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요즘 클래식>과시없는 투명한 연주… 러 레퍼토리에선 독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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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김태형(가운데)이 서울시립교향악단 단원들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3중주를 연주하기 전에 청중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서울시향과 피아니스트 김태형

피아니스트 김태형은 러시아 레퍼토리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듯하다. 서울시향 실내악 시리즈(지난 24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의 첫 곡은 라흐마니노프 ‘엘레지풍의 3중주’ 1번. 4개의 음가로 이루어진 단순하지만 비통한 분위기의 첫 번째 테마부터 김태형은 무게감과 풍부한 감정의 색채를 드러냈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가 최근 내놓은 음반(도이치 그라모폰)에서의 같은 대목을 뛰어넘는 느낌이었다. 어둑한 첫인상은 결코 작위적이지 않은 흐름과 방식으로 빛을 발했고, 바이올린과 첼로가 담백하지 못하게 늘어질 때마다 포인트를 세심하게 잡아내는 것도 피아노 앞에 앉은 김태형의 몫이었다. 고르게 다듬어져 있는 기교의 완성도는 연주자의 노력을 가늠케 했다.

그리고 김태형은, 실내악 연주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두 번째 곡목은 라흐마니노프나 차이콥스키에 비해 덜 친숙한 20세기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메트너의 피아노 5중주. 슈만이나 브람스를 떠올리게 하는 고전적인 작법 안에서 러시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이색적인 매력을 지닌 곡이다. 작곡가 자신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만큼 피아노 파트가 네 대의 현악기를 주도적으로 이끌도록 설계해 놓은 이 곡에서 김태형은 과시적이지 않은 투명한 연주로 깔끔한 동력을 만들어냈다. 간결한 페달링과 절제된 타건은 오히려 실내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확신을 드러낸다.

김태형은 그동안 한국에서 러시아 작곡가의 실내악 무대에 자주 초청돼 왔다. 뮌헨 국립음대에서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엘리소 비르살라제를 사사한 김태형은 이후 스승을 따라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둥지를 옮겼고, 이후 다시 뮌헨으로 돌아가 실내악 공부를 마쳤다. 뮌헨에서 ‘독일스러운’ 삶을 산 한편 러시아 혈통의 음악을 타이트하게 학습한 김태형은, 2013년 트리오 가온을 창단해 음악적 성장을 꾀했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소속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첼리스트 사무엘 루츠커(Samuel Lutzker)와 함께 내밀한 호흡을 주고받으며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어가는 데 몰두하고 있다. 젊은 연주자의 차분하고 밀도 있는 성장은 이번 한국 공연뿐 아니라 지난 7월, 트리오 가온이 멜버른 실내악 콩쿠르에서 2위와 청중상, 현대음악상을 수상한 것으로도 증명된다.

서울시향의 임가진·김덕우(바이올린), 강윤지·김성은(비올라), 김소연·장소희(첼로)는 마지막으로 차이콥스키의 현악 6중주 ‘피렌체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현의 성찬’을 맛볼 수 있는 활기차고 리드미컬한 곡이지만, 쌍으로 구성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여섯 주자 간의 치밀하고 꼼꼼한 앙상블이 요구되는 난곡이다. 정규 실내악단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날의 연주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맹렬하게 달리는 1악장의 첫 번째 모티브부터 빠른 패시지가 반복될 때마다 삐걱거리며 마음을 졸이게 했다. 연주자 한 명 한 명의 기량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복잡하게 뒤엉키는 선율을 첨예하게 들려주기에는 리허설이 더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이날의 연주를 실패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연주 내내 무대 위에 쏟아진 열정적인 기운이 차이콥스키가 영감을 얻었다던 피렌체의 찬란한 아침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35분간 여섯 명의 연주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몰입한 청중은 기쁨에 젖은 피날레를 만끽했다. 객석에 퍼지는 박수에 동참하며 새삼 실내악의 묘미를 체감했다.

음악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