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태양에 맞서는 여름 나무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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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나남출판·나남수목원 회장

인간의 욕망이 자초한 자연학대로
폭염·폭우·폭설 반복 불임의 시대

지구에 잠시 소풍나와 살다갈 우리
후손에 건강한 녹색지구 물려줘야

처서 주변에 회화나무가 꽃 피우면
힘들었던 여름도 가을에 밀려간다

계절의 감각은 바람이다. 태풍 너머로 가을바람이 얼굴을 내민다. 지난여름은 위대했다. 불화살처럼 내리꽂히는 태양의 열기를 한 달 넘게 맨몸으로 이겨내야 했다. 처음 겪는 이 여름의 땡볕을 견뎌낸 사람들이 더 위대한지도 모르겠다. 땀도 흘리지 않고 가을의 수확을 바랄 수는 없다. 불에 덴 것같이 타들어 가는 과일들의 모습에 풍요로운 가을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여름 수목원의 나무들 앞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소나기라도 기대하며 하늘을 쳐다보는 날이 많았다. 자연 앞에 자꾸만 작아지는 것은 겸손이 아닌 현실이다. 지구온난화로 이제는 날씨가 불순한 것을 넘어 난폭해졌다.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심성이 거칠어지고 탐욕의 질주가 계속되자 자연환경도 극단으로 치닫는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경계를 한참 넘어섰다. 자연에 순응해야 하는 생체 면역력 기르기 훈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조금 편히 살자는 인간들의 못난 욕망이 자초한 자연 학대로 반복되는 폭우, 폭설, 폭염, 산불이 지구촌 어디를 가리지 않고 불임(不姙) 시대를 낳고 있다. 여의도 면적의 이삼십 배를 휩쓰는 스웨덴의 산불은 겨울철 눈이 와야 그친다는 보도도 있다.

불쾌지수 몇 퍼센트라는 날씨 정보는 차라리 낭만이었다. 화내지 말고 욕심을 내려놓고 견디라는 당부의 수준이었다. 이제 체온을 훌쩍 넘어서는 살인적인 더위는 목숨이 달린 현실이 되었다. 한 달 넘게 계속된 열대야는 ‘초(超)’열대야가 되고, 미세먼지 예보에 ‘초’미세먼지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산업화의 오염과 자동차 배기가스와 온실가스의 공해물질이 가득 찬 미세먼지는 문명의 화려함을 담보한 살인 가스와 다름없다. 가까운 미래의 불안은 물질 만능의 허황된 빛과 인간 상실의 그림자가 갈수록 짙어지는 초고속 압축 성장의 후유증이다. 준비되지 못한 채 허둥대며 맞이하는 고령사회의 현실이 더욱 그러하다. 방향을 잃은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질서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臨界點)을 넘어섰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많은 환경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는 인간의 행보는 여전히 더디다. 이제는 기압골의 흐름이나 북극 제트기류의 불균형을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환경을 사랑하는 작은 실천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잠시 소풍 나온 지구에 살다 어느 별로 돌아갈 우리라면 후손들에게 건강한 녹색지구를 올곧게 넘겨주기 위해 각자의 마음에 녹색 공간 하나씩을 꿈꾸고 가꾸어 볼 일이다.

지난겨울은 봄에 자리를 내주기 싫은지 몹시 앙탈을 부렸다. 꽃피는 춘삼월에 내린 눈에 꽃이 얼어붙었던 블루베리는 거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 지난해 일찍 시작한 강추위는 짧은 장마 끝의 땡볕 더위와 짝을 같이하는 모양이다. 수목원의 여름 나무들은 잔뜩 성이 나 있다.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가마솥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여름이 나무들에는 성장의 최적 시간이다. 폭주하는 기관차가 내뿜는 씩씩거리는 소리로 산소를 내뱉는다. 거대한 침묵처럼 보이는 숲이 지금 한창 파시(波市)의 절정처럼 야단법석이다. 올해 나이테는 제법 넓을 것 같다. 3000그루의 녹색 초가지붕 같은 반송(盤松)이 한 뼘 넘게 초록 띠를 더 두르고 의기양양해 한다. 주위에서는 더위 먹는다고 말리지만, 여름의 땀방울에 뒤범벅이 된 채 나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하며 안부를 전하는 무념무상의 시간을 전부 알지는 못할 것이다.

느티나무가 새로 밀어내는 여름 새순들이 아기씨의 연초록 긴 댕기처럼 신선하다. 여름이 정점으로 치닫는다. 연못에는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여는 수련(睡蓮)이 스스로 잠자고 깨어나길 반복한다. 매미들의 합창도 거세어졌다. 5∼7년을 땅속에서 은인자중하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한 두세 주 동안 짝을 찾아 종족을 보존해야 하는 몸부림이다. 벌들도 극성스러워졌다. 벌에 쏘이는 일도 다반사지만, 올해 봉침(蜂針)은 더욱 깊이 박히는 것 같다. 올해는 삼사 년 봄 가뭄에 시달렸던 나무들에 쏟아졌던 서너 차례의 빗줄기가 그렇게도 기뻤다. 나무만 잘 자란 게 아니고 풀들도 덩달아 창궐했다. 풀을 베고 돌아서면 또 고개를 치켜든다. 풀베기에 여름날 하루가 너무 짧다. 늦여름의 꽃 궁궐을 꿈꾸는 욕망으로 반송밭에 심었던 벌개미취가 삼사 년 지나자 제법 들국화 모습을 연출한다.

고개를 들면 여름의 숲은 녹색의 향연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름 나무의 꽃구경은 이팝나무의 하얀 꽃부터 시작한다. 팝콘처럼 터지는 이 꽃에서 쌀밥을 연상하며 춘궁기를 넘는 모내기를 시작한다. 2005년 완공한 11㎞ 청계천 복원 길의 가로수로 이팝나무가 등장한다. 당시 서울시장이 어린 시절 배고팠던 기억으로 이 나무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여름 한철 석 달 가까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태양에 맞서는 붉은 배롱나무의 꽃그늘로 여름은 조금 화려해진다. 남쪽만이 아니라 강원도 강릉의 가로수 길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이 나무는 포천 수목원에서는 겨울을 날 수 없다. 유년시절 가슴에 새겼던 배롱나무꽃의 그리움을 어디에나 자생하는 싸리나무꽃으로 대신하며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수묵화의 안개에 싸인 듯한 싸리나무의 작고 붉은 꽃들은 몽환적이기도 한다. 귀하다는 노각나무가 하얀 동백꽃 같은 작은 꽃들을 떨어트리고 나면 형형색색의 무궁화나무 꽃이 뜨거운 여름과 대적한다. 아기씨 같은 연약한 줄기에 흐드러지게 핀 으아리의 흰 꽃들은 덤이다. 처서(處暑) 주변에 선비목이라는 회화나무가 하얀 꽃을 피우면 여름은 간다. 나무처럼 늠름하게 살기가 더욱 힘들었던 그 여름이 가을바람에 밀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