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文정부 직접민주주의式 국정 운영… 代議 민주주의 위축 우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연구실에서 직접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최근 SNS·인터넷이 정당 대체
靑은 청원제도 통해 여론 수렴
‘광장 정치’도 때론 필요하지만
계속 반복되고 일상화 땐 문제
교육 제도 공론화 대단히 위험

권력이 국회·정당에 분산돼야
민주주의 제대로 작동하는데
朴정부 외면해 촛불집회 불러

적폐청산 ‘민주주의 언어’아냐
정치가 수사기관·판사 영역 돼
이대로 계속 땐 반대세력 커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민주주의에 관한 한 원리주의자다. 평생 민주주의를 연구해온 그는 정상적 정당정치에 기반해 제대로 운영되는 대의제를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직접민주주의나 광장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는다. 한시적 효용성을 인정하지만 대표성과 책임성을 담보하지 못한 제도는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체계를 인정하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는 민주주의의 전제다. 그래서 그는 특정 주장이나 가치만이 옳고 정의롭다는 주장은 단호히 배척한다. ‘민주주의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고민해 온 민주주의의 과제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양손잡이 민주주의’ 등으로 진화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은 한결같다. 진보적 학자로 꼽히는 그가 보수진영에서도 존경받는 이유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연구실에서 만난 최 명예교수는 이제 한반도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었다. 남과 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한반도에서 평화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2016∼2017년 촛불집회는 30년의 역사만큼이나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은 민주화에 대한 사회 전체의 요구가 표출된 것으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전면적인 정치체제의 전환을 가져왔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이뤄진 것이다. 반면 촛불집회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대규모 대중 민주화 운동은 아니었다. 앞선 두 보수 정부 특히 박근혜 정부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규범이나 시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정치를 하고 정부를 운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권위주의 체제라기보다는 민주주의 범위 내에서의 일탈이었다. 한국은 대통령에게 권력이 초집중화돼 대통령 권력을 통한 권위주의적 특징이 쉽게 드러나는 위험을 안고 있고 그래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촛불집회는 민주주의가 기대했던 대로 작동하지 않고 대통령과 집행부가 민주주의 기본 규범을 위태롭게 하는 데 맞서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정상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촛불집회가 장기화되면서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구도 등장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촛불 민심에는 구체적으로 표출되지 않았지만 노동문제를 포함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민주적 해결에 대한 요구가 포함돼 있었다. 촛불집회에 앞서 고 백남기 씨를 사망에 이르게 한 농민집회가 있었고 민주노총 파업의 장기화와 거리시위가 계속됐는데 이들의 요구가 촛불집회로 수렴됐다. 따라서 촛불집회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정치를 복원해서 우리 사회가 그동안 민주적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사회·경제적 문제를 제대로 풀어달라는 시민의 요구로 확장됐고 그런 의미에서 제2의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문재인 정부는 그런 촛불 민심에 힘입어 탄생한 정부인데 최근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청와대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한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발전소’의 박상훈 박사가 최근 ‘청와대 정부’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 책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권력구조나 국정운영 방식이 앞선 박근혜 정부와 별 차이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문재인 정부는 촛불집회의 여망과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문 대통령이 국정운영 과정에서 정당을 통해 여론 수렴을 하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반면 청와대는 청원제도를 통해 직접 여론을 수렴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정당과 내각, 국회를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동의한다. 지금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방식은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자유주의적 인권사상과 시민사회 자율성에 기초한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아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SNS나 인터넷 등이 정당의 역할을 대체하는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경향이 서구 국가들에 비해 훨씬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촛불집회를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경향도 보인다. 정당, 국회와 같은 대의기구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이 광장에 나와 이슈를 제기하고 요구 사항을 외친다.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으려 할 때 일시적으로 이런 ‘광장의 정치’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런데 광장의 정치가 무한정 반복되고 일상화되는 것은 큰 문제다. 청와대 국민 청원제도같은 것은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당 개혁 차원에서 직접민주주의 원리를 도입하려 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광장정치는 대표성도 없고 당연히 국민을 제대로 대변할 수 없다. 특히 광장정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이나 입시제도 같은 문제를 ‘공론과정’을 거쳐 결정하려고 합니다. 국가적 중대사를 이런 식으로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까요.

“교육제도를 공론화를 통해 개혁하는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대중적 의견을 무작위로 수렴해서 결정해선 안 된다. 특히 교육 분야의 경우 한 사회가 축적한 교육적·문화적 역량을 총결집해 미래지향적인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직접민주주의라는 개념에 기대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현재까지 문재인 정부의 최대 역점 국정 목표는 ‘적폐청산’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펴낸 ‘양손잡이 민주주의’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적폐청산은 정치를 선악에 기초해 도덕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 판결하겠다는 건데 척결이니 청산이니 하는 말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적 언어’가 아니다. 민주주의란 사회의 다양한 요구들이 제도와 절차를 통해 경쟁하는 것이다. 관점이나 이해관계가 다르지만 공존하면서 경쟁을 통해 번갈아 권력을 차지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인데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이런 원리와 과정이 불필요한 것이 된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정부 이래 공화당과 민주당이 대립을 하면서 정당 간 정치의 규범이 깨지고 정치는 극단적으로 나가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들이 말하듯 폭로, 고발, 수사를 중심으로 한 검찰과 법원이 정치를 대체하면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제도 안에서의 정당정치를 압도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적폐 청산도 비슷하다. 적폐를 청산하려면 적폐를 법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고 결국 정치는 수사기관과 판사들의 영역이 된다.”

―문재인 정부는 한국 근현대사의 재해석을 통해 한국 사회의 주류세력을 교체하려 하고 적폐청산은 그 일환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역사를 심판한다는 것은 역사논쟁을 넘어 분쟁과 이념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결국에는 박근혜 정부 때 추진됐던 국정교과서 정책을 이번엔 진보진영에서 추진하는 꼴이 된다. 역사의 해석이나 이해는 열어 두어야 한다. 학자마다 역사를 보는 특정 관점이 있고 그런 역사가들이 교과서를 쓰면 학교나 교육자가 선택해서 교육하면 된다. 국가가 역사를 보는 관점을 규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적인 방식이 라고 보기 어렵다.”

―보수 성향의 정당은 총선과 대선, 지방선거 등 세 차례 선거에서 모두 패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궤멸 상황에 처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보수 몰락의 원인은 뭐라고 보나요.

“우선 한국 보수는 도덕성이 약하다. 1945년 해방 이후 분단국가가 만들어졌고 이를 주도한 세력이 집권세력이 됐는데 그게 보수의 원류다. 너무 쉽게 집권을 했다. 분단체제하에서는 냉전과 반북, 반공이 국가의 핵심 운영원리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주도한 것이 보수세력이었다. 따라서 보수세력은 한 나라를 운영하는 지배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데 고민과 노력이 부족했다. 냉전 반공이라는 국가 운영 원리가 너무 강력해 보수는 7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노력 없이 헤게모니적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유럽이나 일본의 보수 세력은 달랐다. 일본 자민당의 경우 캐치 올 파티(catch-all party·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포괄정당)로 특정 이념보다 사회 중요 세력들을 대표하고 그들의 이익을 반영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기업은 물론 농민, 자영업자, 중산층 등이 자민당의 지지세력이 됐다. 자민당이 장기집권을 했다는 점에서 일본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시각이 있지만 저는 일본 민주주의를 중요한 모델의 하나라고 본다. 자민당은 사회의 주요 세력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고 정책으로 실현했다. 의회에서는 물론 통상산업성이나 농림수산성 등 정부 차원에서 주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지지세력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일본 정부가 다른 무역 분야에서 손실을 감수하고도 농업개방을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까지 자영업자, 소상공인, 골목상권이 다 살아 있는 것도 자민당이 이들의 이익을 반영해 대형 마트가 진출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농업개방 등 통상협상을 할 때 농민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한 적이 없다. 한국과 비교하면 일본이 훨씬 민주적이다. 온 사회가 하나의 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여기에 반대되는 것은 배제해버리는 것은 민주적 방식이 아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보수 정당들 역시 국민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 이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우리 보수정당은 그런 과정 없이 통치세력이 되고 별다른 노력 없이 그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에 굉장히 안이하다. 실제로 우리 보수당의 국가운영 원리라고 하는 것 중에 성장정책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이 고민해서 만든 건 별로 없다. 냉전, 반공 등은 모두 외부에서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한반도에 데탕트, 탈냉전의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보수세력이 기대온 구조가 근본부터 무너지고 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연구실에서 민주주의 관련 논문이 게재된 잡지를 보며 최근 민주주의 연구 경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보수세력이 당면한 위기는 존재론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당시 보수 여당인 새누리당은 탄핵에 동조했고 이는 최소한 민주주의의 원리를 수용하고 존중했다는 증거다. 따라서 보수는 반민주 세력은 아니며 탄핵 자체가 보수의 치명적 위기가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보수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수의 위기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즉 한반도 탈냉전 시대의 도래에 따른 보수의 국가운영 원리의 붕괴다. 이제 보수는 외교·안보적으로는 냉전과 반북을 넘어 평화공존을 국가 운영 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하고 이를 실행할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이미 탈냉전은 시작됐고 돌이킬 수 없다. 사회·경제적으로도 박정희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국가-대기업 동맹에 의한 성장정책 역시 한계를 맞았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를 포용할 수 있는 국가운영 원리와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보수는 보수의 기본적인 지형이 근본적으로 해체됐단 사실을 빨리 자각하고 보수가 할 수 있는 대안적인 비전과 가치, 정책 프로그램을 생존 차원에서 만들어내야 한다. 존립하기 위해서라도 변해야 하지 않겠나.”

―사실 보수라고 자칭하는 분들은 북한이 ‘나쁜 국가’고 그래서 스스로 붕괴하거나 붕괴시켜야 할 체제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한반도에 데탕트 시대가 오더라도 북한과의 평화공존은 일시적인 과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보 진영 내에도 우리 사회 모든 모순의 원인을 분단체제라고 규정한 뒤 우리 체제가 변화를 감수하더라도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교수님께서는 한반도에 평화공존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 외교 목표가 통일이 돼선 안 된다’고 논쟁적인 주장을 내놓으셨습니다.

“그간 한국의 대북 정책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통해 북한을 제압하는 것이었고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결국은 북한을 흡수해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평화 공존의 논리와는 병행하기 어렵다. 평화 공존은 가치와 이념을 달리하는 두 체제가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이다. 이건 양자택일의 문제다. 힘으로 밀어붙여 흡수통일을 하든지 평화롭게 공존하든지. 둘 다 할 수는 없다. 사실 한국과 북한은 이제 통일이란 말을 쓰기에는 너무 극단적으로 다른 체제가 됐다. 더구나 전쟁을 치른 경험까지 있다. 그래서 통일이란 말을 쓰는 순간 양쪽 모두 수용할 수 없는 목표가 된다. 우리에게 북한 체제를 일부 수용하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나. 북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평화공존을 이야기하면서도 우월한 경제력 등을 바탕으로 북한을 도와주고 그래서 북한을 우리 생각과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평화공존이 아니라 ‘통일’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비핵화 프로젝트든, 개방 정책이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북한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평화공존의 문제는 평화체제 구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평화체제 구축은 종전선언과 이에 따른 주한미군 성격 변화 문제, 한·미 동맹의 균열 문제 등과 연결되면서 안보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1980년대 말에 동유럽 국가들의 탈 사회주의화로 냉전체제는 기본적으로 해체됐지만 한반도에서는 냉전체제가 유지돼왔다. 그러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북 정책으로 이제 한반도 냉전체제는 사실상 해체됐다. 그건 트럼프 대통령 개인적 성향이나 리더십 때문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은 냉전시기처럼 초강대국으로서 전 세계에 미군을 주둔시키면서 세계경찰의 역할을 할 능력이 없다. 미국은 기존 외교·안보 정책의 비용을 줄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최근에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도 협상을 하는 등 분쟁 대상 국가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에 파격적인 방위비 인상을 요구한 것이나 적대국이었던 러시아와의 관계 재설정을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종전선언과 상관없이 주한미군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유지할 수 없고 만약 유지를 원한다면 한국이 상응하는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은 재편된다.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일본도 영향력 확대를 꾀할 것이다. 그런데 보수 정당은 물론 집권여당인 민주당 역시 이런 새로운 외교·안보 패러다임에 대한 준비가 안 돼 있다. 우리 정치인들은 공부를 안 한다. 보수, 진보를 자처하지만 별다른 차이도 없다. 그간 외부에서 분단된 국가의 역할이 주어진 상황에서 제한된 경쟁을 하다 보니 발전이 없었다. 특히 현재 문재인 정부를 주도하고 있는 게 ‘386세대’들인데 이들은 지식의 깊이를 갖추지도 못했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비전과 대안을 만드는 데 진정으로 신념이 있는지, 또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은 촛불민심의 한 축인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실현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들은 물론 시민들까지 고통을 호소하는 등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데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은 추진돼야 할 시점이 됐다. 문제는 추진 방식이다.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추진하면서 문제가 악화되고 갈등이 증폭됐다. 문재인 정부는 중요성에 따라 정책의 위계 구조를 설정하고 그 위계 구조에 따라 산업정책, 중소기업 정책, 대기업 정책, 복지정책 등을 조정하는 컨트롤타워를 만들어야 하고, 또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종합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산발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면서 정책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현실과 괴리되면서 갈등을 증폭시켰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은 파장이 큰 정책이어서 현장 상황 조사, 파급 효과 스크린, 당사자들과의 사전 협의 등 치밀한 사전 준비를 거쳐야 했는데 진보정부 입장에서 좋은 정책이라고 무턱대고 시행하다 보니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섣부른 정책 추진으로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책을 실행할 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 소유구조 개혁, 공정경쟁 시스템 구축,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의 지배 등 핵심 정책에 정부의 힘을 집중해야지 이것저것 좋은 것이라고 다 하다 보면 아무것도 못 한다.”

―최근 북한 비핵화를 위한 미·북 간 협상이 답보상태입니다. 북한 비핵화는 가능하다고 보나요.

“가능하다고 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개적으로 남북, 미·북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비핵화를 국가 기본 정책으로 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북한은 비핵화를 지난번 당 대회에서 당헌으로 채택했다. 실천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느냐는 다른 문제다. 다만 미국이 요구하듯이 먼저 비핵화를 하면 북한체제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으로서는 존립이 걸린 문제인 만큼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나눠 종전협정 및 체제 보장과 연계하는 전략을 취할 것이다. 미국도 처음에는 한꺼번에 해결하고 싶었겠지만 결국 북한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지만 북한 역시 개혁 개방을 하지 않고는 체제 안정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번 협상을 전환의 계기로 삼으려 할 것이다. 특히 김정은 체제는 앞서 김일성, 김정일 체제와 달리 개혁, 개방에 나서려는 뚜렷한 징후들을 보이고 있다.”

―양손 민주주의 개념에서 보면 보수의 몰락은 진보의 위기이자 민주주의의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향후 우리 정치는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보나요.

“이미 언급했듯이 적폐청산은 민주주의 언어가 아니고 따라서 정치발전에 기여할 수 없는 언어다. 이런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소외된 정치집단들은 정부가 실패하기만을 바랄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정부가 안정적으로 지지를 유지하기 어렵다. 사실 한국 정치는 그간 뚜렷한 대안적 비전이나 정책 프로그램을 가지고 경쟁했다기보다는 대통령제하에서 양당이 돌아가며 교차 집권을 하는 구조였다. 보수가 집권하면 진보는 반대하고 진보가 집권하면 보수는 반대했지만 이념이나 가치를 근거로 비판한 게 아니었다. 이제 그런 단계를 넘어 좀 더 장기적이고 일관되며 보편적인 가치와 이념, 정책적 방향을 놓고 경쟁하고,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으면 한다.”

―현실 정치권에서는 보수의 재건에 대해 비관적 시각이 많습니다. 어떤 변화와 준비가 필요한가요.

“첫째, 남북 관계에서 좀 더 평화 지향적이어야 한다. 둘째, 민주주의의 가치와 제도를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셋째, 성장 지상주의에 집착하면서 사회 최상층 이익을 배타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분배와 복지의 확대를 통해 성장과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발전국가’적 경제 운영을 재구조화하고 지속적 성장과 사회통합을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수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어야 하고 좀 더 다원주의적인 사회 구성 원리를 대변해야 한다. 한국 보수의 쉬운 승리와 집권을 허락했던 조건이 변했음을 인식하고 한국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야 하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둘러싼 이념과 가치, 비전을 다투는 자유경쟁의 시장으로 나아가 승리해야 한다.”

인터뷰 = 박민 부국장 겸 정치부장 minp@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