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모든 게 혁명적으로 변했지만… 종교와 예술만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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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명·김의규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8) 2030 보고서

대통령과 정치인은 없어지고
모두 사회복지위원이 되었다

전세계가 인류 공존공영 합의
식량은 공동생산해 분배했다

이상 사회로 세상 바뀌었지만
예술가의 불만은 그대로였다

“저는 예술가를 존경합니다…
작가의 영혼을 더 존경합니다”

목로주점서 속내 드러낸 중년
‘2030년 보고서’ 남기고 떠나

노트는 삼분의 일만 차있었고
나머지는 내가 채우기로 했다

“이 동네에 사는 분들은 참 좋겠어요. 조용하고 깨끗하고… 그리고 집집마다 작은 뜰과 철마다 달리 피는 꽃나무가 어울리는 아담한 집들. 저녁이 들면 저마다의 꼴을 뽐내는 창문과 발코니에서는 별의별 행복한 얘기가 불빛에 싸여 모두 새어 나오죠. 저는 그 얘기들을 엿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때론 눈물이 다 났었어요.”

“아, 그래요? 하지만 저는 이곳에 살지 않습니다. 저는 저 너머 가로등도 드물어 어둡고 침침한 동네에 삽니다.”

얼마 전부터 옛날식 이 목로주점에서 가끔 마주치는 중년의 남자가 처음으로 내게 알은 체하며 건넨 말이다.

“아니, 딱히 동네라기보다 나처럼 작업하는 작가가 몇 명 모여서 사는 곳이지요. 우리는 싸고 좀 넓은 작업장이 있어야 하거든요.”

“작가요? 그럼 예술가이신가요?”

“예술가는 무슨… 뭐 그런 거 하며 삽니다.”

“저는 예술을 잘 모르지만 예술가를 존경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꽃을 좋아합니다만 그 꽃의 이름이나 개별적 특성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죠. 더욱이 제 꼴을 제대로 갖춘 꽃을 피워내려는 꽃의 간절한 마음과 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도 하질 않아요.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작품도 물론 좋지만 그 작품을 해내려는 작가의 영혼을 저는 더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이처럼 저의 속내를 담백하게 드러내는 것이 조금 낯설었지만 흔한 일이 아니어서인지 어쩐지 그가 머리에 남았다.

내가 자주 들러 술을 마시는 이 목로주점, 마치 작은 민예품 전시장처럼 낡고 제 빛깔을 잃은 온갖 잊혀 가는 물건으로 세심하게 구석구석을 채우며 장식한 것이 마치 어릴 적 집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엌에서 늙으신 어머니가 찐 감자 한 소쿠리와 나박김치를 곧 내어올 것만 같다. 이 주점에 젊은이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거의 중늙은이가 삼삼오오 몰려와 굵게 갈라진 목소리로 힘껏 떠들고 웃다가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흔한 일이다.

젊은이들이 가는 곳은 따로 있다. 그들은 막걸리나 소주 등의 술은 거의 먹지 않는다. 고작 맥주나 양주 또는 칵테일을 즐긴다. 그마저도 소수이고 많은 젊은이는 각종 미네랄이 함유돼 자신이 바라는 감정상태를 도와주는 대체음료를 사 먹는다. 예를 들어 뇌파 중 감마파를 증진시키는 음료를 먹고 극도의 각성과 흥분상태가 돼 클럽에서 밤새워 춤추고 노래 부르며 놀았고 또 어떤 카페는 고전음악을 틀고 심신안정 효과의 알파파를 유도하는 음료와, 깊고 푹신한 셰이즈 롱 소파나 카우치를 구비해 고객을 유치했다. 심지어 남녀 간의 애정행위로 충족되는 성적인 쾌락도 다국적 제약회사의 치열한 개발로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대체음료가 작은 편의점에서 성인에게 판매되고 있었다. 하지만 주 고객이 미성년자들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내가 즐겨 찾는 이 술집 단골들은 대개 가난한 순수예술가들이다. 세월이 흘러 문화와 가치관이 바뀌어도 그들의 벗어날 수 없는 끈질긴 가난과 근대적 취향은 그대로다. 사회학적으로 거의 이상 사회가 됐음에도 그들은 늘 뭔가가 불만이고 또 무엇인가에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술을 엄청 마셔댔다. 그러나 대중예술가들은 술 대신 젊은이들과 어울려 대체음료를 마시며 그들의 즐거움을 함께 지니고 나눴다.

그러고 보니 짧은 시간 동안에 매우 많은 것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먼저 대통령제와 전문 정치인이 없어졌다. 그들은 모두 ‘사회복지위원’이 됐다. 사회복지사란 이름을 한사코 거부하며 ‘사회복지위원’이란 명칭을 고집하는 까닭을 사람들은 더 따지지 않았다.

몇 해 전 ‘지구종말론’에서 비롯된 ‘세계 석학대회’를 기초로 해 지구와 인류의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자 지구촌의 문명은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강대국의 자원독식과 과잉소비 및 생산의 제한이 이뤄졌고 인류 공존공영에 모든 나라가 원칙과 방법론에까지 그 합의를 본 것이다.

에너지는 나노공법에 의한 증폭기술로, 의학은 줄기세포 연구로, 행정과 법률은 울트라 슈퍼컴퓨터의 중앙관리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법조인 대신에 분쟁조정위원과 손해사정인이 컴퓨터에 저장된 각종 사법판례 자료로써 법적 다툼을 쉽게 해결했다. 또 태어난 누구나 제 태반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장기 배양은행에 보관했다가 필요한 때에 치료제로 썼다. 사소한 질병은 컴퓨터에 증상만 입력하면 처방이 나오고 그 정보대로 약품국에서 환자에게 약을 보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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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은 주로 학생들의 용돈벌이였고 택배회사의 차량과 드론으로도 이뤄졌다. 식량만큼은 세계가 공동 생산과 공정한 분배교환으로 아주 작은 땅으로도 너무 쉽게 해결됐다. 다만 모든 면에서 혁명적으로 변화가 일어났지만 제자리에 머문 분야는 종교와 예술뿐이었다.

가끔 목로주점에서 마주치는 중년의 남자는 말없이 제 술을 마시다가 이렇게 변한 세상에 대해 많은 걸 내게 물었다. 그럴 때면 그는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어느 날 그가 슬픈 얼굴로 거푸 술을 들이켜다가 조용히 술집을 나섰다. 그가 떠난 자리에 꽤 두툼한 두께의 노트가 있었다.

그 노트 겉장에는 ‘2030 보고서’란 제목이 단정하게 쓰여 있었고 내용은 이 시대의 문화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 뒤로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몇 년 동안 기다리며 노트를 돌려주려 했으나 그는 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끝까지 안 올 것이란 생각이 들며 그가 삼 분의 일만 쓴 그 노트를 내가 마저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그 노트를 채워 넣고 있는 중이다. 만일 내가 다 못 쓴다면 다음의 누군가에게 슬며시 건네줘야 할 것이다. 그가 내게 한 것처럼.

글·그림 = 김의규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초대회장·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