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評>협상과 군사적 대비는 병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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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용 前 외교부 차관

北 核포기 ‘분명한 약속’이 핵심
싱가포르 회담 ‘좋은 기회’ 놓쳐
美 대선 블랙홀까지 시간 촉박

추가 核활동 저지가 긴급 과제
안보리 10개 제재 지속하고
3축 체계 구성도 묵묵히 해야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을 협상할 때의 일이다. 8월 어느 날 늦은 밤, 그날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주장과 공박이 오갔다. 친분이 두터운 중국 차석대표가 한국 차석대표인 내게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고 쓴 쪽지를 보내왔다. 삼국지 후반부 제갈공명이 사마의 3부자를 상방곡(上方谷)에 몰아놓고 회심의 화공을 가했으나 난데없이 내린 소나기가 꼭 죽을 목숨이었던 이들을 살렸을 때 공명이 탄식하며 했다는 말이다. 중국 차석대표는 그날따라 지쳐 보이는 필자를 보고 힘을 내자고 그런 글귀를 보낸 것이다.

북한과의 협상은 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한다. 9·19 공동성명 협상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시 북한은 핵실험을 하기 전이어서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한다’는 핵심 조항은 오히려 비교적 쉽게 타결됐다.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지금은 13년 전에 비교적 쉽게 합의한 부분이 핵심이 된다. CVID, FFVD,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무슨 표현을 쓰든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한다는 분명한 약속을 받아내는 게 관건이다. 물론 검증·사찰 등 어려운 과제가 남아 있지만, 북한의 핵 포기가 목적지라고 합의하지 못하면 사실 핵 협상의 첫발도 떼지 못한 것이다. 미·북 정상회담, 그 전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3차례 방북에도 협상은 여전히 첫발도 떼지 못하고 있다.

사실,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좋은 기회를 놓쳤다. 당시 북한은 미·북 정상회담에 목을 매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를 발표한 다음 날,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내심 높게 평가해 왔다’는, 정말 북한답지 않은 온순한 담화가 나오게 된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김정은에게서 받아냈어야 했다. 또, 그러한 약속은 오직 김정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좋은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확실한 협상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최대한 신속하게 협상하는 게 중요하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사이클이 시작되기 전에, 선거라는 블랙홀에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기 전에 협상을 끝내야 한다. 비핵화 로드맵 합의를 늦어도 내년 봄까지 만들고 곧바로 본격적인 이행 국면에 들어가야 한다. 앞으로 1년도 안 남았다.

다음으로, 협상의 ‘평평한 운동장’(level playing field)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처럼 북한이 핵물질을 마음대로 생산할 수 있다면 시간은 북한 편이다. 북한은 시간 끌기와 버티기, 살라미 전술과 벼랑 끝 전술을 맘껏 구사하면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려 할 것이고, 만약 협상이 실패한다면 북한에 고스란히 시간만 벌어주는 셈이 된다. 북한의 핵 활동을 멈추는 것이 긴요하다. 현재까지 북한이 취한 핵실험장 폐쇄나 핵실험, 장거리미사일 발사 중단만으론 크게 부족하다.

모처럼 구축된 대북 제재의 틀을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10개의 유엔안보리 결의로 구축된 강력한 제재는 북한 경제를 위축시키는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제재는 앞으로 협상 과정에서 북한의 양보를 압박하고 양보할 경우 반대급부로도 쓸 수 있는 다목적 도구가 된다. 나아가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제재의 틀만 살아 있으면 조급한 군사 옵션 검토를 막고 최대 압박 전략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제재 압박은 평화적으로 북핵을 해결하는 최선의 대안임을 유념해야 한다. 협상이 시작됐으니 제재를 좀 늦춰 줘야 한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끝으로,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이에 대비해 많은 시간이 걸리는 우리의 군사적 대비는 반드시 계속해 나가야 한다. 핵심은 킬체인, 한국형미사일방어(KAMD), 대량응징보복(KMPR)으로 구성되는 한국형 3축 체계다. 계획대로 투자가 이뤄진다고 해도 한국형 3축 체계의 주요 능력은 2020년대에 가서야 갖춰지게 된다. 또, 이런 능력들을 모두 갖추더라도 최소한의 자위 능력 확보만을 의미할 뿐, 주변 강대국들과의 비교는 여전히 요원함을 잊어선 안 된다. 이번에 정부가 3축 체계 구축을 포함한 국방예산을 증액 편성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밖으로 크게 떠벌릴 건 없지만, 필요한 대비는 소걸음처럼 묵직하게 해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