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한국전쟁과 고향 수원의 기억… 정밀 취재로 메운 장·단편 106편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수원성 남문으로 불리는 팔달문 전경. 홍성원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먼동’에서 수원의 정경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 (130) 홍성원 10주기… 딸 홍진아 작가가 쓴 ‘아빠의 공간’ (下)

사춘기 한복판서 겪은 한국전쟁
남과 북·달과 칼 등 전쟁소설로

1970년대의 엄혹한 검열 때문에
북한군을 자유롭게 그리지 못해
1980년대 후반 수평 맞춰 수정

합천 출생이지만 제2 고향 수원
일제강점기 그린 ‘먼동’의 배경

페인트공·고물상·전쟁박물관 등
모든 일상에서 취재와 자료수집
원고지 5만여장의 소설에 담아

3. 사춘기에 겪었던 전쟁, 그리고 대하전쟁소설 ‘남과 북’

아빠는 1937년생으로 일제강점기도 겪고 한국전쟁도 겪으셨다. 그리고 이 선명한 기억들은 작품들로 승화됐다. 일제강점기는 ‘그러나’라는 장편과 ‘먼동’이라는 대하소설로, 한국전쟁은 아빠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남과 북’을 비롯한 소년소설 ‘기찻길’ 등으로 솟아났다. 데뷔작인 장편 ‘디데이의 병촌’도 군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고, 그 후로도 전쟁에 많은 관심을 보인 아빠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 ‘달과 칼’을 쓰기도 하셨다. 아빠는 소설에서 전쟁을 주로 다룬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군대라는 조직처럼 인간의 권위와 존엄성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조직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더구나 전쟁이 일어나 군대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면 그 군대는 국민이 동의한 가장 큰 무력집단, 살인까지도 명령할 수 있는 무력집단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군대 간의 싸움을 우리는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전쟁은 인간이 연출할 수 있는 최고 최대의 폭력입니다. 이 최대의 폭력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했고, 나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사춘기에 그 폭력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결국 군대소설로 등단한 나는 사춘기에 겪은 나의 전쟁 육이오를 어떻게 해서든 심리적으로 졸업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책 ‘홍성원 깊이 읽기’ 중 대담에서)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아빠의 대표작인 6권짜리 대하소설 ‘남과 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 발발부터 1953년 휴전협정 한 달 후까지를 다룬 이 작품은 북한군과 남한군 장교, 신문기자 등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어떻게 온몸으로 전쟁을 견뎌냈는지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래 꼼꼼하고 철저한 성격이셨던 아빠는 이 작품을 위해 철저하게 자료 수집을 하고 모든 에피소드 구성까지 다 잡고 들어가셨다. 우리와 함께 전쟁 박물관에도 몇 번이나 방문하셨다. 심지어 소설 마지막도 대사까지 세세히 구상을 해놓으셨다. 휴전협정 후, 거짓말처럼 전쟁이 멎은 순간, 소설 속에서 같은 군인이었던 박노익은 같은 편인 한상혁 대위를 총으로 쏴 죽인다. 오발이었다. 같은 편에게 오발로 죽임을 당한 한상혁 대위는 ‘아니야, 아니야’란 말을 중얼거리며 죽어간다. 한국전쟁의 아이러니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엔딩이다.

하지만 아빠는 1970년대 엄혹한 검열 때문에 북한군을 자유롭게 그리진 못하셨다. 이에 아빠는 검열이 수그러든 1980년대 후반, 이 작품을 대대적으로 수정한다. 북한군에게도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남과 북의 수평을 맞추신 것이다. 그렇게 개작한 작품은 문학과지성사에서 6권짜리 새로운 ‘남과 북’으로 탄생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홍성원(오른쪽) 작가가 이청준(왼쪽) 작가, 김형영 시인과 함께 호남지역을 여행 중일 때. 홍·이 작가는 2008년 같은 해에 타계해 둘 다 10주기가 됐다. 김 시인은 “그 여행이 10년도 훨씬 전의 일인가 보다”라며 감회에 젖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홍성원 작가의 고려대 명예졸업식 때. 왼쪽부터 ‘홍자매’의 홍자람·홍진아 작가, 아내(장정자 씨), 홍 작가, 아들 홍우람 씨. 홍진아 작가 제공

이 작품은 KBS에서 최초의 미니시리즈로 방송되기도 했다. 8부작의 수작이었다. 특히 기억나는 장면도 있었다. 한국군이 북한군을 북한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갑자기 ‘쟁’하는 소리가 나고 한국군은 실체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산등성이에 까맣게 중공군이 등장한다. 이미 소설에서 읽은 작품이지만 영상으로 다시 대하니 소름이 돋았다. 아빠의 작품은 그렇게 작품성에만 매달리는 재미없는 작품이 아니었다. 연재 한 회 한 회마다 완결성을 가지면서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4. 아빠의 고향 수원, 그리고 대하소설 ‘먼동’

아빠 프로필의 출생지는 경남 합천이지만 실제 고향은 수원이다. 아빠는 처음 수원에 도착했을 때의 첫인상을 이렇게 기억한다.

“수원은 내게 첫인상부터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중략) 이삿짐을 가득 실은 목탄차 트럭 위에서 나는 눈앞을 우뚝 막아선 거대한 성루와 성곽을 보게 된 것이다. 성과 성루를 처음 본 나는 첫눈에 수원이라는 도시에 숨이 막히는 감동과 흥분을 느꼈다.” (책 ‘홍성원 깊이 읽기’ 중 ‘인물소묘’ 중에서)

소설가 홍성원은 이렇게 자신이 사랑한 도시 수원을 소설에서도 복원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상놈과 양반 사이 신분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대하소설 ‘먼동’의 배경이 바로 수원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아빠는 수원을 이렇게 묘사한다.

“멀리 보이는 수원성 남문 밖에 저녁 짓는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다. 팔달문 높은 누문이 가까운 팔달산 그늘 아래 푸르스름하게 잠겨 있고 골목에서 뛰놀던 떠들썩한 아이 녀석들도 지금은 모두 제집으로 찾아들어 크고 작은 골목들이 휑뎅그레하게 비어 있다.” (소설 ‘먼동’ 중에서)

대하소설 ‘먼동’ 역시 KBS에서 대하사극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아빠의 작품은 그대로 드라마 대본으로 써도 될 만큼 장면 장면이 신처럼 선명한 그림으로 역동적이고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이렇듯 입체적인 묘사는 아빠의 특기였다. 일상생활 중 아빠가 어린 사촌 동생에게 석양의 빨간 해를 가리키며 “저거 봐라, 하늘에 빨간 도장이 찍혀 있지?”라고 말씀하시던 순간이 자주 기억난다.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냐는 나의 감탄에 아빠의 대답은 ‘시크’했다.

“그냥.”

물론 재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빠의 노력도 숨어 있었다.

“나는 항상 전업 작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늘 모든 감각 상태, 즉 감수성이나 직감, 이상 같은 것을 오픈된 상태로 열어둘 뿐 아니라, 어떤 사물에 부딪히든지 당장 쓰임새가 있으리라는 계산 이전에 그 사물의 속내까지 상당히 알고 싶어 합니다.” (책 ‘홍성원 깊이 읽기’ 중 대담에서)

그래서 아빠는 모든 일상을 취재하셨다. 집에 온 페인트공에게, 산책 가다 들른 고물상 주인에게 항상 질문하고 취재를 하셨다. 중편소설 ‘폭군’도 방송 출연을 계기로 만난 포수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으셨다고 한다. 교과서에도 실린 ‘폭군’은 호랑이와 늙은 포수의 대결을 그린 작품으로 특히 마지막, 호랑이와 늙은 포수가 서로 껴안듯 죽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소설 내내 대결과 긴장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다가 마지막에 먹먹함을 선사하는 것이다.

5. 그 외의 명작들

아빠는 이 외에도 ‘즐거운 지옥’ ‘흔들리는 땅’ ‘남도기행’ 등 72편의 중·단편과 ‘달과 칼’ 등 대하소설, 소년소설 ‘기찻길’ 등 34편의 장편을 써내셨다. 원고지 5만 장이 넘는 70여 권의 책이다. 이에 대해 좋은 의미의 ‘소설공장’이라는 별명을 붙이신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 평론가 김병익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의 단편들은 작가 지망생의 교재로 선택해도 좋을 완벽성을 가지고 있었고, 본격적인 작가들이 오히려 실패하기 쉬울 신문 연재에 있어서도 그의 소설은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서 대중적인 흥미와 순수 문학의 격조를 동시에 취하고 있으며, 그가 야심을 품고 쓴 대작들은 그것이 잡고 있는 주제에 관한 한 가장 무게가 무거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평론 ‘진실의 발견과 장인정신’ 중에서)

이렇듯 평생 전업 작가로 지내오신 아빠의 글 작업은 김 선생님의 말씀처럼 장인의 그것이었다. 컴퓨터가 일상화된 시대에도 만년필로 깨알 같은 초고를 쓰고 퇴고를 하셨으며 원고지에 최종고를 옮겨 쓰셨다. 기계치여서가 아니다. 아빠는 내비게이션이 나오자마자 차에 달고, 컴퓨터로 바둑게임을 하실 만큼 새로운 문물을 좋아하셨다. 하지만 글만큼은 그렇듯 수공업적 태도를 견지했다. 이에 대해 아빠는 ‘종이에 직접 쓰고 수정을 해야만 나의 사고의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컴퓨터는 삭제(Delete)키를 누르면 문장이, 단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종이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지운 흔적이 남아 있기에 더욱더 밀도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문체 또한 아빠는 수식어를 배제한 단문을 즐겨 쓰신다. “문장을 감각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궁굴리는 쪽에 근원적인 거부감”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아빠가 더욱 대중적인 작가가 되지 못하신 건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빠의 문체에는 허무한 수식어 대신 힘 있는 속도감이 있었다. 명쾌하고 절제돼 있고 문법적으로 완벽한 모범성을 지니고 있었다.

홍진아 드라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