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100세시대 배우들 설 자리 많아져… 대사 못 외우면 그때가 정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동근은 인터뷰 내내 ‘운반’ ‘운행’이라는 표현을 쓰며 드라마의 기획 의도를 시청자에게 전달해야 하는 배우의 책임을 강조했다. 오른쪽 아래는 ‘같이 살래요’에서 효섭이 미연에게 프러포즈하는 장면. 김선규 기자 ufokim@

드라마 ‘같이 살래요’ 60代 로맨스로 안방점령…배우 유동근

연애·혼외자식 등 뻔한설정 속
청춘 못지않은 황혼연애에 매력
고령화 시대 딱 맞는 기획인듯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父
드라마 설정 실제 모습과 유사
작가가 내 생활 훔쳐봤나 싶어

끈적이는 남녀관계 안 좋아해
왕 역할 오래하다 반항심 생겨
건달역 했더니 계속 건달역만…

배우는 뽑히길 기다리는 직업
내게 맞는 작품 없다 핑계보단
안 찾아준다 말해야 마음 편해

배우 유동근(62) 하면 가장 먼저 곤룡포를 입은 왕이 떠오른다. 그는 KBS 1TV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1996)에서 조선 태종을 연기했으며 세조(‘파천무’·1990)와 연산군(‘장녹수’·1995), 태조 이성계(‘정도전’·2014) 등 여러 왕을 섭렵했다. 왕 외에도 흥선대원군(‘명성황후’·2001), 연개소문(‘연개소문’·2006) 등 카리스마 넘치는 역사 속 인물을 주로 맡아왔다. 또 불륜 드라마의 원조 격인 MBC ‘애인’(1996)에서 황신혜와 호흡을 맞춰 유부남과 유부녀의 위험한 사랑을 선 굵은 연기로 표현해내며 화제를 모았다. 이번에는 중년의 로맨스로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다. 그는 30%대의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며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2TV 주말드라마 ‘같이 살래요’에서 4남매의 아버지인 수제화 장인 효섭 역을 맡아 건물주가 된 첫사랑 미연(장미희)과 알콩달콩한 커플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40년 가까이 ‘근엄함’과 ‘섬세함’을 넘나드는 연기로 시청자를 매료시킨 ‘천생 배우’ 유동근의 실제 삶이 궁금해 한창 드라마 촬영으로 바쁜 그를 소속사 이매진아시아 사무실에서 만났다.

2015년 종영한 KBS 2TV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 이후 3년 만에 안방극장으로 돌아온 유동근은 “로맨스가 없었으면 ‘같이 살래요’에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성 연기는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충분히 보여줬잖아요. 시놉시스를 받기 전에 효섭이 자식에게 지극정성인 아버지라고만 듣고 전혀 호감이 안 갔어요. 그동안 아버지 역을 여러 번 맡아 모두 성공적으로 그려냈는데 이제 뭘로 아버지의 모습을 변주하겠어요. 제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의 80%가 기획의도예요. 청춘 남녀의 사랑과 혼외자식 설정 등 늘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 제가 첫사랑인 장미희 씨와 60대에 다시 만나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에 눈길이 갔어요. 고령화 시대에 맞춰 제작진이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어요. 또 연출자가 저와 ‘명성황후’를 같이했던 윤창범 PD라는 점도 작용했어요.”

하지만 그는 제작진과의 첫 미팅에서 효섭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다시 난감해졌다고 털어놓았다.

“연출자는 효섭이 아버지이면서 남자로도 느껴져야 한다고 하고, 작가는 산 같고, 나무 같은 남자라고 설명하더라고요. 거참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혼란스러웠는데 첫 대본을 보고 이해가 갔어요. 효섭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변함없이 뚝심 있게 가는 그런 사람이에요. 제가 입어보지 않은 ‘옷’이라 연출자와 작가가 입혀주는 대로 입고, 역할을 재미있게 ‘운반’하는 데 집중했어요. 장미희 씨와 로맨스를 차곡차곡 쌓아오다 보니 이젠 ‘60대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사랑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겨요.”

지난 19일 방송분에서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미연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사라진 후 효섭이 미연을 찾아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왔다. 미연이 “내 인생 마지막 결혼식인데 대충 치르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효섭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집으로 향했다. 유동근도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고 밝혔다.

“몇 회 남지 않았는데 미연에게 치매를 던져줬어요. 개인의 소소한 문제를 사회 문제로 확장하려는 제작진의 노력에 감사해요. 대본이 촬영 직전에 나와서 두 사람의 사랑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몰라요. 한 주 한 주 대본이 나오면 이야기를 제 걸로 만들어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하죠. 시청자와 마찬가지로 저도 ‘이번 주는 재미있었는데 다음 주는 또 어떻게 될까’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돼요(웃음).”

효섭이 미연을 대하는 태도나 자식을 아끼는 모습이 유동근의 실제 모습처럼 보인다. 1989년 9세 연하의 배우 전인화와 결혼한 그는 자상한 남편이자 좋은 아빠로 알려졌다.

“어떨 때는 대본을 읽으며 ‘작가가 내 생활을 훔쳐봤나’하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집에서 딸,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거든요. 촬영장에서도 생활연기를 하니 편하죠. 제작진이 큰 틀만 정해주고, 제 나름대로 ‘운행’하도록 맡겨줘요. 그게 고맙죠.”

유동근-전인화 커플은 연예계에서 소문난 잉꼬부부다. 최근 전인화가 유동근의 생일을 맞아 드라마 촬영장으로 빙수차를 보내 화제가 됐다. 빙수차에는 ‘미연씨, 효섭씨 생일은 인화가 챙길게요’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전인화 씨가 미연을 질투하는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유동근은 환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전인화 씨가 장미희 씨를 좋아해요. 관리 잘하고, 잘 버티는 선배로 존경하죠. 딸아이도 효섭과 미연의 관계를 재밌어하고요. 집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결혼 초부터 줄곧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저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고요. 어머니도 가셨으니 이젠 좀 쉬라고 해요. 반찬이 많이 올라온 날은 제가 설거지를 해요(웃음). 가족들에게 많이 의지하는 편이에요. 나이를 먹어서 고아라고 표현하진 않지만 고아잖아요. 가족들이 하라는 대로 말을 잘 듣죠. 제가 잡념 없이 열심히 할 수 있는 힘은 가족에게서 나와요. 전인화 씨와 아이들이 늘 제 손을 잡아주고 격려해줘서 촬영장에서 집중력을 폭발시킬 수 있어요. 전인화 씨에게 감사해요.”

그는 멜로 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미지의 고착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역할을 찾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끈적한 남녀 관계를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사랑은 아름답지만 그런 사랑을 깨끗하게 운반하는 게 쉽지 않죠. 멜로로 뜬 배우들은 대부분 멜로로 가죠. 근데 사극만 계속하다 보니 현대물을 할 기회가 적었어요. 맨날 수염 붙이고 곤룡포만 입으니까 양복이 입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애인’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용의 눈물’로 곤룡포를 다시 입었죠. 왕 역할을 자주 하다 보니 강한 이미지가 굳어졌어요. 저는 최선을 다해 했는데 그게 오히려 방해가 됐어요. 어디 가든 항상 왕인 게 싫어서 반항심이 생겼고, 그걸 탈피하려고 코미디 영화 ‘가문의 영광’을 한 거예요. 그 영화에서 건달 역을 맡았더니 이후로 계속 건달 역만 들어왔어요.”

1980년 TBC 23기 공채 탤런트로 시작해 연기인생 38년 차에 들어선 그는 “배우가 된 걸 후회하진 않지만 다시 태어나면 안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 번 해봤으니 다른 걸 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서 배우를 한 번 더 하면 기가 막히게 할 것 같지도 않고요. 연기가 좋아서 방송국에 들어갔는데 입사하자마자 KBS와 통폐합이 되는 아픈 경험을 했어요. KBS는 TBC 출신 연기자들을 교육하지 않고, 배역도 안 줬죠. 그래서 제작부장으로 역할이 바뀌었어요. 여의도 당구장에서 게임을 봐주고 짜장면을 얻어먹으며 세월을 보냈죠. 배우는 인생을 깨우치는 직업인 것 같아요. 어떻게든 배우로 성공해보려고 한길만 좇았는데 그러다 보니 듣는 귀도 밝아지고, 보는 눈도 넓어졌어요. 방송국 스튜디오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곳을 수많은 배우가 지나가죠. 지금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주위 동료를 둘러보게 되고, 후배들도 챙기게 되네요.”

이런 책임감으로 그는 2016년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이사장이 됐고, 회원 1만5000명의 방송예술인단체연합회도 결성했다. 또 3년째 서울드라마어워즈 심사위원장도 맡고 있다.

“한국방송연기자협회는 이순재, 최불암 선배님이 만든 단체인데 어찌하다 보니 제 순서가 됐어요. 단체 일을 해보니 이름 없는 연기자들이 우리 모두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작권협회를 만들어 연기자들이 재방료를 받게 됐고, 권익이 보호되고 있어요. 스타급 배우들은 일이 바쁘기 때문에 단체에 참여하라고 권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꾸려가는 단체인지는 알아줬으면 해요. 내년부터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함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어요. 연기자와 작가, PD를 꿈꾸는 젊은이들을 키워서 직접 제작도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려고 해요.”

연기자는 정년이 없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정년은 없지만 대사를 못 외우면 아웃이죠(웃음). 이순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배우는 뽑혀야 하는 직업이라 계속 기다려야 해요. 그게 참 어려워요. 선택이 안 되면 괴롭고요. 괴로움을 피해가려면 도망가지 말고, 바로 꼬리를 내려야 해요. 아이들이 어느 날 ‘아빠는 왜 영화 안 해’라고 묻더라고요. ‘나한테 맞는 작품이 없어서’라고 답하면 바로 ‘웃기고 있네’라고 할 거예요. 그런 말로는 설득이 안 돼요. ‘하고는 싶은데 나를 찾아주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어. 솔직히 이게 다야’라고 말해야 아이들이 저를 안아줄 수 있어요. 골프도 처음 ‘100돌이’로 시작해 보기 플레이어가 되고, 80대 중반에서 싱글로 갔다가 나이 먹으면 다시 ‘100돌이’가 되잖아요. 젊었을 땐 드라이버로 250m 이상 날렸는데 나이가 드니 간신히 100m 가요. 평생 주인공만 할 줄 알았지만 후배들에게 기회가 가고, 시청자는 늘 새로운 얼굴을 원하잖아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지죠. 100세 시대가 되며 기회가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어떻게든 무대 위에서 숨 쉬어야죠. 배우는 그래야 해요.”

김구철 기자 kc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