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올해가 2112년이라는 고모 “이런 더위엔 시에스타 있었으면…”

구자명·김의규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9) 시간을 짓는 노인

명문여고·여대 수석 졸업하고
40년동안 교사생활한 ‘똑순이’
나이 팔십도 안돼 치매에 걸려

대상포진 앓고 기억 더 나빠져
30분 지난 일들 뒤죽박죽 혼동

폭염덮친 2018년 여름날 오후
어쩌나, 아직 놓아드릴수 없는데

“민덕순님, 들어오세요.”

경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진료실 앞 대기석에 헝겊 인형처럼 호졸근히 앉아 있는 노인을 서둘러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고모, 의사가 물으면 대답 똑바로 잘 하셔야 해요.”

노인은 무슨 얘기냐는 듯 멀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응! 하고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환자들이 밀려 예약 시간을 반 시간이나 넘겨 들어간 담당의 진료실에는 잘 해야 사십대 초반이나 될까 싶은 젊은 여의사가 앉아 있었다.

“오늘은 다른 분이랑 오셨네요, 할머니? 그새 잘 지내셨어요?”

“예에. 조카랑 왔어요. 우리 아줌마가 휴가 가서…. 딸 내외랑 제주도 여행 갔어요. 헤에.”

지난 이 년 동안 이 병원 정신의학과에서 매 격월 진료를 받아온 노인은 이 진료실과 의사가 익숙하고 편안한 듯 환하게 웃으며 묻지 않은 소식까지 전한다.

의사는 미소 띤 얼굴로 잠시 환자를 응시하더니 금세 전문가적 냉정을 회복한 어투로 이것저것 질문하며 노인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민덕순님, 계산 좀 해보실게요…. 78 빼기 9는 얼마죠?” “69.” “거기서 13을 빼면 얼마죠?” “56.” “거기서 7을 빼면요?” “49.” “거기서 15를 빼면?” “음… 34!” “네에, 그럼 34에서….”

노인은 예닐곱 단계의 빼기 연산을 척척 해내며 득의의 눈빛을 조카에게 보냈다. 경호는 인정의 표시로 노인에게 와아! 하며 손뼉을 쳐주었다.

그녀는 경호가 일곱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간 올케를 대신해 조카들을 키워주기 위해 오빠의 가족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녀는 오빠가 재혼할 때까지만 같이 살 생각이었지만 어렵게 이뤄진 그 재혼이 일 년 만에 실패하자 다시 들어와 살았고, 이후로 오빠나 마찬가지로 싱글의 상태를 유지했다.

“우리 고모, 똑똑한 건 여전하시네! 나도 요즘 그리 빨리 암산 안 되는데….”

경호의 아버지는 자신도 그 방면으론 무대책을 상책으로 삼아온 처지면서 아명이 똑순이었던 누이가 너무 저 잘난 맛에 눈높이 맞춰 짝을 구하지 못하는 거라며 한탄하곤 했는데, 그만큼 고모는 명석한 여성이었다. 명문여고와 명문여대를 연이어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한 재원이었던 그녀는 의대나 법대를 갈 수 있는 성적이었음에도 아이들을 좋아해 사범대엘 갔다. 이후 사십 년간 교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행복하게 봉직한 끝에 교육부 표창을 받으며 영예롭게 은퇴한 민덕순 선생이 팔십이 채 안 돼서 치매에 걸릴 것이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더구나 타임지를 구독하며 영어 기사 번역을 취미로 하던 고모의 영향으로 직장에서 해외 거래처와의 업무에 필요한 지금의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된 경호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일상 중에 착란증이나 지남력 장애를 보이는 때는 없으셨어요?”

“네, 최근에는 정서 상태가 비교적 안정적이라 그런 건 없으셨어요. 단기기억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는 거 같지만요….”

어느 날 같은 아파트 단지의 앞 동에 사는 고모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오빠로부터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며 맨발에 잠옷 바람으로 그의 집 문을 두들겼을 때 경호는 머리털이 쭈뼛 서고 등골이 서늘해졌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수년 전에 병사했고 그날 밤 그녀에게 전화한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일주일에 세 번 낮 시간에만 쓰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매일 오게 하고 밤에는 아직 미혼인 동생이 가서 자며 곁을 지켰다. 정신의학과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치매진행 완화를 위한 약을 쓰자 고모의 상태는 어느 정도 호전되는 듯하다가, 몇 달 전 대상포진을 앓고 나서부턴 단기기억력이 더 쇠퇴해 삼십 분 이상 지난 일들을 뒤죽박죽 혼동하거나 기억하지 못하였다.

“기억력 스팬은 점점 더 졸아들 겁니다. 약을 써도 한계가 있어서…. 그래도 정서적으로 안정되면 섬망증상 같은 건 덜 발생하지요. 수리력은 아주 좋으신 편인데, 다른 테스트를 또 좀 해볼까요?”

노인은 그새 또 멀뚱한 표정이 되어 있다가 테스트란 말에 교사 본능이 작동되는지 눈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민덕순님, 지금 아침인가요, 저녁인가요?”

점심식사를 마친 후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뜨거운 한낮의 햇빛에 찡그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던 사람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저녁요.” “여름인가요, 겨울인가요?” “겨울요.” “몇 월인가요?” “시월 달.” “그럼…올해는 몇 년도인가요?” “음, 올해가….”

순간 멈칫했던 노인이 곧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이천-백-십이-년!”

역대급 폭염 속에 초복과 제헌절이 겹쳐 쉽사리 잊히지 않을 2018년 여름날 오후 두 시, 세상없이 똑똑하다고 믿었던 고모의 등 뒤에서 경호는 자신이 세상없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를 어쩌나! 나는 아직 놓아드릴 준비가 안 됐는데….

“민 팀장, 어르신의 시간은 당신이 좋도록 당신이 짓는 것이니 너무 상심 말게.” 점심시간에 회사를 나서며 고모 진료로 좀 늦을 거라고 양해를 구하러 찾은 동료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심리학을 전공한 그 선배는 고모와 관련한 저간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다. 조카가 사는 세상으로부터 무려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을 훌쩍 건너가 버린 고모는 지금 어느 세상에 계시는 걸까? 진료실에서 나와 의사의 처방전을 기다리는데 노인이 문득 생각난 듯 염려스레 물었다.

“그런데 큰 애야, 회사 빨리 들어가 봐야 하잖니? 우리나라도 이리 더운 철에는 남유럽처럼 시에스타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찮아?”

구자명 소설가·한국미니픽션작가회 창립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