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있는 개혁’을 지향해 온 보수주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초반 로널드 레이건(왼쪽)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의 등장은 ‘작은 정부’와 ‘복지 축소’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를 전면화한 ‘보수혁명’으로 평가된다. 자료사진

-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 우노 시게키 지음, 류애림 옮김 / 연암서가

프랑스혁명 급진개혁 반대한
‘英 보수주의 아버지’ 버크서
21세기 美티파티 운동까지…
사상가·정치사 궤적 살펴봐

국가 역할·개인 자유문제 등
보수·진보 모두에게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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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적으로 보수-진보를 말하지만, 정작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그 개념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나라마다 보수의 개념에서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에는 젊으면 진보, 나이 들면 보수라 했지만, 그 차이도 작아지고 있다. 급진적 변혁을 혐오해왔던 보수가 ‘보수혁명’이라는 모순되는 조합의 슬로건을 쓰기도 하는 시대다.

과연 보수나 보수주의에 대한 공통의 이해나 정의가 존재할까? 일본의 정치철학자 우노 시게키(宇野重規)가 쓴 이 책은 바로 이 같은 물음에 답하는 보수주의에 대한 개괄서이다. 자신이 보수주의자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 저자는 별다른 정치적 판단의 개입 없이 ‘영국 보수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부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보수주의 사상가와 18세기 유럽부터 미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보수주의 역사와 사상, 정치화의 궤적을 살펴본다. 그 행간에서 보수와 진보 모두에 성찰적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먼저 보수주의의 개념이 애매모호한 원인으로 ‘진보’라는 이념이 후퇴한 것을 꼽는다. 근대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관계를 축으로 전개된 시대라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동구권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득세가 상징하듯, ‘진보 이념’에 바탕을 둔 진보주의가 퇴조하면서 라이벌을 잃은 보수주의 역시 방향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보수주의란 그 자체로 하나의 일관된 이론적 체계라기보다는 프랑스 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 혹은 복지국가에 기반을 둔 ‘큰 정부’ 등 그때그때 라이벌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논리를 구축해온, 소위 상대적 입장이라는 것이다.

‘보수주의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바로 그가 말년에 만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비판에서 그 같은 이름을 얻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0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을 출간하며 추상적인 정치이념에 기초한 급진적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의 사상을 펼쳤다. 보수는 무언가를 지킨다는 의미인데, 버크가 지키려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권리장전’을 반포한 명예혁명에 의해 실현된 ‘영국 헌정’이라는 전통에 입각한 자유의 체제였다. 역사 속에서 다듬어져 온 구체적인 제도와 관습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민주화를 전제로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질서 있는 점진적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은 모든 것을 빈터로 만든 뒤 이상적인 정치제도를 다시 쌓아 올리려는 시도로, 버크에게 이는 전통을 부정할뿐더러 견고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20세기 후반부터 세계 보수주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에선 보수당이 자리 잡지 못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실시한 뉴딜 정책의 성공이 말해주듯 정부 주도하의 사회 발전과 개인의 평등을 도모하는 ‘리버럴리즘’이 폭넓게 지배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미국의 보수주의 전개에서 주목하는 정신적·사회적 배경이 아메리카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광활한 식민지에서 가족 단위로 고립돼 살아온 사람들은 국가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정신의 전통주의를 갖게 됐다.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미국의 ‘종교화’ 역시 이들의 정신적 갈망이 가져온 현상이다. 미국 역사에서는 반복해서 신앙부흥운동이 벌어졌으며, 이후 세속화·개인화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정신적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욕구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같은 밑바닥 전통은 20세기 중반까지 사회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다가, 합리적·진보적 개혁을 주장하는 지식인과 엘리트들에 대한 불신이 퍼지는 상황에서 독특한 ‘반지성주의’로, 나아가 ‘보수주의의 정신’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과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리버테리어니즘이 이 같은 전통과 만나고, 2009년 버락 오바마의 의료보험개혁과 대형 경기대책에 반대하는 풀뿌리 운동인 ‘티파티 운동’의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시장화와 민영화, 작은 정부에 대한 강한 지향이라는 현재 미국 보수주의의 현저한 특징은 이 같은 배경을 가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 보수주의의 역사를 일별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전후 경험’에 대한 사상적 반성이라고 지적하고, 일본 보수주의의 미래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236쪽, 1만5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