유럽문화의 영광과 몰락에 대한 비유로 흔히 바이마르와 아우슈비츠가 말해진다. 바이마르는 독일이 통일되기 전의 동독지역으로, 드레스덴이나 라이프치히와 더불어 18∼19세기의 유서 깊고 전통 풍부한 도시들 중 하나다. 더욱이 이곳은 괴테와 실러가 활동하던 당시 최고의 문화도시이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폴란드의 오시비엥침 시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던 강제수용소가 있던 곳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오시비엥침의 독일식 발음이다.

아우슈비츠에는 3개의 수용소가 있었다. 제1, 제2, 제3 수용소는 각각 1940년, 1941년 그리고 1943년에 세워졌는데, 아우슈비츠의 유적은 대부분 2수용소인 비르케나우에 집중돼 있다. 이송된 유대인은 대부분 이곳의 가스실에서 죽었고, 그 숫자는 120만 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죽은 사람은 유대인뿐만이 아니었다. 폴란드인 수만 명 외에도 집시나 부랑자도 있었다. 또 아우슈비츠에는 무려 40여 개의 보조수용소도 있었다. 그러니 아우슈비츠는 단순히 역사박물관이 아니라 인류 최대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나치가 세운 6개 강제수용소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로 모인 사람들의 거의 절반은 도착 즉시 소각장으로 옮겨졌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들은 죽기 전까지 지속적인 강제노역과 굶주림,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 그렇게 죽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치의 유대정책은 위협적인 만큼이나 온갖 감언이설로 치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수용소 정문에는 “노동이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Arbeit macht frei)”는 그럴듯한 글귀가 붙어 있었다.



# 인문학은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1979년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인류에 대한 공헌이나 인간성의 증진에 기여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대량학살한 곳이라는 이유로 세계유산이 된 것이다.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참담한 고통의 현장이 인간의 현실이고, 이 현실의 실상임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 이 아우슈비츠와 바이마르 사이의 거리는, 구글 지도로 검색해보면 667㎞ 정도 되고, 자동차로는 6시간 20분쯤 걸린다.

그런데 이 아우슈비츠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도 강제수용소가 있었다. 부헨발트다. 1937년에 세워져 1945년까지 있었던 이 수용소는 ‘학살’보다는 주로 의학실험이 행해진 곳이지만, 그렇다고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도 25만 명이나 되는 죄수들이 거쳐 갔고, 5만6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바이마르와 부헨발트 사이는 고작 8.7㎞에 불과하고, 차로는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이 수용소가 자리한 너도밤나무 숲 너머에는-부헨발트는 독일어로 ‘너도밤나무’다-에터스부르크 성과 공원이 있다. 괴테는 이 성에 머물렀고, 이 공원을 즐겨 걸어 다녔다.

부헨발트 수용소의 출입구에는 “각자에겐 각자의 몫을(Jedem das Seine)”이라는 글귀가 걸려있다. ‘사람은 각자 받을 만한 몫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나치는 ‘이렇게 끌려온 것은 당신 책임이니 당연하다’는 뜻으로 썼다. 언어는 자주 오용된다. 나치주의자들은 괴테를 ‘독일정신의 구현’이라고 선전하였다. 언어는, 마치 선의가 악의로 오용되듯이, 언제든 도구화될 수 있다.

우리는 괴테의 정원이 죽음의 수용소 옆에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너도밤나무 숲에는 고요나 평화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성의 붕괴와 그 흥융, 문화의 영광과 그 몰락 사이의 거리는 그리 먼 게 아니다. 조지 슈타이너는 인간성을 다루는 ‘인문학’이란 말이 얼마나 오만한 표현인지, 인문학으로 인해 인간은 오히려 비인간적으로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 예술의 숭고와 현실의 야만 사이는 지극히 짧다. 아니 그저 짧은 것이 아니라, 숭고와 야만은 동전의 양면인지도 모른다. 가치의 위계는 언제든 역전될 수 있다.

▲  문광훈 충북대 교수
그러므로 우리는 말의 드러난 의미와 숨은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이는 현실뿐만 아니라 그 배후도 살펴보아야 한다. 노동은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삶을 경탄하고 향유하기 위해 산다. 그러나 이런 향유의 즐거움과 자유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현실의 모순과 그 착잡함을 직시해야 한다. 예술은 이 모순에 밴 고통을 기억하고자 한다. 이 기억과 표현 속에서 그것은 좀더 넓은 세계-폭력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 예술은 현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에 밀착해 사실을 직시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문화의 존재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다. (문화일보 6월 12일자 30면 18 회 참조)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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