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빚준 자와 빚진 자의 욕된 자리… 인조 이파리가 가려줬다

구자명·김의규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 (11) 비루와 남루 사이

당당하고 동탕했던 대학 선배
에르메스 넥타이 매고 와서
다짜고짜 100만원 빌려가

돈갚기로 한 날 몇 번 어기고
젊은 여자랑 벤츠 타고 온 그
“며칠만 봐주라” 주눅 든 눈빛
나 또한 초라하게 느껴졌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그토록 당당하고 동탕했던 R이 보름 사이 이렇게나 누추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는 여전히 스마트한 리넨 재킷에다 명품 패션에 어두운 그녀마저 얼룩말 문양 때문에 알아보는 에르메스 넥타이를 매고 있었지만 얼굴빛은 탁하고 어깨는 구부정했다. 보름 전 연구소로 숙을 찾아와 로비 카페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의 표정은 밝았었다.

“아 좀 급하게 메꿀 건이 생겼는데 괴로우니 묻지 말고 백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 사흘 안에 갚을게.”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롭다면서도 그는 숙이 시켜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거, 과테말라산이구먼. 신맛이 나고 스모키한 거 보니.” 하며 씨익 웃었다.

대학 동아리 시절 그의 그런 낙천성은 후배들에게 묘한 흡인력으로 작용하여 딱히 유능한 것도 아니면서 내내 리더로 추대되곤 했었다. 졸업 후 대기업 기획실에서 일하다가 이태 전 구조조정 바람에 내몰린 듯 그만두고 나온 그는 일인 출판사를 차렸다. 자기계발서 계통의 베스트셀러 몇 권을 기획해 짭짤한 재미를 본 후로 정규 직원도 두어 명 고용해 출판인으로 제법 자리를 잡아가는 걸로 동문들 사이에 알려졌다.

그날 숙은 ‘묻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다. 마침 그 전날 만기돼 찾아놓은 예금이 있었는데 재투자를 며칠만 미루면 되잖겠나 싶었다. 그러고는 약속한 사흘이 두 번이나 지나도록 잊고 있다가 일주일째 되는 날 문득 생각이 나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지금 지방에 내려와 있어. 그게 받을 걸 못 받아 하루 이틀 더 걸리겠는데 미안하지만 모레 서울 올라가자마자 입금해 줄게. 미안, 미안, 매우 미안.” 이때도 그의 목소리는 아주 쾌청하고 구김살이 없었기에 숙은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나는 동안에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노총각인 남동생이 웬일로 최근 교제하는 여자가 있는데 누나에게 보이고 싶다는 용건의 전화를 해왔다. 아 얘가 드디어 장가를 가려는가 보구나. 결혼 준비를 도와얄 텐데…. 숙은 그 순간 R에게 빌려준 돈을 어서 받아 목돈을 따로 챙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후 내내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출판사 대표전화로 걸었더니 어느 직원인가 받아 사장이 외근 중인데 돌아오면 전할 테니 연락처를 남기라고 했다. 숙은 이름과 사무실 전화번호를 남겼고, 휴대폰으로는 문자를 넣었다. ‘선배님 왜 연락이 안 되죠? 빌려간 거 빨리 좀 갚으셨음 해요.’ 그러나 사무실 전화로도 휴대폰으로도 그는 연락하지 않았다. 퇴근 무렵 숙은 ‘어째서 답이 없지요? 무슨 사고라도 났나요?’ 하고 염려 곁들인 문자를 다시 보냈다. 그제야 그에게서 짧은 문자 회답이 왔다. ‘별일 무. 내일은 꼭.’

하지만 그 내일에도 그는 아무 연락 없이 약속을 어겼고, 전화도 문자도 답하지 않은 채 또 사흘을 흘려보냈다. 계좌이체 영수증을 찾아 그가 돈을 빌려간 게 이미 열닷새 전이라는 걸 확인한 날 아침, 숙은 사무실에 반차를 내고 그의 출판사를 찾아갔다. 여직원 한 명이 좀 이른 시간인데도 나와 있다가 사장은 출근이 대중없어서 언제 올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요즘 출판사에 무슨 일 있냐고 하자 “아뇨. 왜 그러시는데요? 어제도 누가 전화로 물으시던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숙은 맞은편 빌딩 일층 카페에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하고 사무실을 나와 길을 건너는데 기분이 묘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는데 그것이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R을 향해선지, 이악스러운 빚쟁이처럼 그의 길목에 진을 치려 하는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숙이 알기로 R의 두 아이는 유복한 외가의 지원을 받아 캐나다에 조기유학을 가 있었고 그의 아내는 그 핑계로 밴쿠버를 동네 마실 가듯 들락거린다고 들었다. 아파트도 대기업 다닐 때 평수 넉넉한 걸로 장만해 두었고, 출판사 재정도 시작부터 연달아 히트작을 낸 덕분에 제법 든든하다고 알려진 터였다. 인터넷에서 살펴보면 현재도 그 출판사서 낸 책 여러 권이 스테디셀러로 순항 중이었다. 사무실도 크진 않지만 그의 럭셔리 취향에 맞게 하이엔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도박을 했나? 혹시 경마? 아님… 수상한 약에 손을 대서? 설마…. 차라리 자주 곁을 비우는 아내 모르게 딴 여자를 만나느라 뒷돈이 들어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오래 알아오긴 했지만 이런 식의 거래가 허물없을 만큼 친하다곤 할 수 없는 후배에게 돈을 꿔야 할 정도로 소모적인 외도를 할 위인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괴로우니 묻지 말라며 싱겁게 웃던 그. 말 못할 무슨 사연이 있는 거겠지…. 그냥 기다려주자. 그 돈 없다고 당장 큰일 날 것도 아닌데…. 숙은 카페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그때 은빛 벤츠 세단이 길 건너에 멈춰 섰고 조수석 쪽 문을 열고 나오는 덩치 큰 사내가 눈에 들어왔는데 R이었다. 운전석에는 웬 젊은 여자가 한 손은 핸들에 얹고 다른 한 손은 그를 향해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여자였구나…! 숙은 곧바로 길을 건너 그에게로 갔다.

카페에 들어가서 얘기하자며 그녀를 이끄는 그의 어조는 영락없이 주눅 든 채무자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가 요새 좀 몰려 있는 사정이 있어서 그래. 며칠만, 딱 며칠만 더 봐주라, 응?” 하며 눈썹을 팔자로 찌푸린 채 웃어보였을 때 그녀 자신은 비정한 사채업자가 된 것 같았다. 숙은 그의 비루에 치가 떨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걸 애써 누르며 따박따박 내뱉었다. “아니요. 지금 당장 갚으세요. 그러지 않음 나도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요.”

그는 잠시 음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숱이 엷어진 그의 머리 중앙에 비듬이 희끗희끗 앉아 있었다. 한없이 누추해져버린 R의 모습을 보며 숙은 고작 이런 식으로밖에 대처하지 못하는 자신 또한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카페가 모닝커피를 마시려는 사람들로 점점 북적이기 시작했다. 청록빛 인조 이파리가 풍성한 파초 화분이 빚준 자와 빚진 자가 마주한 욕된 자리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 짝퉁 식물의 그늘 속에서 숙은 멀미를 앓으며 속으로 외쳤다. 비루와 남루 사이… 우리 각자의 삶은 어디쯤입니까.

구자명 소설가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창립위원장